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으로 현실 정치에 참여했던 뮈르달은 상공부 장관을 맡으면서 이 이론을 현실에 접목했다. 빈곤의 확대 재생산을 막기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해 공공성을확대한 것이다. 뮈르달의 충고를 받아들인 스웨덴 등 북유럽 국가들은 지금도 전체 일자리에서 공공부문이 차지하는 비중이 30%에 이른다. 우리나라는 이 수치가 5.6%에불과하다. 북유럽은 고사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군(15%)에도 한참 못미친다. 이래서야 정부가 빈곤의 확대 재생산을 막을 힘을 갖지 못한다. 수십 년에 이르는 호남 차별의 역사는 빈곤과 차별을 시장에 맡기면 결코 보정되지않는다는 뮈르달의 이론을 입증했다. 차별과 빈곤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정부가공공정책을 통해 모두에게 평등한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뮈르달의 조언이 우리사회에 많은 시사점을 던져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굶주림과 빈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연구한 세의 결로 이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 번째는 바로 민주주의의 확립이다. 독재 국가에서는 독재자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독재자는 누구의 눈치도볼 필요가 없다. 권력이 견제를 받지 않으니 독재자는 국민들의 삶을 걱정하지 않는다. 권력자는 원래 다음 선거에서 내가 떨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있어야 굶주리국민들을 돌보는 법이다. 이 때문에 여당과 야당이 적절히 힘을 나누고 경쟁하는 나라에서는 국민들이 굶어죽는 극단적인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다. 센은 "민주주의 국가는 단 한 번의 기근도 겪은 적이 없다"라는 말로 자신의 견해를 요약했다. 예를 들어보자. 1983~1985년 아프리카 대륙에 가뭄이 덮쳐 에티오피아에 대기근이 발생했다. 아사자 숫자가 무려 100만 명에 이르는 참사였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가뭄이라는 게 유독 에티오피아만 휩쓸고 갔을 리가 없는 거다. 가뭄이 국경 따라서 멈추는 게 아니지 않나? 그렇다면 왜 유독 에티오피아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을까? 당시 가뭄이 휩쓸고 갔던 보츠와나는에 아사자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센이 이야기하는 민주주의의 차이다.
그래서 센은 ‘빈곤지수라는 것을 개발해 실제 가난한 국민들이 얼마나 힘들게 사는지를 확인하고자 했다. 빈곤지수는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소득을 올리는 이들의비중이 전체 국민에서 어느 정도를 차지하는지를 계산한 수치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건 낮건, 빈곤지수가 높으면 그 사회에서는 최악의 가난을 검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 된다. 아무리 겉으로 잘 사는 듯 보여도 이 수치가 높으면뭔가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그래야 함께 사는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법이다. 센은 "악마는 항상 꼴찌부터 잡아먹는다"는 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잔인함을 이야기했다.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가장 먼저 극단의 고통에 처하는 이들은 가난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을 최소한 인간답게 살도록 해 주는 것, 어떤 경제 위기가 닥쳐도 적어도 그들이 굶어죽는 일은 막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아마르티아센이 바라보는 ‘진정한 경제학의 임무였다.
계급적 당파성의 본질을 꿰뚫은 한문장
철학에서는 계급적 당파성‘이라는 용어를 종종 사용한다. 계급사회에 살고 있는 한우리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편을 들 수박에 없다는 의미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계급사회에서 중립이라는 건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힘이 센 헤비급 격투기 선수와 힘이 약한 자그마한 민간인이 싸운다. 그런데 그것을지켜보면서 "나는 누구 편도 들지 않는 중립이다" 라고 외치는 건 결국 힘이 센 자가 힘이 약한 자를 마음껏 패도록 격려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분명히 어느계급의 편을 들어야 한다. 이게 철학에서 말하는 계급적 당파성의 본질이다.
자유, 민중이 스스로 결정할 권리
근대 시민사회를 연 자유의 철학적 개념은 나 스스로 나의 삶을 결정한다‘는 데 있다. 그게 왕이건, 혹은 신이건 그 누구라도 나의 자유의지를 폭압적으로 제한해서는안된다. 기본소득 제도의 든든한 옹호자로 불리는 벨기에의 경제철학자 필리페 판 파레이스는 자신의 기본소득 철학 뿌리를 인간의 자유로부터 찾았다. 판파레이스가 규정한자유가 어떤 것인지 그의 말을 들어보자. "만일 내가 무일푼이라면, 나는 실제로는 유람선 여행에 함께 할 자유가 없다. 내가굶어 죽는 것 이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거나 혹은 형편없는 직업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면, 나는 실제로는 그 직업을 거부할 자유가 없다." 자유기업원이나 자유한국당 따위는 자유를 단지 시장의 자유, 혹은 부자들이 재산을 축적할 자유 정도로 해석한다. 하지만 자유가 그런 것인가? 부자들의 사유재산을철저히 보호하고 시장의 자유를 완벽하게 보장하면 민중들의 자유의지가 충만해질까? 천만의 말씀이다.
라이시는 이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생계를 꾸려나가는 것과 삶을 꾸려나가는 것, 이 두 가지를 병행하는 것이 왜 점점 더 어려워질까?" 라는 질문이 그것이다. 우리의 삶이 정말로 그렇지 않은가? 생계를 꾸려나간다는 것, 이건 돈을 벌어야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생계를 꾸리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생계를 꾸리는 것이다. 가족과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한가한 휴식을즐기고, 좋아하는 스포츠를 TV로 보면서 소리도 지르고, 그렇게 좀 여유롭게 살고 싶은 욕구가 누구에게나 있다. 문제는 생계와 삶이 어지간해서는 병행이 안 된다는 점이다. 라이시가 깨달은 게 그런 것이다. 미국의 노동부 장관으로 일하려면 가정을 포기해야 한다. 라이시에게도 생계와 삶은 병행이 되지 않았다.
간단히 말해서 신경제가 주는 여러 혜택은 더 필사적인 삶, 불안감, 빈부 격차와 사회적 분화 현상의 심화라는 비용을 우리에게 부담시킨다. 신경제가 대단한 것만큼이나 우리는 삶의 일부를 신경제에게 빼앗기고 있다. 가족과의 삶, 우정, 지역사회그리고 우리 자신의 삶의 일부가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손실은 우리가 얻는 혜택과함께 발생하고 있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무소유도 무한한 부(富)도 아닌 그 중간쯤의 가치
부탄처럼 가난한 나라에서 사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하지만 만족을 모르는 탐욕에기대는 것도 행복이 아니다. 그래서 스키델스키는 "얼마나 있어야 충분한가?"라는 질문을 "무엇을 가져야 행복한가?" 로 바꿔놓았다. 스키델스키는 그 무엇‘을 다음의 일곱 가지로 정리했다. 건강, 안전, 서로에 대한존중, 개성, 자연과의 조화, 우정, 여가가 바로 그것이다. 돈과 탐욕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건강하고 안전하게 사는 사회, 각자의 개성이 존중되는 사회, 서로에게 벗이 돼주는 사회, 그리고 여유로운 여가를 즐기는 사회, 바로 이런 사회가 우리가 지향하는행복한 사회가 돼야 한다는 이야기다. 스키델스키는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실천을 제안했다. 첫째, "끊임없이 일하라"고 강요하는 자본주의의 압력에 맞서야 한다. 주당 노동 시간을 제한하고, 법정 휴일을 늘리고, 일자리를 나눠야 한다. 둘째, 행복을 위해 소득을 적절히 분배해야 한다. 그래서 스키델스키는 조건 없이지급되는 기본소득을 지지했다. 셋째, 자본주의가 조장하는 소비에 저항해야 한다. 상품 광고를 제한하고 소비세를누진세로 개편하자는 것이 스키델스키의 주장이었다. 넷째, 스키델스키는 세계화 속도를 현저하게 느리게 만들어 자본이 국경을 넘나들 며 소비와 탐욕을 부추기는 일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돈과 행복은 비례하지 않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이스털린에 따르면 일정수준까지는 부(富)가 늘어나면 행복감도 함께 증가한다. 그런데 어느 정도 생활수준이 높아지면 상황이 달라진다. 행복의 기준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찢어지게 가난할 때에는 머리 하나 기댈 작은 방 한 칸과 끼니를 거르지 않을 따뜻한 쌀밥 한 공기만 있으면 행복하다. 하지만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육박하면, 방한칸과 쌀밥 한 그릇으로는 결코 행복할 수 없다. 소득이 늘어날수록 행복에 대한 기준점이 높아지기 때문에 부(富)의 크기와 행복이 비례하지 않게 된다. 다른 관점으로 이 현상을 풀이해보자. 경제학에는 한계효용체감 이론이라는 것이있다. "같은 재화를 반복해서 소비할 때 개인이 느끼는 만족도는 점점 떨어진다"는 게이 이론의 요지다.
사람은 가난이라는 극한 상황에 빠지면 "먹고 살아야 돼", "내일은 뭘 먹지?" "우리 가족은 어떻게 살아남지?" 같은 생존문제에만 집중한다. 뇌가 ‘생존을 위협하느리너, 안에 갇히는 것이다. 이러니 뇌가 정상적으로 가동될 수 없다. IQ에서 반드시 필요한수리능력이나 인지능력은 거의 바닥으로 추락한다. 게으름도 마찬가지다. 게을러서 가난한가? 아니면 가난하기에 게으른가? 이거 함부로 쉽게 규정할 주제가 아니다. 세계적인 의학저널 란셋(Lancet)>은 최근 다양한실험을 바탕으로 "현금 지원을 통해 빈곤층을 빈곤에서 벗어나게 하면 더 열심히 노동을 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보도했다. 게을러서 가난한 게 아니라, 그들을 가난의 울타리에 가둬왔기 때문에 게으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난에 대해 함부로 떠들어서는 안 된다. 제 멋대로 규정하고 제 멋대로 해법을 찾아서도 안 된다. 이번 장의 주인공 뤼트허르 브레흐만이 "부자인 우리는 가난에 관해서 무엇이 최선인지 아는 척 하는 것을 제발 멈춰야 한다"고 역설하는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틴 루터 킹은 나에게는 악몽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에게는 꿈이있습니다‘라고 말했죠. 그에겐 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도 꿈이 있다고 말합니나의 꿈은 이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미래는 내 직업의 가치가 내 월급의 크기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고, 내가전파하는 행복의 양과 내가상대방에게 주는 의미의 양으로 결정되는 미래입니다. 내가 바라는 미래는 교육의 목적이 쓸모없는 직업을 준비하는 데 낭비되는 게 아니라, 인생을 더 잘살기 위한 것이 되는 미래입니다. 내가 바라는 미래는 풍요롭게 사는 삶이 특권인 세상이 아니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인 세상입니다. ‘빈곤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느냐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해답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연구결과도 있고, 증거도 있고, 방법도 있습니다. 단지 우리가하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월가 금융자본을 대변하는 IMP조차 신자유주의의 종언을 고하는 판이다. 신자유주의는 최소한 몇 년 안에 막을 내릴 것이고, 우리는 신자유주의 시대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대를 맞이할 것이다. 그리고 포스트 신자유주의 시대의 핵심 문제는 분배가 될것이다. 기본소득은 포스트 신자유주의 시대의 매우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눈부신 기술 발전 시대에 형성될 사회적 부(富)의 총합은 바로 인류의 오랜 노동과지혜의 축적이다. 문제는 그 부의 총합 중 너무 많은 몫을 글로벌 자본주의 동맹이 배앗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분배의 문제만 해결된다면 알파고가 인류의 노동을 대체하는 시대라 해도 우리가 풍족하게 살지 못할 이유가 없다. 기본소득은 미래에 우리가 지향할 새로운 재분배의 실로 유용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으 비고을 향해 움직인다. 원을 그리며 도는 선물은 가장 오래 빈손이었던 사람을 향해 움직인다. 그러다가 그것을 더 필요로 하는 누군가가 나타나면, 오래된경로를 벗어나 그를 향해움직인다. 우리는 관대함으로 인해 빈손이 되지만, 우리의비손은 다시 부드럽게 전체를 끌어당긴다. 움직이는 선물이 빈손을 채우러 돌아올때까지, 이사회는 진공상태를 싫어한다." 선물의 손길은 이 사회에서 도움의 손길을 가장 필요로 하는 이들을 어루만진다. 이런 선물이 일상화되면 우리 중 그 누구도 빈곤으로 인해 죽을 이유가 없다. 선물은 진공상태를 싫어하기 때문에 빈곤에 처한 이들을 향해 또 다른 선물의 손길이 쏟아질 것이다. 주류경제학은 희생과 봉사의 가치를 모른다. 염치를 아는 사람의 보답하는 마음이경제학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7000년이 넘는 인류 문명의역사에서 이웃에게 나눠주는 우리의 선물은 경제의 가장 중요한 축을 이뤄 왔다. 희생과 봉사가 유발하는 놀라운 승수효과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해야 할지도 분명해진다.
경제는 더 고도화되고 사회는 더 복잡해진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40년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남을 짓밟으며 내 이익을 챙기는 모델이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을확인했다. 노동자가 죽으면 자본가가 살 수 있을까? 농민이 죽으면 도시 시민들이 살수 있을까? 서로를 짓밟고 죽이는 제로섬을 기초로 한 모델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않다. 이건 이미 우리가 역사에서 확인한 바다. 이 장 처음에 "당신은 운명을 믿으십니까?" 라는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이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질문이 어쩌면 인류의 미래를 규정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 죽이고죽는 것을 선호하는 제로섬의 인간일까? 아니면 협동과 연대를 꿈꾸는 한 배를 탄 동지일까? 둘 중 하나를 고르라면 우리는 분명히 후자를 택할 것이다. 왜냐고? 우리는 양귀비씨앗으로 태어났고, 양귀비꽃이 되지 못하면 공멸할 테니 말이다. 2권에 걸친 경제의 속살>에서 꼭 담아내고자 했던 이야기는, 연대와 협동을 통해이기적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운명에 대한 호소였다. 하나 된 세계를 향한 우리의 운명을 믿고 우리가 양귀비 씨앗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서로에게 벗이 되어주는 사회, 동지가 되어주는 사회를 향해 한 걸음씩만 더 나아가보는 거다. 그게 우리 운명이라는데, 망설일 이유가 조금도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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