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1.

죽기 살기로 며칠 매달렸더니 애니팡 순위 1위를 달성하였다.

내심 흐뭇해하고 있는데 며칠 지나니 지난 주 순위가 종료되고 새로 잘 해보란다.

새로 낸 점수가 단박 마음에 찰 리 없다.

그래,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아이템을 쓰려면 일단 점수를 올리기 위해 마구 달려보는 거지.

자고로 기계를 상대로 덤볐다가 나가떨어지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이 쯤 되면 길거리를 걷다가 들리는 새소리도 애니팡의 효과음으로 들린다.

 

2 .

스마트폰을 손에 쥔 이후로 아이들이 책을 읽는 시간이 현저히 줄었고 모든 정보와 대부분의 소통을 손가락으로 해결하고 있다

“너희들이 카카오스토리에서 맺은 친구3-400명이 너의 진짜 친구라고 생각하지 마라”

“너희가 공부하려고 할 때 그 모든 친구들이 안녕? 하고 한꺼번에 인사를 건네 온다면 너무 끔찍하지 않겠니”

나는 잔소리하느라 입이 아프고 아이들은 인상쓰느라 미간이 아프다.

물론 스마트폰의 허와 실을 이해하기엔 아이들이 너무 어리고 미숙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PC, 휴대전화, 아이팟, 또는 그 이외의 다른 경이로운 물건들이 사회화하면서도 분리시키고, 접속하게 하면서도 고립시키며, 연결하게 하면서도 연결을 끊게 하는 기술들(87p)은 편리함이라는 대표기능으로 모든 감각을 서서히 마비시키고 있다.

 

그러나, ‘홀로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끊임없이 접속 가능한 상태에 있게 만드는’ 스마트폰을 현재 나도 사용하고 있고 그다지 관심이 없어도 최신폰에 대한 정보를 계속 듣고 있고 있다.

딱히 유행 타는 옷을 사고 싶지 않으나 백화점이나 상점에 진열된 옷을 보고 있자면 누군가가 옷에 새겨 넣은 유행의 코드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미디어보드라는 상업시설에나 가능한 광고매체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까지 밀고 들어와 현관문을 벗어나면 결혼정보회사, 각종 건강식품과 TV프로 광고로 남녀노소의 시야를 장악한다.

사는 게 뭔가 내 뜻대로 되지 않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도 어쩔 수 없이 밀려가는 듯한 이 삶은 도대체 뭐지?

 

이 책은 한 잡지에 저자가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라는 부제로 44편의 글을 엮은 것이다. ‘유동한다’는 의미는 가령 내가 살고 있는 이 동네에서 10년을 살고 있어도 같은 동네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건물이 움직인다는 뜻은 아닌, 변하고 싶지 않아도 할 수 없이 떠밀려 움직여야하는 액체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 바 발을 딛고 있는 판이 움직이는 세계를 살고 있다는 것.

 

미래를 예측하는 유일한 방법은 미래의 사건들이 우리가 바라는 것에 일치하게끔 하는 것이고, 또한 미래를 바람직하지 않은 시나리오와는 확실하게 다른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해 함께 힘을 모아서 노력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 안토니오 그람시 (236p)

 

이제 지그문트 바우만의 문제제기가 시작된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은 미래에 대한 예측을 불가능하게 했고, 미래에 대한 불안은 온갖 공포를 불러오더니만 결국 ‘계속 접촉을 유지하며 손을 놓지 말자’는 예방의학의 범주를 만들어냈고,

거대한 제약회사와 결탁한 세력들은 ‘질병 권하는 사회’를 만들어냈다.

대중의 공포심을 이용하여 ‘신종플루’같은 거품은 언제든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 저항하며 지켜가야 할 프라이버시가 트위터나 페이스북이라는 공적인 영역에 자발적으로 퍼날라지고 있음을 고발한다.

 

프라이버시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유일하고, 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주권이 유지되는 지대이자 주권을 지닌 사람들의 왕국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영역이다.

사람들은 그 영역에서 ‘내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갖게 되며, 그 영역에서부터 자기 자시들의 결정을 충분히 승인하고 존중하며 조직적인 운동을 뜻대로 전개하고 새롭게 펼쳐나갈 수 있다. - 74p

 

그는 가상적인 온라인의 관계들이 현실적인 대인관계를 대체하고 능가하게 되는 일,

그래서 공동체가 네트워크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고, 공들이고 상처받는 실제의 대인관계의 어려움보다는 선택과 조작이 가능한 온라인관계를 선호함으로 실제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일이 줄어들게 되는 일을 염려한다.

그래서 이 시대는 데카르트의 존재증명을 이렇게 변화시켰다한다.

나는 보여진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무언가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던 사람들’은 점차 사라지고 이제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큰 힘을 들이지 않는다. 대출회사는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돈을 빌려주면서 마치 부모님이 자식에게 빌려주듯 착각하게 한다.

‘언제 갚을래?’ 꼭꼭 다짐받지도, 빨리 내놓으라고 독촉하지도 않는다.

한 때, ‘레버리지효과’라는, '빚도 자산이다'라는 금융계의 유혹은 얼마나 당당하게 빚지도록 격려했던가.편안한 노후를 보내려면 수억이 필요하다는, 보험회사에서 만들어 냈을법한 기사가 진실과 거짓사이에서 줄타기하고 있다.

 

소비지상주의는 사람들에게 모든 문제를 소비로써 해결하라고 은밀하게 부추기고 있고

이 소비세계를 강력하게 추진시키기 위해서 아동들마저 상업화하고 있다.

자신들을 치장한 물건들로써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기호로 삼으며 자신의 몸을 감고 있는 물건들이야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준다 생각하도록 최면을 걸고 있다.

그렇다면 살아가는 것이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일의 연속인 이런 유동의 시대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저자는 카뮈의 작품을 들어 <시지프스>와 <프로메테우스>를 설명한다.

자신의 비참한 고통에 사로잡혀 헤어나오지 못하는 시지프스와  타인들의 고통에 맞서 반항하는 삶을 사는 프로메테우스.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들의 불행으로부터 우리 스스로 거리를 두는 동안에는 결코 행복추구라는 목적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없다는 저자의 충고가 마음을 찌른다.

나도 같은 이유로 타인이 겪었던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이야말로 인간들로 하여금 서로 연대하게 만드는 힘이 아닐까.

아름다움에도 닿아있고 비참하고 굴욕적인 일에도 닿아있는 이 부조리한 인생에서 말이다.

 

만약 병적인 자기의식을 물리치고 프로메테우스가 방문하게끔 마음을 터놓는다면,

시지프스도 지금까지 그처럼 노예 같은 상황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는 실천가의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행복과 부조리는 지구라는 똑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두 아들이다.

그들을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다.” - 388p

 

그는 책의 마지막 소제목에서 어떻게 살아야할 지에 대한 해답을 드러내고 있다.

데카르트의 존재증명이 변형되어야한다면 나는 보여진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닌,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인간의 자유란 '단지 더 나아질 수 있는 하나의 기회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그렇기에

'그처럼 자유롭지 못한 어떤 세계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단지 당신이 실존한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반항의 행위가 되도록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 366p

 

 

이가 혼자 생각할 시간이 없어졌다는 것은 내게 큰 위기이다.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해도 그것에 대한 반성이나 회심 없이 자신의 기분을 그저 온라인상에

‘꿀꿀하다’ ‘짜증난다’라는 말로 배설하고 또 그것을 위로한답시고

‘힘내' ‘우울같은 건 날려버려’라는 친구들의 손놀림을 진짜 우정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염려스럽다.

이러다가 먼 훗날 부모란 대화도 유대관계도 필요없는 그저 자식들의 '소비의 집행자'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아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엄마에게 말했던 것처럼.

"세대차이야!"

 

4.

삶의 작은 낙이었던 애니팡, 캔디팡에서 탈퇴했다.

사실 별 것도 아닌 일인데 탈퇴라는 버튼을 누르기까지는 몇 번을 망설였다.

이제 더 이상 하트가 날아오는 소리로 일상이 끊기지 않으며 오후에 배터리를 충전해야하는 번거로움도 없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후, 슬그머니 다른 게임앱을 기웃거린다.

다운받고 시작을 하려는데 약관에 동의하라는 메시지가 뜬다.

내용을 살펴보니 내 전화에 저장되어있는 연락처를 모두 수집한다는 내용이다.

사람으로 대우받는다기보다는 정보로써 식별당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정신이 버쩍 든다.

조용히 앱을 삭제한다.

 

5.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한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우리 아이는 만나지도 않는 친구들 소식을 쫘~악 꿰고 있어.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그랬더니 카톡이나 카스를 보면 된다네?“

“맞아, 연락하지 않고도 한 눈에 다 볼 수 있어.”

“언니, 그거 참 안 좋다. 나는 그거 계속 안 쓸래.”

그래,

너의 결정을 응원한다.

비록 유동하는 시대에 곧 순응하게 되어 다음에 만날 때 네 손에 스마트폰이 쥐어져있을지라도.

날개 꺾인 새처럼 힘없고 미미한 푸덕거림일지라도.

그래야 유동하는 세계에서 저 거대한 실타래의 끊어진 한 올로 살며

이 미친 속도에 침 한 번이라도 뱉을 수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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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연한 인생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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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떡이 진 머리에 무릎이 늘어난 츄리닝을 입고 동화책을 읽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 열악한 외적상태에도 불구하고 손에 쥔 동화책에서 왕자님이 튀어나와 청혼해 준다면

얼마나 멋있을까하는 뻔뻔한 상상을 했었다.

그 왕자가 어느 나라 왕자인지 국적도 필요 없고 키가 180cm가 넘는지 어쩐지 재볼 필요도 없고 시어머니가 까탈스러운 지, 재산은 많은 지 알아 볼 필요가 없었다.

그냥 이웃나라의 왕자라면 매혹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이 소설은 한결같이 '그 후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식으로 결말을 맺는 동화적 결말의 팩트에서 시작한다.

매혹에 이끌려 선택한 결혼이 아름다운 이야깃거리에서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고 할까. 이데올로기로 대립하는 서사가 끊이지 않는 그 지긋지긋한 일상 말이다.

 

이안 - <위기의 작가들>이라는 독립영화로 순수함에 상처를 입히는 추악한 욕망을 가진 

           작가들을 폭로하고 싶어한다. 요셉을 그런 작가로 생각하고 있다.

요셉 - 소설가. 자신의 고뇌와 문학적 소양을 작업의 자양분으로 노련하게 사용할 줄 안다.           현재 아내와 별거중.

- 부모로부터 어쩔 수 없이 물려받은 ‘삶의 양면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

       현재 B문화재단팀장

도경 - 돈은 많고 사랑은 끊겨버린 유부녀, 자기 돈 들여가며 요셉을 만나고 있다.

이채 - 야망은 있으나 현실에서의 노력은 포기한 젊은 여자,

특유의 붙임성과 허영으로 현재 요셉의 욕망의 대상이다.

 

소설의 첫등장인물은 류의 엄마이다.

어느 봄 날, 대학생이었던 류의 엄마는 문득 애인에게 전화를 건다.

'오늘 저녁 시간이 있나요' 묻자 직장인이었던 애인은 '오늘은 바쁘다'고 대답한다.

상심되어 눈썹이 실룩거리려할 때 수화기 저편에서 “사랑해‘라는 말이 날아온다.

그 때 류의 엄마 얼굴에 퍼지는 사랑의 달큰하고도 온화한 열기가 공중전화박스를 뛰어넘어

지나가던 류의 아버지 눈에 들어온다.

류의 아버지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는 여인에게 매혹되어 앞뒤 가리지 않고 그녀를 쫓아다닌 결과 결혼에 성공한다.

 

엄마는 단정적이며 사실적인 세상의 이치를 알았고 아빠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이었다.

엄마는 ‘류’의 이름을 짓게 된 동기가 비행기에서 지은 이름이라 ‘흐름’이라는 단순한 뜻이라 했고, 아빠는 오페라 투란도트에 사랑을 위해 죽음도 마다않는 어느 노예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유학시절, 가깝게 지내는 이웃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날,

엄마는 아빠의 애인으로부터 무례한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그러나 엄마는 덤덤하게 여행길에 오른다.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매며 조의를 표하듯 가슴을 지그시 누르던 엄마의 그 동작을 류는 오래도록 기억한다.

남편의 부정을 알게 된 이후에도 그녀는 더 이상의 진실 따위는 요구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갈등과 반목도 없이 화해와 용서도 없이.

 

소모적 감정이나 공허한 명분 때문에 고통을 참아내면서 인생을 낭비할 만큼 어머니는 어리석지도 무능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어머니가 믿지 않게 된 것은 아버지뿐 아니라 아버지를 포함한 타자로서의 모든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어디로 이사를 가득 어차피 같은 세계 안이고 천국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 69p

 

태연히 주어진 현실을 17년이나 받아들여왔던 엄마는 어느 날,

사랑과 가정과 일상, 그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바로 이혼을 결심했고, 공부를 더 해서 대학교수가 되었으며 옛 애인과 재혼한다.

하지만 귀국한 아빠는 자살로 맥없이 생을 마감해버린다.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류는 요셉을 만났다.

노부부의 힘겨운 걸음걸이 뒤로 삶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듯한 굴뚝의 검은 연기가 말할 수 없이 서러워 울음을 터뜨릴 때, 바로 그 때 나타난 요셉을 보고 류는 직감한다.

엄마와 아빠의 두 본성이 내재해 있는 이 남자에게 이끌리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사랑을 기승전결의 패턴에 넣는다고 생각해봐, 그런 사랑에는 매혹이 없어. 패턴을 깨야지. 패턴에 따르기만 하면 인생은 편하겠지. 복제품이니까.

하지만 인간은 그것으로는 만족하게 못하게 돼있어.

자기인생이 의미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전쟁까지 벌이는 게 인간이거든.

그런 개인의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서 예술이 존재하는 거지.

예술이 하는 일은 한마디로 패턴을 깨는 것이야. 배신하는 것. -107p

 

둘은 어느 낯설고 습한 도시로 도피한다.

끝까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기를 원했으나 매혹의 실체를 알고 있던 류는 갑자기 사라진다.

류의 증발은 요셉에게 있어 피가 멈추지 않는 상처와도 같았다.

 

류는 순진한 연인은 아니었다. 요셉의 궁극적 욕망이 자신의 내부를 향한 것이며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소설이라는 개인적 영역을 위해 소진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류는 자신이 매료된 것이 태연함 속에 깃든 파탄의 맛이라는 것을,

열렬한 삶 속에 깃든 차고 날카로운 죽음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었다. - 263p

 

이안의 프로젝트에 가장 높은 점수를 준 것은 B문화재단의 팀장, 류였다.

이안은 평소 자신이 가진 힘과 감성을 이용해 부도덕한 욕망을 즐기는 요셉을 증오해왔다.

그는 요셉의 이중성과 이기심을 폭로하고 곤경에 빠뜨리고 싶어한다.

요셉은 이안의 영화가 자신에게 함정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류를 보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 생각하고 출연을 결심한다.

 

사실 남녀관계에서는 빨리 자버려야 쓸데없는 잡념에서 벗어나 진지한 사랑에 몰두할 수 있지. 수험생들도 잡념을 떨치려면 야동을 많이 봐줘야 해. 자기에게 오는 일을 피하려고만 하면 안돼.(..)

그래, 누구나 자신의 나쁜 운명을 알게 되면 피하려고 하지. 그런데 예정된 운명이 실현되는 것은 바로 그 도망침을 통해서야. 나는 도망치지 않음으로써 위기를 보여주겠다는 거야. - 183p

 

요셉의 주위에는 항상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가 뱉어내는 삶의 고뇌와 적절하고도 멋진 인용문, 문학적 감성은 여자들을 끌어들였고,

요셉 또한 다가오는 여자들을 애써 막지 않았다.

그러나, 매혹은 태생적으로 몹시 허약한 아이와 같아서 시름시름 앓다가 이내 세상을 떠나버리게 마련.

그 어느 누구와도 끝났다거나 지속된다고 볼 수 없는 요셉의 여자관계는 공허하기만 하다.

 

그간 류를 본 적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몇 년 전, 요셉은 소설을 쓰기 위해 한적한 콘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지독하게 눈이 내리던 밤, 콘도에 찾아온 여자와 콘도의 커피숍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류는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찾아온 여자를 콘도에 데려다놓고 미친 듯이 눈보라를 헤치고 커피숍에 다시 돌아왔었다.

그러나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지나가 버린 사랑은 문을 열어도 그 사랑을 볼 수 없고 단지 그 문을 열면 거기에는 원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 너머가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기때문이다. 그래서 원하지 않는 것을 보지 않기 위해 요셉은 문 열기를 포기했었다.

 

도대체 류는 왜 사라졌던 것일까.

 

매혹이 사라진 이후의 사랑은 어머니처럼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의 틀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류는 자기기만의 부역보다는 상실을 택했다. 고통보다는 고독을 택한 것이다. - 263p

가 사랑을 대하는 자세는 아마도 내 아이들에게 인식할 수 없는 코드로 심겨지게 되리라. 물론 남편의 방법 또한 은연 중에 습득하게 될 것이며 아이들은 저항하면서 때로는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수용하기도 할 것이다. 후일 아이들이 한 여자에 매료되고 나아가 사랑한다고 믿게 되면 자신들이 만들어 낸 고유한 사랑의 매뉴얼대로 사랑하게 될텐데 그 속엔 내가 나의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내 남편이 그의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사랑의 방식들이 박혀있을 것이다.

보석이 되었든, 가시가 되었든.

 

매혹이 한시적이고 열정은 사그러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 무렵,

이별도 경험하게 되고 그로써 그보다 가벼워지기로 혹은 더 진지해지기로 마음도 먹게 될 것이다. 실상 한 사람이 사랑하는 방법이란 그의 결심이라기보다는 부모님의 부모님들로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화석에너지를 휴지 뽑듯 뽑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삶은 이렇게 지독히도 많아진 사랑의 방법을 이해할 길이 없어 눈물의 서사로 얼룩지는 것이 아닐까.

 

해피앤딩으로 끝났던 동화를 계속 행복의 상태로 남겨두고 싶다면 이건 태연하게 인정해야겠다.

 

사랑하는 자는 없고 사랑만 있다.

가슴은 아프지만.

 

p.s 류는 본문에 인용된 트란스트뢰메르의 시 <소곡>에 인용되었듯이 좀처럼 가지 않는 어두운 숲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숲은 움직이게 되리라는 다음 구절을 미루어본다면 매혹이 지나고 난 이후의 사랑을 기대하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요셉은 실패했지만 그 누군가는 그녀에게 밝은 숲, 움직이는 숲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덕분에 트란스트뢰메르의 시집 <기억이 나를 본다>를 빌려 잘 굴러가지도 않는 발음으로 영시까지 읊어보는 호사를 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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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 나는 천재다! - 어느 천재의 일기 다빈치 art
살바도르 달리 지음, 최지영 옮김 / 다빈치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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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에 문외한인 내가 초현실주의 화가 달리에게 관심을 가질 확률이란 장동건이 내게 안부전화를 하는 것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왜 어떤 계기로 이 일어날 것 같지 않은 확률의 당첨자가 되고 말았을까? 그것은 바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 사랑을 하지요. 프랑스인도 하지요. 이란인도 하지요. 굴들도 하지요.

심지어 게으른 해파리도 하지요." ' Let's fall in love' 를 부르는 콜 포터.

말도 안 되게 유치한 그 노래의 가사가 낭만적으로 들리는 것도 '파리' 라는 도시의 힘이다.

예술가들뿐 아니라 민간인의 가슴속에서도 춤추듯 역동적으로 다가오는 이 도시는 도대체

무엇을 품었기에 이런 동경을 불러들이나.

 

“브라제리립에서 점심 먹기로 했잖아, 아는 교수가 거기서 저녁을 먹었는데 제임스 조이스를 보았대."

“(황당하다는 듯이) 기일~ 그게 다야?”

그 카페에 가보아야하기 때문에 다른 약속을 잡을 수 없다는 소설가지망생 길의 대답에

어처구니 없어하는 약혼녀와 친구들.

파리를 유흥과 관광으로만 대하는 약혼자 이네즈는 파리에 대한 길의 열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2010년에서 1920년대의 골든 에이지로 건너가게 된 길 펜더는 피카소의 여인 아드리아나를 사랑하게 되고 아드리아나 또한 그의 순박함에 끌리게 되는데, 그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순간 냉담해진다. 집에 바래다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한 채 카페를 나서는 아드리아나를 바라보는 허망한 길(오웬 윌슨).

그의 얼굴 위로 이상한 조각이 달린 지팡이가 스윽 나타난다.

강한 엑센트와 함께 합석을 권하는 달리는 영화 피아니스트에서 슬픈 운명을 묵묵히 통과해나가던

스필만 役의 애드리언 브로디가 아닌가. 장난기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나타나 도대체 저 사람이 연기하는 인물이 누구인거지, 하며 강하게 끌리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 달리의 역할을 맡았다면, 피아니스트라는 영화를 추천해 준 친구가 없었다면,

비디오를 빌려다놓고 혹 아이들이 아파서 영화를 보지도 못한 채 반납해야했다면,

달리와 영영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으니 무엇과의 인연이란 한 순간의 우연한 교차가 아닌 누적된 교차점들의 새로운 교차라는 생각이 든다.

 

살바도르 펠리뻬 하신또 달리 도메네끄.

살바도르는 ‘구원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이다. 1901년에 죽은 그의 형의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이름 때문에 언제나 형의 죽음을 그림자처럼 달고 다녀야했기에 불안정한 정서를 갖게 되었지만 어찌 보면 현실과 환상이라는 두 개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결정적 이유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책은 1952년부터 1963년까지 드문드문 적은 일기이다.

그는 신문을 읽을 때 거꾸로 읽는 버릇이 있었고 아침식사 후 귀 뒤에 자스민꽃을 하나 꽂고

변기에 앉아 우아하게 볼일을 보았으며 거대한 영감이 떠오를 때는 침을 흘려 입술이 갈라져

텄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은 잠이 안 올 때 수면제를 먹지만 그는 깨어나지 못할 것처럼 완벽한 잠을 예감할 때 수면제를 먹는다. 그러면 다음 날 매우 감동적인 생각이 물밀 듯 밀려온다나.

위대한 감성이 목구멍을 뚫고 튀어나올 때 그는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키키리키스”

그의 엽기적 행각, 아니 천재적 창조성이 번뜩이는 행각은 책에 그득하다.

 

그가 날아다니는 파리를 보는 시각은 정말 남달랐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파리는 발렌시아가제製 의상으로 치장한, 올리브잎이나 약간 썩어가는 성게주변을 탐하는 고결한 파리. 그가 파리를 불러들이기 위해 정어리가 담겨있던 접시에 고인 기름을 머리에 부으면 파리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는데 파리들이 웽웽거리는 소리야말로 그의 정신의 속력을 높여준다는 것이다.

 

이제 그의 유니크한 콧수염에 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에서 보여지는 1920년대의 달리는 정상적인(?) 콧수염을 가지고 있지만 그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3일 만에 완전히 독파하고 그의 사상을 넘어설 수 있다고 확신했으나 그의 콧수염만큼은 넘어설 수 판단.

그를 능가함과 동시에 그의 비극적인 분위기를 넘어서기 위해 ‘날렵하고 초합리주의적인 그래서 그는 하늘로 치솟은 형상의 수염‘을 갖게 된다. 1952년 즈음에는 사진사 필립 할스먼과 함께 <달리의 콧수염>을 기획했다. 1956년 움베르토 폐하가 그를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후, 폐하가 그의 수염 끝에 자스민 꽃 두 송이를 꽂아주는 꿈을 꾼다. 바로 표지에 쓰인 사진이다.

 

특이한 것은 아내 갈라와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신고를 한 것이 그의 연보에 올라와있다.

결혼하면 혼인신고 하는 것이 당연한데 뭐 이런 것까지?

사연인즉 갈라는 당대 프랑스 최고 시인이었던 폴 엘뤼아르의 아내였다. 엘뤼아르 부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했을 때 달리는 첫눈에 그녀를 자신의 뮤즈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달리만 그리 여겼으면 그냥 흠모하는 것으로 끝나버렸을 텐데 갈라 또한 달리에게 매료되어 달리와 동거를 시작한다. 연보에 보면 28-29년에 그녀를 보았다고 하니 당시 달리는 25살 청년, 갈라는 36살의 원숙미를 뽐내고 있는 세뇨라(어디서 많이 들은 ㅋㅋ)였겠다. 둘이 함께 한 이후로 그녀는 달리에게 용기와 영감을 주었고 또 최고의 모델이 되어주기도 한다. 그녀의 초상화 한 장 감상한다.

 

(좀 줄여서 올렸다. 원래는 한 쪽 가슴을 드러내고 있다.)

 

달리는 베르메르를 최고의 화가로 쳤다.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작품 <레이스 뜨는 소녀>를 빼꼼 열린 아버지의 서재의 벽에서 보았고 그 강렬함은 그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했고 루브르박물관으로부터 어렵게 모사를 허락받는다.

그가 <레이스 뜨는 소녀>를 코앞에 두고 그린 그림은 바로 코뿔소! 아뿔싸!

후일 자신의 방법으로 재해석한, 얼굴만 남기고 코뿔소의 뿔이 난무하는 <레이스 뜨는 소녀>가 탄생한다.

그가 그토록 코뿔소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인간처럼 미세한 곡선을 가진 모든 생물체는 원추형으로 되어있다는 그의 발견에 따라 그는 코뿔소의 뿔을 하늘이나 대지를 향해 솟구치는 극단적 형상으로 찬양하게 된다.

절대적 완전무결함으로 쏜살같이 미끄러져가는, 천사처럼 순수한 영감체인 코뿔소의 뿔이여!

 

 

      (오른쪽 그림은 <베르메르의 '레이스 뜨는 소녀'를 편집증적 비평 방법으로 그리기>1955 )

 

1953년 5월 9일 일기에 적힌 석 줄의 문장을 들여다본다.

자네가 만일 해부학, 데생, 원근법과 미학, 수학 및 색채 과학등을 익히길 거부한다면,

네게 이렇게 말하는 것만은 허락해주겠는가?

“자넨 재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게을러 터졌기 때문일세.”

 

실제로 그는 회화, 삽화, 오페라, 의상 디자인, 무대 장식, 영화, 조각, 보석, 가구 등 다방면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실제로 홀로그램을 이용한 3차원적 공간에 몰입하여 1971-73년에는

3차원적 작품 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의 콧수염 변주곡은 다양도 하다.)

 

세간에서 달리는 ‘Avida Dollars'라는 빈정거림을 받기도 했는데 그것은 ‘달러에 굶주린’이라는 뜻.

사회적 측면에서 노동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성스러운 자유를 누리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꿈이다. - 프란세스끄 푸졸스

돈에 관해서는 저 까딸루냐 출신 철학자의 말을 신봉했나보다. 자유를 통해서만이 인간의 영웅다움이 드러난다고 일기에 쓰고 있다.

달리는 여왕으로 만들어주겠다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아내 갈라에게 푸볼 성을 선물했고 구입할 때 볼품없었던 그 성을 여왕이라는 칭호에 걸맞게 손수 고쳐주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적절한 시기에 성스러운 자유를 누렸던 행복한 화가가 아닌가.

그 성에서 그녀는 1982년 89세의 일기로 숨을 거두었고, 그가 1989년 1월 85세로 세상을 떠났다.

혼자 생활하는 동안 그녀의 공백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어서 혼자 남아있는 동안 극도로 불안정한

정신세계를 보였다고 한다. 다른 남자의 아내를 보쌈해왔으니 그 정도의 애정은 보여주어야했으려나.

 

<접시 없는 접시 위의 달걀프라이> <기억의 지속>

 

책 한 권으로, 영화의 몇 장면으로 내가 달리를 알 수는 없겠지만 그가 일기라는 형식을 통해 보여준 것은 분명 꾸밈이 없는 내면과 그의 천재성에 대한 기꺼운 증명들이었다.

소설이 그렇듯 그림 또한 해석의 자유가 내게 온전히 허락된다면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달리의 그림은 그의 섬뜩한 천재적 직관에서 오는 불편함이 있다.

그림을 지배하는 황량함과 분열이 재앙 후 혹은 혼돈 이 전의 모습 같은 곤혹스러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림을 천천히 응시하는 동안 불편함은 소멸되고 삶에 대한 그의 직관의 한 부분을 느끼게 된다.'

이 현실을 어떻게 극복해가야 하겠는가 하는 의지를 몸속에서 그러모으게 된다고나 할까.

아름다움보다는 기괴함에 닿아있어 그 기괴함의 근원은 무엇인가 그 원시성을 생각케 한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길 펜더가 작가로써 보여주던 열정의 눈빛과 어감은 단순한 연기의 힘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영어영문학을 전공한 그는 벌써 여러 편의 대본에 참여하여 성과를 거둔 경험이 있는 작가였다. 시나리오 작가로서 소설가를 희망하는 극중의 직업은 논픽션이었던 것이다. 화가로써 해부학, 데생, 원근법과 미학, 수학 및 색채 과학을 익히지 않는 것이 게으른 일이라는 것을 이 배우도 알고 배우로써 그 삶을 실천하고 있었던 걸까.

 

예술가의 일은 절망에 굴복하는 게 아니라 존재의 허망함에 치료약을 주는 것,

확신에 차고 생동적이라야 되지요. 패배주의자가 되면 안돼요.

길의 소설을 읽고 조언해주는 거트루스타인의 예술에 대한 철학은 얼마나 큰 울림인가.

그녀의 방법은 얼마나 정확한가.

 

실제로 초현실주의자들의 그림은 어떤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기보다는 자신에게 떠오른 이미지들을 배열한 것으로 화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한다.

과연 그들은 환상을 보는 예지자이며 우주의 대언자인가.

예술가들이여, 더 많은 약을 달라, 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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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한 편의 소설이 되었다 - 위대한 문학작품에 영감을 준 숨은 뒷이야기
실리어 블루 존슨 지음, 신선해 옮김 / 지식채널 / 2012년 8월
평점 :
품절


공지영 작가가 소설 <도가니>를 쓰게 된 결정적 이유는 신문에 난 기사 때문이었다고 기억한다.

'집행유예로 석방되는 그들의 가벼운 형량이 수화로 통역되는 순간 법정은 청각장애인들이 내는 알 수 없는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

그들은 도대체 왜 울부짖었을까 라는 의문이 그 사건을 조사하게 했고 드디어는 소설로 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몇 번이고 이야기주머니를 싹 비워낸 작가들이 다시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내는 일이란 매번 새로 태어나는 것만큼 어려우리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이야기사냥을 했던 것일까.

이 책은 소설이 되기 위해 작가의 눈 앞에 번개처럼 내려앉던 한 문장, 혹은 풍경들, 그리고 자신이 겪었던 어려움의 현장에서 건져올린 소설들의 배경이다.

공통적인 것은 그들이 뱉어내는 판타지나 상상은 자신들의 과거에서 자극받은 사실과 풍경들의 ‘새로운 회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 50여편의 빛나는 사례들이 있다.

 

번쩍 스치는 황홀한 순간

 

예술가의 이름에 걸맞게 번쩍 스치는 황홀한 순간으로 다가오는 소설들이 있다.

잠결에서 본 여인의 팔꿈치가 번져서 만들어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빽빽하게 쓰인 시험지 꾸러미에서 백지를 발견한 신선한 충격이 안겨준 톨킨의 <호빗>

여행사의 신문광고에서 힌트를 얻어 쓴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

운전을 하다가 계시처럼 내려 온 한 문장으로 시작된 마르케스의 <백 년의 고독>

강렬한 창작의 공기가 그들을 감쌀 때 그들은 그것을 흘려보내지 않고 단단하게 문장 속에 가두고 끌어내며 불후의 명작들을 남기게 된 것이다.

 

이야기는 또 다른 이야기를 낳고

 

침대머리맡에서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지어내듯 급조된 모험이야기들이 <오즈의 마법사><위니 더 푸우><이상한 나라의 앨리스><피터 래빗 이야기> 등과 같이 유명한 동화로 탄생이 된다. 창작의 고갈로 괴로움을 겪고 있다가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실마리를 얻게 된 어빙의 <립 밴 윙클> 이나 가난한 교사로써 학생들을 실험하듯 써내려간 <파리 대왕>은 어려움 가운데서 탄생한 이야기 속의 이야기들이다.

 

현실 속, 그와 그녀의 이야기

 

무엇보다 관심을 사로잡는 이야기는 자신의 경험을 주인공을 통해 녹여내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다. 이루어지기를 바랬던 사랑이 성공하지 못한 그녀의 바람과 아쉬움이 녹아있어 더욱 절절하게 느껴진다. 의사였던 코난 도일이 은사인 벨박사를 왓슨으로 변신시킨 <셜록 홈즈>는 또 얼마나 유니크한가. <델러웨이 부인>과 <노인과 바다> 또한 이 카테고리에 속하는 것을 보면 모든 순간들이 작가들의 소설 속에서 재탄생하기 위해 대기를 떠다닌다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책은 그 외에도 어둠 속 저편, 영감이 떠오르다에서는 자신들이 겪었던 시련 가운데에서 새로운 이야기들을 짜낸 소설들을 소개한다. 실제로 4년 동안 읽고 시베리아의 감옥에 갇혀서 읽고 쓰는 것이 금지된 상태에서 톨스토이는 <죄와 벌>을 구상했고 범죄학자가 집필한 범뵈사건 사례집에서 발췌되어 소설이 된 <몽테크리스토 백작>이 흥미를 끈다. 또한, 어른들의 청소년소설을 거부하고 열다섯 살의 나이에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빈민가의 불량배집단 이야기를 써낸 힌튼의 <아웃사이더>가 소개된다. 더군다나 힌튼의 고등학교 1학년 글쓰기 성적은 'D'였다니 여기서 오묘한 웃음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영감을 찾아 떠난 위대한 여정 이라는 카테고리에서는 어떤 소설을 떠올릴 수 있을까?

바로 <어린 왕자>가 있고 <제인 에어>, <모비 딕>이 있다.

 

마지막으로 내 삶의 현장이 곧 이야기이다 에서는 변호사로서의 삶에 환멸을 느끼고 기자가 되어 법정 기자로 활약을 하고, 후에는 프랑스 극장가에 관한 기사를 다룬 가스통 르루가 있었으니 이쯤되면 이제는 그 사람의 작품을 설명없이도 알아맞출 수 있지 않겠는가?

바로 <오페라의 유령>이 되겠다.

그렇다면 20대 중반에 보훈병원의 정신병동에서 야간근무조로 일하면서 환각제의 도움을 받아 탄생한 소설은?

바로 켄 키지의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이 소설은 개인적으로 퀴즈 문제에 대한 소스로도 너무 훌륭하게 느껴진다.

아쉬우니까 하나 더!

제목을 짓기 위해 고심하던 작가가 문득 방안에 있던 서랍장에 서랍마다 표시되어있던 알파벳을 읽는다. 그러다가 맨마지막칸에 붙은 ‘O - Z' 라는 글자를 읊조리다가 지어진 소설의 제목은?

(흠, 수수께끼책에서처럼 답을 거꾸로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정답은 오즈의 마법사, 딩동댕!

 

이 책은 처음부터 차례로 읽는 것보다는 자신이 읽었던 책이나 평소 읽고 싶어하던 책을 골라 읽는 것이 좋겠다. 이리저리 팔랑거리며 왔다갔다하다보면 어느 새 끝이 나있다.

여담처럼 알게되는 배경지식이 책읽기에 흥미를 더해주는 장점이 있다. 이 책은 이러이러한 배경으로 탄생했대 라고 한마디 덧붙여 말할 수 있다면 아, 이것은 얼마나 뽀대나는 독서인가.

 

<오즈의 마법사> 제목이 지어지는 부분을 읽다가 나도 사방을 둘러보게 되었는데 왼쪽에는 와인라벨 ‘몬테스 알파’가 보이고 오른쪽에는 ‘뽕잎환’이 보인다.

프랭크 바움식으로 미지의 책제목을 지어보자니 <몬뽕의 아이들><테뽕의 언덕><스뽕의 전설>따위가 만들어진다.

흠, 뭐 별로 건질만한 것은 없는 것 같다.

한 단어에 얽힌 우연이라도 그것은 준비된 사람만이 발견할 수 있는 필연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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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다시 한 번 그러면 손모가지를 똑 분질러 버릴줄 알어.”

어렸을 적에 뭔가 잘못했을 때 엄마가 하셨던 말씀이다.

선생님들이 칠판에 글씨를 쓰다가 분필을 부러뜨리는 것을 여러 번 봤었기 때문에

똑, 분지른다는 것은 그렇게 두 동강이 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었다.

오우, 손이 두 동강 나면 안 돼지,

하며 엄마가 생각하는 나쁜 일들을 경계하고 착한 딸이 되도록 노력했던 것 같다.

 

 

뭘 잘못했는지 몰라도 이 책의 제목은 한 술 더 떠서 아예 잘라버리란다,

성경에 오른 눈이 실족케 하거든 눈을 빼어버리고, 오른손이 범죄케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내버리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낫다고 하는 말이 있었기에 성경에 근거한 이야기구나 했더니만

그게 범죄하는 손이 아니라 기도하는 손이란다.

기도하는 손은 예쁜 손인데 왜 자르라고 하나?

더구나 이것은 파울 첼란이라는 시인의 <빛의 강박>에 실린 한 싯구라니

그 시인은, 그리고 저자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기도의 방향이 잘못 되었나? 세상은커녕 자신도 바꾸지 못하는 기도는 가소로워 죽겠다는 뜻인가?

 

 

이 책은 실상 혁명에 관한 책이다. 그러나 그 혁명의 해석이 독특하다.

책을 읽는 것이 혁명이라는 것이다.

혁명이란 본디 텍스트를 바꾸는 것이며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 아닌 텍스트의 변혁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12C 부패한 그리스도교 개혁을 위한 교황혁명을 통하여 로마법을 교회법으로 재탄생시키고, 16C 독일혁명이라고도 불리는 종교개혁을 통해 reformed 된 개신교를 탄생시켰듯이 말이다.

법을 고치고 성서를 다시 쓰는 일이 혁명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한 가지 더 보태자면 문맹에 불과했던 무함마드에게 천사가 나타나 막무가내로 ‘읽으라’ 며 다그친 결과 눈으로 보고 읽는 방법이 아닌 새로운 방법의 텍스트 읽기로 새로운 종교마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위대함으로 연결되는 읽기. 어떻게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일까.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리고 쓴다는 것은 일종의 광기를 내포하고 있고

따라서 기묘한 방황과 열락을 내포하며, 그리고 신도 선망하게 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독서의 끝에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던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독서의 끝에서 만나는 시련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책을 읽고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입니다.

신의 꿈도, 마음도, 신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일체를,

지금 여기에 있는 하얗게 빛나는 종이에 비치는 글자의 검은 줄에 내던지는 일입니다.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렇게 쓰여 있다고 밖에 믿을 수 없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행하기 전에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자신이 확신에 거한 일을 실행하기에 앞서 책을 읽던 자세이기도 하다. 그는 성직자들의 오만한 악행과 믿음에 대하여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기존의 텍스트를 뒤집어 엎어버렸다.

또한 그는 '읽는다는 것은 기도이고 명상이고 시련이다 '라고 말했으니. 읽고 또 읽고 자신이 읽은 것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까지 읽고 확신이 서자 그것에 대한 개혁을, 즉 혁명을 시작했던 것이다.

읽는 것밖에는 할 도리가 없어서 당시 운좋게도 인쇄술의 도움을 받아 그는 성서읽기 운동을 전개시킬 수 있었다.

텍스트를 고치고 쓰는 일은 루터에게 사명이었기에 그는 무려 당시 독일 출판물의 1/3을 저술했다.

127권에 달하는 루터 전집과 97개조의 의견서는 당시 식자율 5% , 라틴어해독률 1%의 독일 사회에 던져져 혁명을 가속화하였다.

 

 

다른 나라를 살펴보면 이탈리아의 문맹률이 75%였을 당시, 러시아의 문맹률은 90%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 푸시킨이 대위의 딸을 썼고 도스토옙스키가 가난한 사람들을 썼으며 톨스토이가 유년시대를, 투르게네프가 사냥꾼의 수기를 썼다. 이 말은 역대최고의 악조건에서 최고의 작품이 쓰여졌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문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문학가들의 엄살은 거두어져야한다고 한다.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태반인 시기에 쓴 작품이었으니 그 때와 지금,

어느 때가 글을 쓰기에 더 열악한가, 가혹한가를 침 튀기며 묻고 있다.

 

 

단순히 책을 '읽었다', 가 아닌 '읽고 말았다'는 어떤 사건의 발생이 된 이상, 그 내용이 옳다고 생각되는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만큼의 집중력과 실천력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기존의 것을 부정하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텍스트의 변혁은 얼마나 불온한 세력인가. 그래서 문학은 혁명의 씨앗이고 기존체제의 반동이 된다고 본다.

당연히 자본주의와 기득권은 혁명을 싫어하고 반동을 귀찮아하므로 문학을 폄하하고 대학교육에서 문학부를 추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저자는 명령을 담고 있다고 판단하는 온갖 정보를 차단한 채 살고 있다.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고 누구도 부하로 두지 않으며 무지와 어리석음, 제한을 택해서 삶을 살고 있다한다. 정보를 차단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바보로 여김을 받는다는 뜻인데 그는 기꺼이 삶의 음지를 택하고 정보가 말해주는 대로 행동하는 굴종의 삶을 벗어나려한다는 것이다.

 

 

쓴다는 것, 읽는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접속한다는 것입니다.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거지반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어 그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다>이다.

자신의 무의식에 문득 닿는 그 청명한 징조만을 인연으로 삼아 선택한 책을 반복해서 읽으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반복해서 읽음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읽고 쓴다는 것은 정보를 둘러싼 착취의 구도를 파괴하고, 모든 분야에 걸친 답답한 닫힌 영역을 답파하여 현 상황을 추인하는 조치를 거절한 끝에 인류사적 규모의 중요성을 갖게 된다.

이것이 혁명이다.

그렇게 쓰여 있다고 밖에 믿을 수 없는 말을 근거로 한다는 선언, 책에 자신을 투사시킨 것이라는

망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준거의 공포를 이기고 난 후에는 끊임없이 질문해야한다고한다.

어떻게?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인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초판 700부에 350부가 반품이었으니 가히 실패한 책이라 불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의 한 권을 헌책방에서 우연히 산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스물 한 살의 프리드리히 니체. 다른 사람도 아닌 니체.

그가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을 쓰게 되었다고 하니 책의 성공이란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 책 한 권, 한 줄의 문장은 혁명의 기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밤, 뒤척거리다가 잠을 포기하고 일어나 우연히 펼쳐본 책의 한 줄이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무시무시한 제목의 책은 기도하는 손으로 세상을 바꾸려하지 말고 ‘자신의 무의식에 문득 닿는 그 청명한 징조만을 인연으로 삼아 선택한 책’ 되풀이해서 읽음으로 저자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보고 자신부터 변혁시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본다.

 

 

이 책은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해 그 어느 것보다 충실한 동기부여를 하며 그 당위성을 감동으로 이끌어준다.

이처럼 독서에 대하여 섬뜩한 필요성을 알려준 책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고보니, 책을 읽음으로써 내 삶에 작은 혁명들이 일어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남편이 아니라 부인이므로 부인만 했었다. '부인할 수 없음' 자체가 혁명이다.

아~ 썰렁하다. 하지만 난 이런 유머가 정말 조오타~)

말랑말랑한 영혼의 끝을 만져보고 내 자신에게 연민을 느꼈고

기존의 세계에서 벗어나 나를 확장시키기 위해 다양한 각도에 서 보았다.

생각의 문에서 문을 열고, 또 문을 열고 또 문을 열어 본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부족하지만 나만의 텍스트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가치있게 여기기 시작했다. 비록 큰 것에 비하여서 작지만 나의 고유한 사이즈를 기꺼워하기 시작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혁명이라는 거창한 말보다 버지니아 울프와 니체를

읽고 또 읽고 반복해서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모리스 블랑쇼의 말에 멍해지게 된다.

 

 

'독서란 묘석 墓石 과의 열광적인 춤이다.'

춤은 계속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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