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편지 창비시선 433
노향림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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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늘하고 단풍이 드는 가을에 편지를 쓰면 좋겠다고 하지만 편지는 언제 쓰든 괜찮다. 책 읽기도 마찬가지구나. 난 사철 내내 편지 쓰고 책을 만난다. 어느 때 하면 가장 좋다고 말하기 어렵다. 내가 하고 싶은 때일 듯. 쌀쌀할 때보다 더울 때 나은 것 같기도 하다. 시원한 데서 책 읽지는 않는다. 더울 때 내 기분이 좀 낫다. 어쩌면 그것도 더울 때마다가 아니고 그냥 그때 나았던 건지도. 많이 더운 여름에 책을 많이 만나기도 했는데, 편지는 좀 우울할 때 더 썼던가. 일기를 자주 쓰면 편지도 자주 쓴다고 생각한 적도 있는데, 그것도 늘은 아니었다. 그냥 그때 내가 일기뿐 아니라 편지도 쓰고 싶었던 거겠지. 그 생각을 하고 썼을까. 그런 내가 조금 우습구나.

 

 난 어느 때든 책을 보고 편지를 써도 많은 사람은 가을에 그 생각을 더 할지도 모르겠다. 그건 시나 노래에 영향을 받은 건 아닐까. <푸른 편지>라는 시에는 유치환 시가 한구절 나온다. 우체국에서 편지를 쓴다고. 난 가끔 우체국에 간다. 편지 보내러 가는 건 아니고 우표 사러 간다. 난 편지 쓰면 우체통에 넣는다. 그러고 보니 요즘 우체통이 많이 줄었다고 했구나. 그건 요즘 일어난 일은 아니구나. 큰 도시는 우체통이 많이 줄었을지 몰라도 작은 도시는 꼭 그렇지도 않다. 집배원이 다 돌아볼지 그건 알 수 없지만. 우체국 앞에 있는 우체통은 날마다 보러 오겠지. 시집 제목이 ‘푸른 편지’여서 편지 이야기를 했다. 시인이나 소설가 그밖에 글 쓰는 사람이 쓰는 글은 편지와 다르지 않다. 지금 내가 쓰는 것도 편지 같을까.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기쁠 텐데.

 

 노향림 시인 잘 모른다. 시를 쓴 지 오래 됐는데 난 이제야 알았다. 이름 한번이라도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번에 만난 시집이 처음 인 걸 보면 몰랐던 거겠지.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어린 시절을 떠올리기도 한다. 난 그렇게 자주 생각하지 않지만. 생각나는 것도 별로 없다. 노향림이 생각하는 건 친구 아버지 어머니 둘레에 살던 사람이다. 노향림한테 아버지가 시인이 되라고 했나 보다. 그런 기억 있다니 부럽구나. 지금도 물고기를 잡으러 바다에 간 배가 돌아오지 못하기도 할까. 아주 멀리 가면 그런 일 일어날지도. 어렸을 때 본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아내가 물고기 잡으러 바다에 간 남편을 기다렸다. 배에 물고기를 가득 싣고 돌아온 적도 있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기도 했다. 그때 태풍에 배가 가라앉았다는 소식이 들린다. 여기에는 그런 이야기도 담겼다.

 

 시 쓰는 사람도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 가는 사람 많겠지. 그걸 시로 쓰기도 하겠다. 노향림은 둔황 막고굴에 가고 타클라마칸 고비에도 갔다. 인도와 누란은 어떨까. 중국에 여러 번 갔을까. 몇 번 안 가도 여기와 다른 곳은 자꾸 생각날지도 모르겠다. 하와이도 나왔는데 거기에 간 건 아니었다. 이 시집을 보면서 난 언제까지 글을 쓸까 생각해봤다. 내가 죽기 전까지 쓸지 어느 날 아무것도 쓰고 싶지 않을지. 쓰지 않아도 괜찮을 날이 올까. 노향림은 여전히 시 쓰기를 생각했다. 오래 시를 써도 아직도 쓸 때마다 힘들까. 어떤 소설가는 그렇다고도 했는데.

 

 

 

한밤 눈발이 아파트 창에 부딪는 날

혼자 넋 놓고 창밖을 바라보는데

6동 반장이 벨을 누른다.

긴급 안건으로 모두 모이는 반상회란다.

처음으로 참석해 출석 사인을 하는데

이를 본 한 여성이 어마 시인이시네요,

젊은 날 쓰신 시집 애독자였어요.

옆자리 중년 여성도 한마디 한다.

요즘 시는 시인들끼리만 본다던데요.

아직도 시를 읽는 독자 있어요?

그럼요, 단 한 사람의 독자가 있을 때까지

시인은 시를 쓰지요, 말해놓고 나는

눈 오는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단 한 사람의 숨은 독자는 바로 그 시를 쓴

시인 자신인 걸요.

목젖까지 차 오르는 이 말 뒤로

한결 더 소리 낮춰 절규하듯 내리는 함박눈

나는 회의 시작 전에 슬그머니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

차선도 보도블록도 경계가 지워진 설국(雪國)

하늘과 땅 사이가 넓은 백지의 대설원이다.

그 백지 시 몇 줄에 평생을 건 나는

언제나 긴급 안건은 그것뿐이라고

나는 내 시 독자다, 혼자 소리친다.

공중에서

놀란 눈발들이 한꺼번에 부서져내린다.

출입금지 팻말을 단 아파트 화단 목책 너머

눈 뒤집어 쓴 키 큰 나무의 적막한 발등에

나는 그만 시 한줄 꾹꾹 눌러 찍고 돌아 나온다.

 

-<단 한 사람의 숨은 독자를 위하여>, 104쪽~105쪽

 

 

 

 자신이 쓰는 글을 가장 먼저 보는 사람은 바로 자신이다. 노향림은 자기 시를 읽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시를 쓰겠다고 한다. 자신이 보고 싶기도 해서 시를 쓰는 거겠다. 이런 말 보니 시인은 앞으로도 시 쓸 듯하다. 나도 뭔가 쓰겠구나. 내가 쓴 걸 자주 보지는 않지만, 가끔 보면 괜찮다. 시 보는 사람 아직 있지 않던가. 시 쓰는 사람만 시를 만나지 않을 텐데. 시는 어디에나 있고 누구나 만난다. 글이 아닌 시도 많다. 그걸 자주 만나면 좋겠지.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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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06-30 1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시를 쓸 줄 모르지만 좋은 시는 참 좋더라고요.
어쩌면 모든 글은 일기일지 몰라요. 이걸 편지라고 해도 무방할 듯합니다.
좋은 수필은 친구에게 쓰는 친근한 글, 이라고 어디서 읽은 것도 같네요.

오늘은 덜 더워서 좋은 날입니다.

희선 2020-07-02 02:33   좋아요 0 | URL
어릴 때 일기를 즐겨 쓰고 나중에 글을 쓰는 사람도 많더군요 그때는 일기를 안 쓰고, 글을 쓰기에 일기를 쓰지 않아도 괜찮은 거겠습니다 아니 페크 님 말씀대로 글이 일기가 됐겠습니다

비가 오고 며칠 시원했는데 다시 더워지겠습니다 다음주 날씨 보니 거의 비던데, 다음주가 잘 지나가기를 바라야겠습니다 벌써부터 이런 생각을 하다니...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