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가 왜 계속 살아남아 성장하는지의 문제에는 두 가지 확실한 답변이 있다. 하나의 설명은 많은 사람이 보기에 세속 이성에는 삶을 잘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뭔가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설명은 허다한 사람이 자연 세계 너머의 초월 세계를 직관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이 두 개념을 차례로 살펴보고자 한다. - P23
그렇다고 과학과 이성에서 인간 사회의 막대하고 독특한 선이 비롯되었음을 부인하는 건 결코 아니다. 요지는 과학만으로는 인간 사회의 길잡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18 "원숭이 재판" 으로 불린 스콥스의 재판 때작성됐으나 끝내 시행되지 못했던 변론에 그것이 잘 요약되어 있다. "과학은 위대한 물리력이지만 도덕의 스승은 아니다. 기계를 완성할 수 있지만 기계를 오용하는 것에서 사회를 보호하고자 도덕적 제약을 가하지는 못한다.과학은 형제애를 가르치지 않는다(가르칠 수도 없다.과학적세속 이성은 요긴한 선(善)이지만 그것만을 인생의 기초로 삼으면 다음 사실이 곧 드러난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데도 과학에 결여되어 있는 것들이너무도 많다는 사실이다. - P26
이 충만한 삶의 상태를 저마다의 신념 체계로 어떻게 해석할것인가? 신자는 신자가 아니든 풀어야 할 과제는 바로 그것이다. 이생이전부라면, 존재하지 않고 존재한 적도 없는 무엇을 우리가 이토록 깊이동경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세속주의의 세계상너머를 가리켜 보이는 체험이 왜 이렇게 많은가? 그런 지각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말이다. 이생이 전부라면, 폐쇄적인 세속적 관점으로는 채울 수 없는이런 갈망을 어찌할 것인가? - P39
세속적 인본주의의 가치는 유물론적 우주에서 추론되거나 연역될수 없다. 그렇다면 그런 가치는 어디서 왔을까? 그런 가치에 "계보"와 역사가 있다는 게 답이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국제법의 초석은 인간의 신성함에있다.즉 우리 이웃은 하나님에 의해 또는 그분이 지으신 사람을통해 신성하게 지음받았다. 이런 의미에서 인류가 쓰는 범죄의 개념은 기독교적 개념에서 왔다. 내가 보기에 기독교 유산, 아브라함의 유산, 성경의 유산이 없이는 법이라는 것도 없다. - P66
만인의 가치와 평등에 대한 신념, 약자를 사랑하는 일을 중시하는신념은 인격신의 우주를 믿는 사회에서야 비로소 출현했다. 그 신은 모든 사람을 자신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도록 지으셨다. 현대 세속주의는성경적 신앙의 도덕적 이상을 대부분 고수하면서도 인격적 우주관은 배격한다. 그런 이상이 인격적 우주에서만 말이 되고, 그 우주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결과인데도 말이다. - P71
니체의 요지는 이것이다. 당신이 만일 신을 믿지 않는다면서 만인의 권리를 믿고 모든 약자와 빈민을 돌봐야 한다고 믿는다면, 스스로 인정하든 그렇지 않는 당신은 여전히 기독교 신념을 고수하는 것이다. 예컨대 삶의 한 부분이고 인간의 본성에 뿌리박고 있는 사랑과 폭력 중하나는 선하다고 취하고, 하나는 악하다고 버려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 P72
왜 그랬을까? 변화를 주도한 의사는 이렇게 결론지었다. "내가 보기에 사망률 변화는 인간의 근본 욕구인 삶의 이유 때문이다. 결국 가완디는 "왜 의식주를 해결하며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공허하고 삶이무의미해 보이는지"를 묻는다. "삶이 가치 있게 느껴지려면 무엇이 더 필요한가? 답은 우리 모두가 자아 너머의 어떤 대의를 찾는다는 것이다." - P87
그러나 나는 아니거나‘라고 부정으로도 답했다. 세속적인 사람들은이른바 "내재하는 의미와 "부여하는 의미의 중대한 차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신을 믿는 전통적 믿음은 그중 전자인 발견하는 의미의 기초였다. 이는 당신의 내적 감정이나 해석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객관적 의미다. 하나님이 우리를 특정한 목적을 위해 지으셨다면 우리가 받아들여야만 할 내재적 의미가 존재한다. 세속적인 사람에게 있는 의미란 발견하는 의미가 아니라 지어내는의미다. 이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주관적이며 전적으로 우리 느낌에 의존한다. 정치를 변화시키거나 행복한 가정을 일구기 위해 살겠다는 결심은 당연히 활력적인 의미로 작용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지어내는 의미가 발견하는 의미보다 훨씬 깨지기 쉽고 내실이 없다고 주장하고 싶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발견하는 의미는 지어내는 의미보다 더 이성적이고 더 공동체적이며 더 영속적이다. - P96
다른 무엇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자신을 해친다. 어떻게 그럴까? 자녀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자녀에게서 의미와 안전을얻어야 한다. 당신의 과도한 요구대로 자녀는 행복하게 성공해서 당신을사랑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런 자녀일수록 뛰쳐나가 버리거나 당신 기대에 짓눌려 망가진다. 부모의 행복의 궁극적인 출처가 자신인데, 이 역할에 부합할 수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배우자나 연인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해도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 일과 직장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일을 건강과 가정과 공동체보다도 더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몸과 관계가 파탄 나고, 앞서 봤듯이 종종 사회적 불의마저 초래한다. 다른 무엇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사랑의 대상을 해치고 자신을해치고 주변 세상을 해친다. 결국 깊은 불평불만에 빠진다. - P131
모든 사람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
개인의 절대적 자율이라 할 수 있는 현대 개념의 자유는, 통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불공정하다. 타인에게 진 부채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보면 이런 주장이 넘쳐난다. "나만 책임질 수 있으면 된다. 아무도 내게 어떻게 살라고 말할 권리가 없다. 마치 명백히 당연한 진리인 양이런 선언에는 늘 권위가 실려 있다. 하지만 그 말이 진리가 되려면 당신을 위해 희생한 사람이 아무도 없어야 하고, 지금도 완전히 자기 힘으로만 살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타인이 필요하다면타인을 연대 책임지는 일도 감당해야 한다. 어느 한 개인의 주인은 결코자신만이 아니다. - P149
정체성은 스스로 부여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고립된 상태에서 모종의 내적 독백으로만 정체를 발견하거나 지어낼 수는 없다. 오히려 정체성은 어느 공동체의 도덕적 가치 및 신념과의 대화를 통해 도출된다. 우리는 타인 안에서 타인을 통해 자신을 발견한다. "스스로는 자아의 참모습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일과 사랑과 학습을 통해 타인과 대면하고 협력할 때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있다. - P183
그러나 현대식 접근처럼 자신의 의미를 스스로 부여하면, 개인의 이일이 모든 사회관계보다 중요하다. 만족스러운 관계도 내 마음에 드는 동안만 유지된다. "여기서 주장하는 관점에 따르면, 관계는 개인의 만족을위해 일해야만 한다. 서로의 자아실현이 먼저고 관계는 부수적이다. 그렇게 본다면 평생 지속되어야 할 무조건적 관계는 별 의미가 없다. 인간 공동체는 "끼리끼리의 생활방식" 이나 "사회관계망"으로 성기어져, 비슷한 사람끼리만 일시적으로 유연하게 소통한다. 음악, 음식, 부의수준(고급 주택단지 같은) 등 비슷한 취향을 중심으로 관계가 형성될 뿐, 그들의 사생활과 공생활은 다른 누구도 관여할 바가 아니다. 이미 충분히 입증됐듯이, 현대의 개인주의적 자아라는 조건하에서는 사회관계와 제도는 힘을 점점 잃어 가고, 결혼과 가정은 약화되고, 사회는 파벌로 분열되어 싸우고, 경제적 불평등은 심화된다. - P189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그분의 설계와 소명을 붙잡고 그안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선량한 시민이 공동체를 향한 의무를 수행할때 행복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녀가 썼듯이 많은 사람은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의 발상을 전혀 모르며, 때로 그런 발상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거나 아니면 잃어버려서 아무도 되찾을 수 없다는 의심을 조장한다. 그들은 남들이 말하는 성공을 성공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행복과심지어 자신의 정체성까지도 그때그때의 사회에 맞춰 취해야 한다. 그렇다 보니 다가오는 운명 앞에서 그들이 떠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 P191
다른 많은 유수한 세계관보다 기독교에 문화 제국주의가 덜한 이유는 무엇인가? 결정적 이유는 기독교인이 은혜로만 구원받는다는 데 있다. 이 구원은 도덕법을 지켜야 시작되거나 유지되는 게 아니다. 그래서많은 종교와 달리 신약성경에는 레위기 같은 책이 없다. 행동에 대한 일련의 세세한 율법이 없다. 그런 규정은 추종자를 현지 문화로부터 떼어놓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랑을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는 기독교인은 정체성의 다른 요소도 완전히 버릴 필요가 없음을알게 된다. 인종과 민족 정체성, 일과 직업, 가정과 정치와 공동체 관계가 다 그대로 남아 있어도 된다. 그게 더는 우리 중요성과 안전의 궁극적 기초는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해지거나 버려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그것까지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로 자유로이 누린다. 다만 그게 구주인 양더는 거기에 속박되지 않을 뿐이다. - P214
세속 개념이 진보하려면 한결같은 무제한 경제 성장으로 갈망이 무한히 팽창하고 안락의 전반적 수준이 꾸준히 높아져야 한다." 세속 사회의 이상이 실현되려면 그런 물질적 번영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야 사람마다 자기 기준의 선(善)에 따라 날로 더 자유롭게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경제 성장은 계속 이어질 수 없다. - P223
인권 개념의 가장 탄탄한 기초는 성경에 있다. 당신 앞에 선 이웃은고유의 가치와 불가침의 존엄성을 지닌 존재다(창 9:6 참조), 마틴 루터 킹주니어가 미국 백인에게 흑인의 자유를 보장하도록 촉구한 것은 백인의합리적 사익을 추구하라는 뜻이 아니었다. 그들 각자가 정의한 대로 삶의만족을 얻으라는 뜻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성경의 아모스서 5장 24절을 인용해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 할" 때까지만족해서는 안 된다고 촉구했다.롤스의 세속적 접근은 킹 박사가 제시한 정의의 기독교적 기초 앞에서 무색해진다. - P284
경이로운 우주를 보라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는 방법 중 하나는 존재 자체로부터 그분의존재를 추론하는 것이다. 무에서 유가 나올 수는 없다. 모든 것은 이미 존재하는 무엇으로부터 와야 한다. 그렇다면 원인 없이 존재하는 어떤 독특한 존재가 있어야만 한다는 뜻이다. 그 존재는 무에서 나오지 않았고, 자기 자신의 원인이자 다른 모든 것의 근원이다. 존체 자체이신 이 존재가바로 하나님이다. 요컨대 모든 자연에는 원인이 있으므로 원인 없이 존재하는 초자연적 존재가 있어야만 한다. 만유는 그 존재에서 비롯됐다. - P308
창조 설계를 직관으로 느끼다.
하나님을 증명하는 또 다른 논증은 세상의 명백한 미세조정 및 설계와 관계된다. 최근에 많은 기독교 사상가가 물리학의 여러 상수를 지적했다. 빛의 속도, 일정한 중력, 강하고 약한 핵력의 세기 등 이 모든 수치가거의 정확히 현재와 같아야만 유기적 생명체가 존재할 수 있다. 여러 개의눈금판을 전부 일정하게 맞춰야만 하는 셈인데, 그 모두가 지금처럼 일제히 생명을 허용하도록 조정될 확률은 약 100이다. 가능한 조정 상태는 무한대인데 그중 지구상에 생명이 출현할 수 있는 상태는 하나뿐이다. 예화로 거기에 담긴 의미를 도출해 볼 수 있다. 총살대 앞에 선 사형수가 있다고 하자. 열 명의 정예 사격수가 불과 3미터 거리에서 사형수에게 총을 쏜다. 그런데 전부 빗나간다. 우연일 수 있을까? 그렇다. 그날 아침 열 명 다 술 취한 상태이거나 하필 재채기나 기침이 나와 총알마다 과녁을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뭔가 음모가 있어 누군가가 고의로 그렇게설계했다는 게 더 합리적인 결론이다. - P310
세상에는 ‘객관적인 도덕적 의무가 존재한다.
하나님을 증명하는 셋째 전통적 논리는 이른바 도덕 논증이다. 일각에서는 이를 가장 강력한 논증으로 본다." 9장에서 이런 추론 방식을충분히 논의했으므로 여기서는 요약만 하고 넘어가려 한다.대부분의 사람은 도덕적 감정만아니라 도덕적 의무도 존재한다고믿는다. 도덕적 감정이라는 실재를 설명하는 데는 굳이 신이 필요 없다.그러나 인간에게는 어떤 행동은 감정과 무관하게 나쁘다는 믿음도 있다.남에게 "설령 개인적으로 옳게 느껴지더라도 당신은 이런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할 의무가 있다"라고 말한다. 이런 의무의 기초는 도대체 무엇일까?신이 없다면 도덕적 의무는 진화생물학이나 문화에서 기인한 환영처럼 보인다. 하지만 웬만한 사람은 모든 도덕 가치를 환영으로 치부하지도 않을뿐더러 어떤 행동은 절대적으로 악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도덕적 의무는 신 없는 비인격적 우주보다 인격신이 창조한 우주에서 더 말이 된다. 우리는 그 신에게 책임을 받았음을 직관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 P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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