두 개의 달 위를 걷다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33
샤론 크리치 지음, 김영진 옮김 / 비룡소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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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나서 내가 거의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때 날씨다. 왜냐하면 내가 책을 읽고서 쓰는 때와 블로그에 올려둘 때 시간 차이가 많이 나기 때문이다(아주 가끔은 그때 읽고 쓴 것을 바로 올려두기도 한다). 어쩌다 보니, 라기보다 그냥 게을러서 그렇게 된 거다. 이런 말을 왜 쓰느냐 하면, 그냥이다. 지금은 칠월 초다. 블로그에 쓰게 되는 때는 언제일지 나도 모르겠다. 지금 마음과 그때 마음은 아마 다를 것이다.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올해 반이 흐르고 칠월이 왔는데도 기운이 안 난다고나 할까. 지금 기운이 날 때는 아니지만. 칠월부터는 조금 부지런히 책을 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처럼 안 되는 거다. 나는 대체 언제부터 기분이 하루 괜찮고 하루 안 좋게 됐는지 모르겠다. 요새는 안 좋을 때가 더 많은 것 같기도 하다. 핑계일 테지만 그래서 책읽기가 쉽지 않다. 더위 때문은 아니고 내 마음 때문이다. 사실 아직 그렇게 더위를 느끼고 있지도 않다(칠월 중순이나 말쯤 되면 덥겠지). 재미있는 이야기도 아니고 이런 재미없는 이야기를 쓰다니. 책이 읽고 싶고 글이 쓰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방법은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하기다. 그러니까 책을 읽고 쓰는 거다. 그래야 우울한 기분이 조금은 나아진다. 별 말 아니지만 이만큼 쓰니 기분이 아주 조금 나아졌다.

 

이 책을 읽으려고 한 것은 며칠 전이다. 미루다가 드디어 읽기 시작했는데 앞부분은 집중이 안 되었다. 그렇게 집중 못하고 읽은 게 한두번이 아니기는 하다. 요새는 졸리면 안 읽지만, 예전에는 졸면서도 읽었다. 그리고 쓰기도 했다. 잘 쓰지는 못했지만. 썼다는 게 중요하지 않나 싶다. 꼭 잘 써야 하는 것은 아니잖아. 세상에는 사람이 많고 그 안에는 아이도 많다. 여기에 나온 아이 샐(살라망카 트리 히들)은 만으로 열세 살일 테니까 우리나라에서는 중학생이겠지. 중학교 일학년은 아직 초등학생 티를 벗지 않았을 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사실 초등학생 중학생은 상관없다. 사람이 어떤 슬픈 일을 겪으면 그 일에 파묻혀 슬퍼하다가 시간이 흐르면 다시 살아간다. 이게 보통이지만 슬픈 일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마치 그런 일은 없었다는 듯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아기가 죽었을 때 엄마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마음을 놓아버리거나 아직도 살아있다고 믿기도 하지 않는가. 아들이 죽은 어머니 시체와 살았던 영화 <사이코>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여기에 이런 일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샐은 어느 날 집을 떠난 엄마가 다시 집에 돌아오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엄마는 더 이상 집에 돌아올 수 없다. 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전에는 차 사고로 아빠와 동생을 떠나보낸 오브리를 만나기도 했는데. 이런 것을 보면서 세상에는 슬픈 일을 겪는 아이들이 많구나 했다. 책에 나오는 것은 부모님이나 식구가 죽는 것이다. 많이 본 것은 아니지만. 샐한테는 아빠와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었다. 샐을 걱정해주는 사람이라고 해야겠구나. 샐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엄마가 떠났던 길을 따라간다. 그게 삼천킬로미터였다. 여행길에서 샐은 할머니 할아버지한테 친구 피비 이야기를 들려준다. 피비 엄마가 집을 나갔던 이야기이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샐은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 지금까지 모르는 척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샐 엄마는 죽은 아이를 낳고 무척 마음 아파했다. 그리고 어느 날 훌쩍 집을 떠났다. 그렇다고 샐을 버린 것은 아니다.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다. 하지만 돌아오지 못하게 되었다. 샐은 엄마가 자기 때문에 죽은 아이를 낳고 집을 떠났다고 생각했다. 피비 이야기를 하면서 피비 엄마가 집을 나간 것은 피비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샐은 엄마가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슬픔을 받아들이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상처와 마주하는 것과도 같다. 마음 아파도 슬픔에서 달아나면 안 된다. 생각해보니 어른도 잘 못하는 일이기도 하구나. 할머니 할아버지와 떠난 여행이 샐한테 도움이 되었다.

 

 

(지금은 칠월이 다 끝나갈 때다 타이핑하는 게 귀찮았는데, 이번에는 조금 해두었다 쓸 때 잘 쓰면 좋을 텐데, 나중에 타이핑하면서 늘 왜 이렇게 썼을까 한다 좀 괜찮다고 생각하는 적은 어쩌다 한번)

 

 

 

희선

 

 

 

 

☆―

 

“누구든 자기 문제, 자기 삶, 자기의 작은 걱정거리만 생각하며 살아간단 말이지. 그러면서 다른 사람이 내 일정표에 맞춰 주기만을 바라지 않니? ‘내 걱정거리 좀 봐 줘요. 나 좀 걱정해 달라고요. 관심 좀 가져줘요, 내 문제들을. 날 좀 돌봐 달라고요.’ 한다 이거다.”  (118쪽)

 

 

어느 날 문득 루이스턴 시로 갔던 여행이 나를 위한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값진 선물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분은 내게 엄마의 모카신을 신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것이다. 나는 엄마가 본 것을 보았고 엄마가 삶의 마지막 여행에서 느낀 것을 느꼈다.  (43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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