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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문장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504
김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월
평점 :

오랜만에 시집을 만났다. 좀 어려운. 내가 시집 보고 잘 봤다고 한 건 거의 없구나. 김언 시집은 처음이다. 이름을 안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올해 2018년에 안 것 같다). 김언에서 언은 한자로 어떻게 쓸까. 혹시 말씀 언言은 아닐까.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그냥 생각났다. 이름 때문에 시를 이렇게 쓸까 하는 생각도 조금 든다. 김언 시를 보면 ‘말’이라는 말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시는 말이 적다고 하지만 정말 그럴까. 말놀이라고도 하는구나. 김언 시는 오은하고는 조금 다르게 하는 말놀이처럼 보인다. 한마디 말을 하고 여러 말을 한다고 그걸 말놀이라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김언 시는 작게 끊임없이 중얼거리는 말 같기도 하다. 어떤 주문.
지금 말하라. 나중에 말하면 달라진다. 예전에 말하던 것도 달라진다. 지금 말하라. 지금 무엇을 말하는지. 어떻게 말하고 왜 말하는지. 이유도 경위도 없는 지금을 말하라. 지금은 기준이다. 지금이 변하고 있다. 변하기 전에 말하라. 변하면서 말하고 변한 다음에도 말하라. 지금을 말하라. 지금이 아니면 지금이라도 말하라. 지나가기 전에 말하라. 한순간이라도 말하라. 지금은 변한다. 지금이 절대다. 그것을 말하라. 지금이 되어버린 지금이. 지금이 될 수 없는 지금을 말하라. 지금이 그 순간이다. 지금은 이 순간이다. 그것을 말하라. 지금 말하라.
-<지금>, 9쪽
앞에 옮겨 쓴 시는 가장 처음 나오는 시다. 다른 시보다 짧아서. 보면 알겠지만 이 시에는 지금이라는 말이 참 많이도 나온다. ‘지금 말하라’인가. 김언은 시에서 같은 말을 되풀이 할 때가 많다. 제목으로 쓴 말. 모든 시를 잘 본 것도 아닌데 이런 말을 하다니. 아니 몇달 전에 내가 처음 본 김언 시 <괴로운 자>에도 괴롭다는 말이 많이 나왔다. 시를 다 봐도 무슨 말인지 다 알아듣기 어렵지만 거기게 빠져들게 한다. 그건 귀 기울이는 걸까.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들으려고. 아니면 좀더 잘 좀 말해, 하는 마음일지도.
어떤 슬픔도 없는 중이다. 슬픔이 많아서 없는 중이다. 없는 중에도 슬퍼하는 중이다. 슬퍼하는 중을 외면하는 중이다. 다 어디로 가는 중인가. 다 어디서 오는 중인가. 아무도 가로막지 않는 중이다. 아무도 가로막을 수 없는 중이고 오고 있다. 슬픈 중에도 슬픈 중과 함께 더 슬픈 중이 돌아가고 있다. 돌려주고 싶은 중이다. 되돌리고 싶은 중이고 중은 간다. 슬픈 중에도 고개 한번 끄덕이고 고개 한 번 돌려보고 가는 중이다. 오지 말라는 중이다. 가지 말라고도 못 한 중이다. 너는 가는 중이다. 없는 중이다.
-<중>, 16쪽
시를 보다보면 헷갈린다. 무언가를 한참 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 ‘중’으로 이런 시를 쓰다니. 해설에서 김언 시는 물음과 답을 말한다고도 했는데, 이 시도 그런 면이 보인다. 슬픔이 없기를 바라지만 네가 가고 없어서 슬픈 중은 아닐까. 그게 아닐지도. 자신없구나. ‘~하는 중’인데 절에 있는 중(스님)일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이건 진짜 아니겠구나. 여러 가지로 생각하면 어떤가 싶기도 하다. 시는 읽는 사람이 상상해도 괜찮다.
그 생각을 하려니까 혀끝이 간질간질하다. 그 생각을 들으려니까 귓속이 근질근질하다. 그 생각을 만지려니까 내 손이 먼저 떨고 있다. 그 생각이 무언가? 그 생각이 무엇이기에 벌벌 떨고 있는 내 발이 움직이지 않는 걸까? 땅바닥에 붙은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발바닥을 떼려고 하니까 그 생각이 먼저 와서 녹는다. 언제 얼음이라도 얼었냐는 것처럼 녹고 있는 물을 얼마나 더 녹여야 그 생각이 바뀔까? 만질 수 없는 물을 더 만질 수 없는 물로 옮겨 가는 생각을 얼마나 더 만져야 손이 멈출까? 방금 전까지 벌벌 떨고 있던 손을 다른 손이 붙잡고 거두어 간다. 둘 다 떨고 있기는 마찬가지인 손을 끝까지 다독이려는 그 말도 혀끝에서 몰래 떨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내 귀는 그 말을 삼키려고 아직도 열려 있고 떨고 있다. 어떤 말이 와서 쾅 하고 닫힐 때까지.
-<그 생각>, 19쪽
그 생각은 무엇일까 싶다. 그 생각은 앞과 뒤가 다른 것 같기도 하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드는데. 하나가 아닌 여러 가지를 말하는 그 생각. 다른 시에서는 이것, 그것, 저것이라 한다. 김언 시를 보면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지만 중요한 말은 하지 않는다. 그 생각도 그렇고 이것, 그것, 저것도 그렇다. <그것 없이도>(48~50쪽)에서 그것도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가지다. 그런 생각만 들고 그것이 뭔지 잘 모르겠다. 시를 더 오래 들여다보고 생각하면 머릿속 안개가 걷히 듯 김언이 말하는 이것, 그것, 저것을 알 수 있을까. 아니다, 그런 건 똑똑히 안 봐도 괜찮다. 똑똑히 보면 안 좋을 것 같다. 시는 그런 면이 있는 게 좋다.
지금까지 시를 많이 만난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만난 것 가운데서 김언 시는 개성이 커 보인다. 이런 시를 쓰는 시인도 있구나 싶다. 읽다보면 빠져드는 시, 주술 같기도 하다.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