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교회로 비난하면서도 자신이 예수님의 명령에 반해 행동할 때는 예수님이 자기편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인다. 다른 무엇보다 결혼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그런 면이 분명하게 드러나곤 한다. 그것은 결혼이 어떠해야 한다는 우리의 이상적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 힘들어지거나 무너질 때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나의 모든 필요를 채워 줄 영혼의 짝을 만나서 영원히 꿈같은낭만을 누리는 것을 결혼으로 보는 문화 속에서는 끝없이 그런 사람을 찾지만, 끝내 발견하지 못한다. 게다가 이혼을 줄여 줄 사회적유대가 없으면, 더 큰 난관에 처하게 된다. 수십억 인구 중에서 누가 ‘내 영혼의 짝인지 찾아내야 하고 그 파트너가 절대로 나를 떠나거나 고통을 주지 않아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어떤사람들은 누가 되었든 간에 일단 결혼을 하면 성공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을 십자가를 공유하는 것, 함께 고통을 감당하는것, 새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 길을 함께 걸어가는 것으로 본다면,그림은 극적으로 달라진다.

결혼 예비 상담을 하는 커플이 반드시 혼전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냐고 물으면, 나는 무슨 이유로 결혼 전부터 이혼 협상을 하려고 하는지 더 자세히 살펴보게 된다. 만일 신랑이 신부를 신뢰하지못해서 돈을 맡길 수 없거나, 그 반대로 신부도 그렇다면, 어떻게서로의 삶, 자녀, 미래를 신뢰하고 맡기겠는가? 관건은 이 사람이냐, 다른 사람이냐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패턴 안에서결혼하느냐, 아니면 자아의 혼란 안에서 결혼하느냐 선택하는 것이다. 그것이 결론이다.

하지만 그런 영속성의 이면에는 서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지속적인 몸부림이 있다. 그것은 단지 사랑의 느낌이 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보여 주신 이타적이고 자기희생적인 사랑이다(요 3:16), 어떤 사람들은 사라이 느낌이 아닌 선택이라고 말한다. 그 말이 전적으로 맞지는 않지만, 그 말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한다. 그 말은 우리가 항상 사랑에빠져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그저냉철한 이성적 선택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아가서 안에 넘쳐흐르는 감정을 보라. 덜 어려운 미래를 함께 만들어 가려면 어려운 때를함께 헤쳐 나가야 한다. 그러고 싶지 않을 때도 함께 있기를 선택하면, 나중에는 함께 있고 싶게 된다. 사실, 항상 사랑을 느끼려는 욕구를 포기할 때만 일시적인 감정을 넘어 더 오래 지속되는 사랑을느낄 수 있다. 그러려면 십자가 안에서만 알 수 있는 헌신과 충성,자기희생이 있어야 한다.

교육이든, 직업이든, 영적 활력이든,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자신의 삶에 결여되었던 것을 자녀가 성취해 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자녀는 세상이 정의하는 ‘성공‘일 필요가 없다. 자녀는 부모의 결핍(실제 결핍이든 인식 속의 결핍이든)이나 부족한 부분을 채워 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부모는 자녀를우상화하여, 자녀의 삶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려 한다. 어떤 부 모는 자녀를 버린다. 어떤 부모는 자녀를 동년배 그룹이나 주변 문 화, 또는 자녀의 입맛에 따라 방임한다. 그런 것은 십자가의 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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