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교회로 비난하면서도 자신이 예수님의 명령에 반해 행동할 때는 예수님이 자기편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다른 무엇보다 결혼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그런 면이 분명하게 드러나곤 한다. 그것은 결혼이 어떠해야 한다는 우리의 이상적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 힘들어지거나 무너질 때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 줄 영혼의 짝을 만나서 영원히 꿈같은낭만을 누리는 것을 결혼으로 보는 문화 속에서는 끝없이 그런 사람을 찾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혼을 줄여 줄 사회적유대가 없으면, 더 큰 난관에 처하게 된다. 수십억 인구 중에서 누가 ‘내 영혼의 짝인지 찾아내야 하고 그 파트너가 절대로 나를 떠나거나 고통을 주지 않아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어떤사람들은 누가 되었든 간에 일단 결혼을 하면 성공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을 십자가를 공유하는 것, 함께 고통을 감당하는것, 새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으로 본다면,그림은 극적으로 달라진다.

결혼 예비 상담을 하는 커플이 반드시 혼전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냐고 물으면, 나는 무슨 이유로 결혼 전부터 이혼 협상을 하려고 하는지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된다. 만일 신랑이 신부를 신뢰하지못해서 돈을 맡길 수 없거나, 그 반대로 신부도 그렇다면, 어떻게서로의 삶, 자녀, 미래를 신뢰하고 맡기겠는가? 관건은 이 사람이냐, 다른 사람이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패턴 안에서결혼하느냐, 아니면 자아의 혼란 안에서 결혼하느냐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이 결론이다.

하지만 그런 영속성의 이면에는 서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지속적인 몸부림이 있다. 그것은 단지 사랑의 느낌이 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보여 주신 이타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사랑이다(요 3:16), 어떤 사람들은 사라이 느낌이 아닌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 말이 전적으로 맞지는 않지만, 그 말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 말은 우리가 항상 사랑에빠져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그저냉철한 이성적 선택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아가서 안에 넘쳐흐르는 감정을 보라. 덜 어려운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가려면 어려운 때를함께 헤쳐 나가야 한다. 그러고 싶지 않을 때도 함께 있기를 선택하면, 나중에는 함께 있고 싶게 된다. 사실, 항상 사랑을 느끼려는 욕구를 포기할 때만 일시적인 감정을 넘어 더 오래 지속되는 사랑을느낄 수 있다. 그러려면 십자가 안에서만 알 수 있는 헌신과 충성,자기희생이 있어야 한다.

교육이든, 직업이든, 영적 활력이든,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자신의 삶에 결여되었던 것을 자녀가 성취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자녀는 세상이 정의하는 ‘성공‘일 필요가 없다. 자녀는 부모의 결핍(실제 결핍이든 인식 속의 결핍이든)이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부모는 자녀를우상화하여, 자녀의 삶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어떤 부 모는 자녀를 버린다. 어떤 부모는 자녀를 동년배 그룹이나 주변 문 화, 또는 자녀의 입맛에 따라 방임한다. 그런 것은 십자가의 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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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기때문에 아내를 아름답게 보는 것이지, 아내가 아름답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아내가 남편과 성관계를 갖고자 하는 것은 그가 남편이기 때문이지, 남자와 성관계를 갖기 원해서 그를 남편으로 두는 것이 아니다. 서로에게 충실해지려는 자유 속에서는 쾌락이 깨어난다.

 그러나 내가 아는 가장 안정적인 결혼들은 자기실현 면에서전형적으로 행복하게 보이는 결혼이 아니다. 오히려 깊은 고통을통해 부부가 자기희생과 서로 돌보는 모범을 보이는 결혼이다. 그리스도와 교회처럼, 그들의 한 몸 연합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공통의 목표와 공통의 사명 의식을 통해이뤄진다. 이처럼 건강한 결혼에서는 한 배우자가 다른 배우자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제공해 달라고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한다. 그러면 내 삶을 보다 행복해 보이는 다른 결혼과 비교하거나, 더 이상적이고 젊은 삶과 비교하는 위험에 빠지지 않게 된다.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때문이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대로, 젊어서 얻은 아내(혹은 남편)를 사랑하고, 그 안에서 즐거워할 자유를 준다(잠 5:18), 모든 커플들은비록 견고한 그리스도인 커플이라 할지라도,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행복하기 때문에, 또는 성적으로 매우 만족하고 있기 때문에부정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마귀는 사람을 쓰러뜨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부족한 배우자를 통해서가아니라 부족한 자신을 통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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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극적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했던 뮈르달은 상공부 장관을 맡으면서 이 이론을 현실에 접목했다. 빈곤의 확대 재생산을 막기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공공성을확대한 것이다. 뮈르달의 충고를 받아들인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은 지금도 전체 일자리에서 공공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30%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이 수치가 5.6%에불과하다. 북유럽은 고사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군(15%)에도 한참 못미친다. 이래서야 정부가 빈곤의 확대 재생산을 막을 힘을 갖지 못한다.
수십 년에 이르는 호남 차별의 역사는 빈곤과 차별을 시장에 맡기면 결코 보정되지않는다는 뮈르달의 이론을 입증했다. 차별과 빈곤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정부가공공정책을 통해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뮈르달의 조언이 우리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굶주림과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연구한 세의 결로 이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바로 민주주의의 확립이다.
독재 국가에서는 독재자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독재자는 누구의 눈치도볼 필요가 없다. 권력이 견제를 받지 않으니 독재자는 국민들의 삶을 걱정하지 않는다. 권력자는 원래 다음 선거에서 내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어야 굶주리국민들을 돌보는 법이다.
이 때문에 여당과 야당이 적절히 힘을 나누고 경쟁하는 나라에서는 국민들이 굶어죽는 극단적인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다. 센은 "민주주의 국가는 단 한 번의 기근도 겪은 적이 없다"라는 말로 자신의 견해를 요약했다.
예를 들어보자. 1983~1985년 아프리카 대륙에 가뭄이 덮쳐 에티오피아에 대기근이 발생했다. 아사자 숫자가 무려 100만 명에 이르는 참사였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가뭄이라는 게 유독 에티오피아만 휩쓸고 갔을 리가 없는 거다. 가뭄이 국경 따라서 멈추는 게 아니지 않나? 그렇다면 왜 유독 에티오피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까? 당시 가뭄이 휩쓸고 갔던 보츠와나는에 아사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센이 이야기하는 민주주의의 차이다.

그래서 센은 ‘빈곤지수라는 것을 개발해 실제 가난한 국민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빈곤지수는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소득을 올리는 이들의비중이 전체 국민에서 어느 정도를 차지하는지를 계산한 수치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건 낮건, 빈곤지수가 높으면 그 사회에서는 최악의 가난을 검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 된다. 아무리 겉으로 잘 사는 듯 보여도 이 수치가 높으면뭔가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함께 사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법이다.
센은 "악마는 항상 꼴찌부터 잡아먹는다"는 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잔인함을 이야기했다.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먼저 극단의 고통에 처하는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을 최소한 인간답게 살도록 해 주는 것, 어떤 경제 위기가 닥쳐도 적어도 그들이 굶어죽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아마르티아센이 바라보는 ‘진정한 경제학의 임무였다.

계급적 당파성의 본질을 꿰뚫은 한문장

철학에서는 계급적 당파성‘이라는 용어를 종종 사용한다. 계급사회에 살고 있는 한우리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편을 들 수박에 없다는 의미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계급사회에서 중립이라는 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힘이 센 헤비급 격투기 선수와 힘이 약한 자그마한 민간인이 싸운다. 그런데 그것을지켜보면서 "나는 누구 편도 들지 않는 중립이다" 라고 외치는 건 결국 힘이 센 자가 힘이 약한 자를 마음껏 패도록 격려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히 어느계급의 편을 들어야 한다. 이게 철학에서 말하는 계급적 당파성의 본질이다.

자유, 민중이 스스로 결정할 권리

근대 시민사회를 연 자유의 철학적 개념은 나 스스로 나의 삶을 결정한다‘는 데 있다. 그게 왕이건, 혹은 신이건 그 누구라도 나의 자유의지를 폭압적으로 제한해서는안된다.
기본소득 제도의 든든한 옹호자로 불리는 벨기에의 경제철학자 필리페 판 파레이스는 자신의 기본소득 철학 뿌리를 인간의 자유로부터 찾았다. 판파레이스가 규정한자유가 어떤 것인지 그의 말을 들어보자.
"만일 내가 무일푼이라면, 나는 실제로는 유람선 여행에 함께 할 자유가 없다. 내가굶어 죽는 것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거나 혹은 형편없는 직업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면, 나는 실제로는 그 직업을 거부할 자유가 없다."
자유기업원이나 자유한국당 따위는 자유를 단지 시장의 자유, 혹은 부자들이 재산을 축적할 자유 정도로 해석한다. 하지만 자유가 그런 것인가? 부자들의 사유재산을철저히 보호하고 시장의 자유를 완벽하게 보장하면 민중들의 자유의지가 충만해질까? 천만의 말씀이다.

라이시는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과 삶을 꾸려나가는 것, 이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이 왜 점점 더 어려워질까?"
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우리의 삶이 정말로 그렇지 않은가? 생계를 꾸려나간다는 것, 이건 돈을 벌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생계를 꾸리는 것이다. 가족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한가한 휴식을즐기고, 좋아하는 스포츠를 TV로 보면서 소리도 지르고, 그렇게 좀 여유롭게 살고 싶은 욕구가 누구에게나 있다. 문제는 생계와 삶이 어지간해서는 병행이 안 된다는 점이다. 라이시가 깨달은 게 그런 것이다. 미국의 노동부 장관으로 일하려면 가정을 포기해야 한다. 라이시에게도 생계와 삶은 병행이 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신경제가 주는 여러 혜택은 더 필사적인 삶, 불안감, 빈부 격차와 사회적 분화 현상의 심화라는 비용을 우리에게 부담시킨다. 신경제가 대단한 것만큼이나 우리는 삶의 일부를 신경제에게 빼앗기고 있다. 가족과의 삶, 우정, 지역사회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의 일부가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손실은 우리가 얻는 혜택과함께 발생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무소유도 무한한 부(富)도 아닌 그 중간쯤의 가치

부탄처럼 가난한 나라에서 사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하지만 만족을 모르는 탐욕에기대는 것도 행복이 아니다. 그래서 스키델스키는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라는 질문을 "무엇을 가져야 행복한가?" 로 바꿔놓았다.
스키델스키는 그 무엇‘을 다음의 일곱 가지로 정리했다. 건강, 안전, 서로에 대한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가 바로 그것이다. 돈과 탐욕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건강하고 안전하게 사는 사회, 각자의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 서로에게 벗이 돼주는 사회, 그리고 여유로운 여가를 즐기는 사회, 바로 이런 사회가 우리가 지향하는행복한 사회가 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스키델스키는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실천을 제안했다.
첫째, "끊임없이 일하라"고 강요하는 자본주의의 압력에 맞서야 한다. 주당 노동 시간을 제한하고, 법정 휴일을 늘리고, 일자리를 나눠야 한다.
둘째, 행복을 위해 소득을 적절히 분배해야 한다. 그래서 스키델스키는 조건 없이지급되는 기본소득을 지지했다.
셋째,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소비에 저항해야 한다. 상품 광고를 제한하고 소비세를누진세로 개편하자는 것이 스키델스키의 주장이었다.
넷째, 스키델스키는 세계화 속도를 현저하게 느리게 만들어 자본이 국경을 넘나들 며 소비와 탐욕을 부추기는 일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돈과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스털린에 따르면 일정수준까지는 부(富)가 늘어나면 행복감도 함께 증가한다. 그런데 어느 정도 생활수준이 높아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행복의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찢어지게 가난할 때에는 머리 하나 기댈 작은 방 한 칸과 끼니를 거르지 않을 따뜻한 쌀밥 한 공기만 있으면 행복하다. 하지만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육박하면, 방한칸과 쌀밥 한 그릇으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소득이 늘어날수록 행복에 대한 기준점이 높아지기 때문에 부(富)의 크기와 행복이 비례하지 않게 된다.
다른 관점으로 이 현상을 풀이해보자. 경제학에는 한계효용체감 이론이라는 것이있다. "같은 재화를 반복해서 소비할 때 개인이 느끼는 만족도는 점점 떨어진다"는 게이 이론의 요지다.

사람은 가난이라는 극한 상황에 빠지면 "먹고 살아야 돼", "내일은 뭘 먹지?" "우리 가족은 어떻게 살아남지?" 같은 생존문제에만 집중한다. 뇌가 ‘생존을 위협하느리너,
안에 갇히는 것이다. 이러니 뇌가 정상적으로 가동될 수 없다. IQ에서 반드시 필요한수리능력이나 인지능력은 거의 바닥으로 추락한다.
게으름도 마찬가지다. 게을러서 가난한가? 아니면 가난하기에 게으른가? 이거 함부로 쉽게 규정할 주제가 아니다. 세계적인 의학저널 란셋(Lancet)>은 최근 다양한실험을 바탕으로 "현금 지원을 통해 빈곤층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면 더 열심히 노동을 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보도했다. 게을러서 가난한 게 아니라, 그들을 가난의 울타리에 가둬왔기 때문에 게으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에 대해 함부로 떠들어서는 안 된다. 제 멋대로 규정하고 제 멋대로 해법을 찾아서도 안 된다. 이번 장의 주인공 뤼트허르 브레흐만이 "부자인 우리는 가난에 관해서 무엇이 최선인지 아는 척 하는 것을 제발 멈춰야 한다"고 역설하는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틴 루터 킹은 나에게는 악몽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꿈이있습니다‘라고 말했죠. 그에겐 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꿈이 있다고 말합니나의 꿈은 이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미래는 내 직업의 가치가 내 월급의 크기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내가전파하는 행복의 양과 내가상대방에게 주는 의미의 양으로 결정되는 미래입니다.
내가 바라는 미래는 교육의 목적이 쓸모없는 직업을 준비하는 데 낭비되는 게 아니라, 인생을 더 잘살기 위한 것이 되는 미래입니다.
내가 바라는 미래는 풍요롭게 사는 삶이 특권인 세상이 아니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인 세상입니다.
‘빈곤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느냐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연구결과도 있고, 증거도 있고, 방법도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월가 금융자본을 대변하는 IMP조차 신자유주의의 종언을 고하는 판이다. 신자유주의는 최소한 몇 년 안에 막을 내릴 것이고,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포스트 신자유주의 시대의 핵심 문제는 분배가 될것이다. 기본소득은 포스트 신자유주의 시대의 매우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눈부신 기술 발전 시대에 형성될 사회적 부(富)의 총합은 바로 인류의 오랜 노동과지혜의 축적이다. 문제는 그 부의 총합 중 너무 많은 몫을 글로벌 자본주의 동맹이 배앗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분배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알파고가 인류의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라 해도 우리가 풍족하게 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기본소득은 미래에 우리가 지향할 새로운 재분배의 실로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으 비고을 향해 움직인다. 원을 그리며 도는 선물은 가장 오래 빈손이었던 사람을 향해 움직인다. 그러다가 그것을 더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나타나면, 오래된경로를 벗어나 그를 향해움직인다. 우리는 관대함으로 인해 빈손이 되지만, 우리의비손은 다시 부드럽게 전체를 끌어당긴다. 움직이는 선물이 빈손을 채우러 돌아올때까지, 이사회는 진공상태를 싫어한다."
선물의 손길은 이 사회에서 도움의 손길을 가장 필요로 하는 이들을 어루만진다. 이런 선물이 일상화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빈곤으로 인해 죽을 이유가 없다. 선물은 진공상태를 싫어하기 때문에 빈곤에 처한 이들을 향해 또 다른 선물의 손길이 쏟아질 것이다.
주류경제학은 희생과 봉사의 가치를 모른다. 염치를 아는 사람의 보답하는 마음이경제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7000년이 넘는 인류 문명의역사에서 이웃에게 나눠주는 우리의 선물은 경제의 가장 중요한 축을 이뤄 왔다. 희생과 봉사가 유발하는 놀라운 승수효과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해야 할지도 분명해진다. 

경제는 더 고도화되고 사회는 더 복잡해진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40년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남을 짓밟으며 내 이익을 챙기는 모델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확인했다. 노동자가 죽으면 자본가가 살 수 있을까? 농민이 죽으면 도시 시민들이 살수 있을까? 서로를 짓밟고 죽이는 제로섬을 기초로 한 모델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않다. 이건 이미 우리가 역사에서 확인한 바다.
이 장 처음에 "당신은 운명을 믿으십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이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질문이 어쩌면 인류의 미래를 규정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 죽이고죽는 것을 선호하는 제로섬의 인간일까? 아니면 협동과 연대를 꿈꾸는 한 배를 탄 동지일까?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우리는 분명히 후자를 택할 것이다. 왜냐고? 우리는 양귀비씨앗으로 태어났고, 양귀비꽃이 되지 못하면 공멸할 테니 말이다.
2권에 걸친 경제의 속살>에서 꼭 담아내고자 했던 이야기는, 연대와 협동을 통해이기적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운명에 대한 호소였다.
하나 된 세계를 향한 우리의 운명을 믿고 우리가 양귀비 씨앗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서로에게 벗이 되어주는 사회, 동지가 되어주는 사회를 향해 한 걸음씩만 더 나아가보는 거다. 그게 우리 운명이라는데, 망설일 이유가 조금도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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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것 가운데 하나님의 궁극적 목표는 우리를 ‘진짜 남자‘와 ‘진짜 여자‘로 만드시는 데있다기보다 우리를 자아에서 끌어내어 서로를 향해, 십자가를 향해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바울이 아내들에게 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와 남자들에게쓴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심 같이 하라"가핵심적으로 작용한다. 그것은 결혼의 올바른 역학을 위해서 뿐 아니라, 온 교회가 복음의 의미를 확실히 붙잡는 데도 중요하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이끄시는가?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기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다. 남편의 리더십은 아내와 자식들의 이익을 위해 미래지향적인 계획을 가지고 자신의 욕구와 취향을 내려놓는 특별한 책임에 관한 것이다. 머리됨은 자신의 깨끗한 셔츠와 맛있는 식사, 성욕에 대한 필요를 아내가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 어떻게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을지 항상 살피는 것이다. 

결혼을 준비하는 것은 긴 인생 동안 함께 사랑하고 사랑받을사람을 찾는 것이다. 짝을 선택할 때 지혜로운 방법은 신혼여행 때함께 기뻐하는 모습만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호스피스 병동의 침상을 지키는 상대방의 모습을 그려 보는 것이다. 전 생애를 아울러모든 것을 함께할 언약적 관점을 가져야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나이가 들면서 살이 찔 것이고, 흰머리가 생기고 머리카락도 빠질 것이다. 죄를 지을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에 미 이치지 못할 것이다. 결혼에 대한 언약적 관점은 상대방이 계약서대로 잘하고 있는지 점수를 매기는 파트너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이 되어, 서로 헌신적으로 사랑하고 섬기되, 거기서 뭔가 얻는 게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서로 하나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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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폭풍에 놀라지 말아야한다. 우리는 폭풍 때문에 겁에 질리거나 자신을 파괴할 필요가 없다.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은 당신이 부모로부터 어떤 일을겪었는가가 아니다.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은 당신의 언니나 동생이 당신과 말을 섞으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은 배우자가 당신을 떠났거나, 바람을 피웠다거나, 당신을 뇌두고 먼저 죽은 것이 아니다.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은 당신의 자녀가 당신에게 반항하거나 당신보다 먼저 장례식을 치르게 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그런 일들이 당신 삶에 끔찍한 일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당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은 당신이 죽어서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사망과 지옥의 선고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 일은 이미 벌어졌다. 당신은 단순히 살아남은 자가 아니라, 사랑받는 자녀이며 모든 것의 상속자다. 그러나 폭풍 속에서 이리저리 시달릴 때는 그것을 기억하기가 어렵다.

가족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에 힘들다. 우리는 우리 삶을 계획할 수 없다. 직장을 선택하듯이 우리의 부모, 우리의 성, 양육 방식을 선택할 수 없다. 미래의 배우자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 수 없고 자기 자녀라 해도 미리 짜놓은 인생 계획에 맞춰 넣을 수 없다.
가족은 우리를 취약하게 한다. 우리는 상처받을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할 것이다. 가족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자녀가 왕따나 파혼, 암 병동의 골수 이식 수술을 받게되는 일이 없도록 보호하고 싶을 것이다.

가족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어떤 가정의 어떤 일원이 되었건,우리가 사람으로서 활짝 피어나는 데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것은어렵고 힘들다. 십자가의 사람들은 이 일에 놀라거나 기죽지 말아야 한다. 모든 가정은 실패했고 우리는 모두 가족의 일원이자 예의없이 타락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가정이 하나님의 자비와 영광의 장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연약함을 사용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의형상으로 빚으신다. 하나님은 바로처럼 힘을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의 감춰진 역학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신다. 우리가 그렇게 연약하다보니 나쁜 일이 일어날 가능성도 생긴다. 당신의 부모가 당신을 쫓아낼 수도 있고, 당신의 배우자가 다른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당신의 자녀에게 백혈병이 찾아올 수도 있다. 복음은 그런 것을 숨기지 않는다. 복음은 번영과 평온을 약속하지 않는다. 그러나복음은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 안에 있다고 약속한다. 그 십자가의 섭리는 당신을 멸하려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장래를 주려는 것이다. 그래서 해골 골짜기인 골고다에서도 당신의 뼈는 안전하다.

사실 모든 가족은 어느 정도는 깨어져 있다. 당신이 아무리 심각하게 문제가 있는 가정의 출신이라 해도 하나님은 놀라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당신을 사랑하시고, 선한 목자로서 당신을 찾아오셨다. 당신은 그저 세포나 DNA의 조합이 아니다. 당신은 당신의기억들과 경험들, 이야기들의 총 합이다. 당신이 누구인가의 핵심적인 부분은 당신이 거쳐온 환경들이다. 당신이 뭔가 잘못되었다.
는 것을 안다면, 그것 자체가 은혜다. 복음이 당신에게 이르렀다는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배경을 충분히 아시고 다른 사람들에게와마찬가지로 새 정체성과 새 유산을 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니엘 선지자가 말했듯이 하나님은 "어두운 데에 있는 것을 아시며 또빛이 그와 함께 있다"(단 2:22).

요셉과 달리 우리는 왜 하나님이 우리로 과거의 끔찍한 일들을 겪게 하셨는지 정확하고 직접적인 계시를 받지 못했다. 그러나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그분이 당신과 함께하셨다는 것을 보았을 수 있다. 당신의 상처가 오늘의 당신을 만들었거나 후에 다른사람들을 돕는 데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을 것이다. .

바로 이것이 십자가가 가족에게 하는 일이다. 가족은 영적 전쟁의 주 무대이다. 어둠의 세력은 우리 자신, 그리고 자신의 연장선상에 있는 가족을 우상화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가족에 대해 만든 이미지다. 우리는 안정을 갈구한다. 우리 삶이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되고, 우리의 가족이나 다른 일들이 마땅히 그래야 하는 대로 되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가 가족을 선물로 받아들이고, 삶의 성패를 가늠하는 유일한 척도로 삼지 않는다면, 가족을있는 그대로 사랑할 자유가 생기고, 자신의 연장선상에 두거나 우상화하지 않게 된다. 우리는 자신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이미지를 가족에게 강요할 필요도 없고 그들이 허울 좋은 자신의 이상에 미달될 때도 그들을 비난할 필요가 없어진다. 발달장애를 가진아들 때문에 지적인 아버지가 힘들어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시고 이끄시는가?그리스도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기를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다. 남편의 리더십은 아내와 자식들의 이익을 위해 미래지향적인계획을 가지고 자신의 욕구와 취향을 내려놓는 특별한 책임에 관 한 것이다. 머리됨은 자신의 깨끗한 셔츠와 맛있는 식사, 성욕에 대한 필요를 아내가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위해 어떻게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을지 항상 살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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