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탐정 정약용
김재희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언젠가 텔레비전 방송에서 정약용이 탐정 같은 걸 했다는 말을 들었다. 정약용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전라도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을 가르쳤다는 것뿐이다. 그리고 그때 책도 많이 썼다. 조선시대에는 왕이 바뀌면 죽거나 귀양살이한 사람이 많았다. 겉으로는 그게 아니고 다른 걸로 트집 잡았을까.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한 건 천주교 때문이었다. 자기 뜻대로 어딘가에 가는 것과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건 다를 거다. 귀양살이를 하면 세상이 원망스러울 것 같은데 조선시대에 귀양살이를 한 사람은 거의 학문을 갈고 닦았다. 할 게 그것밖에 없어서였을지도.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추사체를 만들었다. 김정희는 멀리까지 갈 수 없었다고 한다. 한정된 곳에서만 지내서 무척 답답했겠다. 정약용(1762∼1836)과 김정희(1786∼1856) 나이 차이는 나도 조금 알고 지내지 않았던가. 같이 아는 사람도 있었던 것 같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건 정약용이 전라도 강진으로 귀양살이 가기 훨씬 전이다. 친구로 나오는 이가환하고는 실제로는 스무살 차이가 나는데 소설에서는 일곱 살 차이 난다고 했다. 소설이니 그건 그렇게 문제 되지 않겠지. 이가환은 이번에 처음 알았다. 소설에 나온 것처럼 친구는 아니었다 해도 정약용한테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조선은 유교 사상을 받아들였는데 그것 하나만 있었던 건 아니고 실학이 퍼지기도 했다.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이 실학이다. 그건 그저 공부만 하는 게 아니고 실천하는 거겠지. 이건 지금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배운 걸 실천하는 거. 이런 생각하니 내가 그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어쩐지 잘 못하는 것 같다. 그래도 지금은 조선시대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조선시대였다면 나 같은 사람은 살기 어려웠을 거다. 제대로 하는 것도 없고 여자여서. 지금이라고 모두가 평등한 세상인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조선시대와 같은 신분제도는 없지만 다른 게 생겼다. 많이 가진 사람과 못가진 사람.

 

 천주교에서는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고 한다. 그때 양반이 그런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천했을까. 소설에서 정약용도 그러지 못했다. 신분제도에서 자유롭지 못해서겠지. 그래도 정약용은 백성을 생각했다. 이런 말 하는 건 안 될지 모르겠지만 정약용이 백성을 생각한 건 그런 자리에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많은 사람이 정약용 같았다면 백성은 괜찮았을 텐데. 백성은 하루하루 사는 게 힘들었을 거다. 신분제도가 없는 세상을 바라기도 했겠다. 그런 시대에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따를지도 모르겠다. 오래전에 정말 평등교라는 게 있었을까. 내가 역사를 다 아는 건 아니구나. 굵직굵직한 거 조금하고 사람도 이름이 잘 알려진 사람만 조금 안다. 이건 소설로 받아들이는 게 낫겠다. 역사에 남은 정약용과 이가환이 나온다 해도 말이다. 평등교 교조는 보통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 시간이 많이 흘러도 젊어 보인다니.

 

 평등교 교조 이기명은 세상을 바꾸는 데 정약용 힘을 빌리려 했다. 정약용도 세상 사람이 평등해져야 한다 생각했다. 하지만 힘으로 그걸 이루려 하지는 않았다. 평등교 교조는 어쩐지 힘으로 그걸 이루려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이루려면 누군가 희생해야 한다고도 하는데 정말 그럴까. 자신이 바라고 어떤 일에 뛰어들지 않고 누군가한테 조종당해 희생하는 건 아니다 생각한다. 사람이 같은 생각으로 모여도 서로 다른 걸 생각하기도 한다. 그건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이기명은 그런 건 안 된다고 하는 것 같았다. 이기명은 마음이 약해진 스승도 죽였다. 마음이 약해졌다기보다 스승은 자신이 다른 사람 위에 서고 누군가를 벌해도 괜찮을까 했다. 이 말이 맞는 것 같다.

 

 앞부분에서 이가환이 사이코패스 같은 걸 말했다(소시오패스일까). 혹시 이기명이 사이코패스였을까. 얼굴은 멀쩡하고 머리가 좋지만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이는. 그건 아닌가. 정약용이 암행어사를 한 건 정말이다. 그때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을 정리하기도 했단다. 그것도 백성을 생각하고 한 거겠지. 정약용이 쓴 책은 그때 백성한테 도움이 됐겠지. 지금 사람한테는 어떨까. 백성보다 정치를 하는 사람이 보고 배워야 할 것 같다.

 

 

 

희선

 

 

 

 

 

 

 

                         

                         1974년 장우성(張遇聖)이 그린 정약용(丁若鏞) 표준영정

 

 

 다산 정약용(1762~1836)은 18세기 실학사상을 집대성한 대표 실학자고 개방과 개혁으로 부국강병을 주장한 개혁가입니다. 1762년 지금 남양주에서 태어난 그는 실학자 이익이 쓴 서적으로 실학을 배웠고, 22세에 문과에 장원급제 한 후 규장각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수원화성을 지을 때 거중기를 개발해 공사 기간을 크게 줄였고, 정조의 화성 행차 시 배다리를 설계해 한강을 건너게 했습니다. 이렇게 선진 기술과 새로운 사상에 관심 많았던 그는 정조의 남자라 할 만큼 깊은 신임과 총애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조가 세상을 떠난 1801년(순조 1년), 천주교를 믿었다는 죄로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게 됩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동서고금의 학문을 정리하고 실학을 집대성해 최고의 실학자로 입지를 다집니다. 정전론·여전론의 파격스러운 토지 개혁론이나 마을 단위 공동 노동체 건설을 주장했고, 형법, 기술, 의학, 경제, 정치, 국방, 농업 같은 여러 분야에 걸쳐 500여 권에 달하는 책을 썼습니다. 대표 저서로는 부강한 조선을 만들려는 중앙 정치 제도 개혁안을 담은 <경세유표>, 공정한 사법 제도 개혁 방안을 담은 <흠흠신서>, 그리고 지방 정치 제도 개혁안을 담은 <목민심서>가 있습니다. <목민심서>는 1818년 3월 완성되었습니다.

 

 

 

정약용이 귀양살이를 끝낸 것과 목민심서를 쓴 200주년 기념

(해배解配: 귀양을 풀어 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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