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연한 인생
은희경 지음 / 창비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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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떡이 진 머리에 무릎이 늘어난 츄리닝을 입고 동화책을 읽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런 열악한 외적상태에도 불구하고 손에 쥔 동화책에서 왕자님이 튀어나와 청혼해 준다면

얼마나 멋있을까하는 뻔뻔한 상상을 했었다.

그 왕자가 어느 나라 왕자인지 국적도 필요 없고 키가 180cm가 넘는지 어쩐지 재볼 필요도 없고 시어머니가 까탈스러운 지, 재산은 많은 지 알아 볼 필요가 없었다.

그냥 이웃나라의 왕자라면 매혹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이 소설은 한결같이 '그 후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 식으로 결말을 맺는 동화적 결말의 팩트에서 시작한다.

매혹에 이끌려 선택한 결혼이 아름다운 이야깃거리에서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고 할까. 이데올로기로 대립하는 서사가 끊이지 않는 그 지긋지긋한 일상 말이다.

 

이안 - <위기의 작가들>이라는 독립영화로 순수함에 상처를 입히는 추악한 욕망을 가진 

           작가들을 폭로하고 싶어한다. 요셉을 그런 작가로 생각하고 있다.

요셉 - 소설가. 자신의 고뇌와 문학적 소양을 작업의 자양분으로 노련하게 사용할 줄 안다.           현재 아내와 별거중.

- 부모로부터 어쩔 수 없이 물려받은 ‘삶의 양면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

       현재 B문화재단팀장

도경 - 돈은 많고 사랑은 끊겨버린 유부녀, 자기 돈 들여가며 요셉을 만나고 있다.

이채 - 야망은 있으나 현실에서의 노력은 포기한 젊은 여자,

특유의 붙임성과 허영으로 현재 요셉의 욕망의 대상이다.

 

소설의 첫등장인물은 류의 엄마이다.

어느 봄 날, 대학생이었던 류의 엄마는 문득 애인에게 전화를 건다.

'오늘 저녁 시간이 있나요' 묻자 직장인이었던 애인은 '오늘은 바쁘다'고 대답한다.

상심되어 눈썹이 실룩거리려할 때 수화기 저편에서 “사랑해‘라는 말이 날아온다.

그 때 류의 엄마 얼굴에 퍼지는 사랑의 달큰하고도 온화한 열기가 공중전화박스를 뛰어넘어

지나가던 류의 아버지 눈에 들어온다.

류의 아버지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는 여인에게 매혹되어 앞뒤 가리지 않고 그녀를 쫓아다닌 결과 결혼에 성공한다.

 

엄마는 단정적이며 사실적인 세상의 이치를 알았고 아빠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이었다.

엄마는 ‘류’의 이름을 짓게 된 동기가 비행기에서 지은 이름이라 ‘흐름’이라는 단순한 뜻이라 했고, 아빠는 오페라 투란도트에 사랑을 위해 죽음도 마다않는 어느 노예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유학시절, 가깝게 지내는 이웃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날,

엄마는 아빠의 애인으로부터 무례한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그러나 엄마는 덤덤하게 여행길에 오른다.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매며 조의를 표하듯 가슴을 지그시 누르던 엄마의 그 동작을 류는 오래도록 기억한다.

남편의 부정을 알게 된 이후에도 그녀는 더 이상의 진실 따위는 요구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다. 갈등과 반목도 없이 화해와 용서도 없이.

 

소모적 감정이나 공허한 명분 때문에 고통을 참아내면서 인생을 낭비할 만큼 어머니는 어리석지도 무능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어머니가 믿지 않게 된 것은 아버지뿐 아니라 아버지를 포함한 타자로서의 모든 세계였을지도 모른다.

어디로 이사를 가득 어차피 같은 세계 안이고 천국이 아닌 것은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 69p

 

태연히 주어진 현실을 17년이나 받아들여왔던 엄마는 어느 날,

사랑과 가정과 일상, 그 모든 것이 낯설게만 느껴진다.

바로 이혼을 결심했고, 공부를 더 해서 대학교수가 되었으며 옛 애인과 재혼한다.

하지만 귀국한 아빠는 자살로 맥없이 생을 마감해버린다.

 

아빠의 장례식장에서 류는 요셉을 만났다.

노부부의 힘겨운 걸음걸이 뒤로 삶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듯한 굴뚝의 검은 연기가 말할 수 없이 서러워 울음을 터뜨릴 때, 바로 그 때 나타난 요셉을 보고 류는 직감한다.

엄마와 아빠의 두 본성이 내재해 있는 이 남자에게 이끌리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사랑을 기승전결의 패턴에 넣는다고 생각해봐, 그런 사랑에는 매혹이 없어. 패턴을 깨야지. 패턴에 따르기만 하면 인생은 편하겠지. 복제품이니까.

하지만 인간은 그것으로는 만족하게 못하게 돼있어.

자기인생이 의미 있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전쟁까지 벌이는 게 인간이거든.

그런 개인의 고유성을 지키기 위해서 예술이 존재하는 거지.

예술이 하는 일은 한마디로 패턴을 깨는 것이야. 배신하는 것. -107p

 

둘은 어느 낯설고 습한 도시로 도피한다.

끝까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기를 원했으나 매혹의 실체를 알고 있던 류는 갑자기 사라진다.

류의 증발은 요셉에게 있어 피가 멈추지 않는 상처와도 같았다.

 

류는 순진한 연인은 아니었다. 요셉의 궁극적 욕망이 자신의 내부를 향한 것이며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소설이라는 개인적 영역을 위해 소진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류는 자신이 매료된 것이 태연함 속에 깃든 파탄의 맛이라는 것을,

열렬한 삶 속에 깃든 차고 날카로운 죽음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었다. - 263p

 

이안의 프로젝트에 가장 높은 점수를 준 것은 B문화재단의 팀장, 류였다.

이안은 평소 자신이 가진 힘과 감성을 이용해 부도덕한 욕망을 즐기는 요셉을 증오해왔다.

그는 요셉의 이중성과 이기심을 폭로하고 곤경에 빠뜨리고 싶어한다.

요셉은 이안의 영화가 자신에게 함정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류를 보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 없다 생각하고 출연을 결심한다.

 

사실 남녀관계에서는 빨리 자버려야 쓸데없는 잡념에서 벗어나 진지한 사랑에 몰두할 수 있지. 수험생들도 잡념을 떨치려면 야동을 많이 봐줘야 해. 자기에게 오는 일을 피하려고만 하면 안돼.(..)

그래, 누구나 자신의 나쁜 운명을 알게 되면 피하려고 하지. 그런데 예정된 운명이 실현되는 것은 바로 그 도망침을 통해서야. 나는 도망치지 않음으로써 위기를 보여주겠다는 거야. - 183p

 

요셉의 주위에는 항상 여자가 끊이지 않았다.

그가 뱉어내는 삶의 고뇌와 적절하고도 멋진 인용문, 문학적 감성은 여자들을 끌어들였고,

요셉 또한 다가오는 여자들을 애써 막지 않았다.

그러나, 매혹은 태생적으로 몹시 허약한 아이와 같아서 시름시름 앓다가 이내 세상을 떠나버리게 마련.

그 어느 누구와도 끝났다거나 지속된다고 볼 수 없는 요셉의 여자관계는 공허하기만 하다.

 

그간 류를 본 적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몇 년 전, 요셉은 소설을 쓰기 위해 한적한 콘도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지독하게 눈이 내리던 밤, 콘도에 찾아온 여자와 콘도의 커피숍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류는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앉아있었다.

찾아온 여자를 콘도에 데려다놓고 미친 듯이 눈보라를 헤치고 커피숍에 다시 돌아왔었다.

그러나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지나가 버린 사랑은 문을 열어도 그 사랑을 볼 수 없고 단지 그 문을 열면 거기에는 원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 너머가 있다는 것을 직감으로 알았기때문이다. 그래서 원하지 않는 것을 보지 않기 위해 요셉은 문 열기를 포기했었다.

 

도대체 류는 왜 사라졌던 것일까.

 

매혹이 사라진 이후의 사랑은 어머니처럼 자신이 동의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의 틀 안으로 들어가는 일이었다. 류는 자기기만의 부역보다는 상실을 택했다. 고통보다는 고독을 택한 것이다. - 263p

가 사랑을 대하는 자세는 아마도 내 아이들에게 인식할 수 없는 코드로 심겨지게 되리라. 물론 남편의 방법 또한 은연 중에 습득하게 될 것이며 아이들은 저항하면서 때로는 한 점의 의심도 없이 수용하기도 할 것이다. 후일 아이들이 한 여자에 매료되고 나아가 사랑한다고 믿게 되면 자신들이 만들어 낸 고유한 사랑의 매뉴얼대로 사랑하게 될텐데 그 속엔 내가 나의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내 남편이 그의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사랑의 방식들이 박혀있을 것이다.

보석이 되었든, 가시가 되었든.

 

매혹이 한시적이고 열정은 사그러들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 무렵,

이별도 경험하게 되고 그로써 그보다 가벼워지기로 혹은 더 진지해지기로 마음도 먹게 될 것이다. 실상 한 사람이 사랑하는 방법이란 그의 결심이라기보다는 부모님의 부모님들로부터 차곡차곡 쌓여온 화석에너지를 휴지 뽑듯 뽑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삶은 이렇게 지독히도 많아진 사랑의 방법을 이해할 길이 없어 눈물의 서사로 얼룩지는 것이 아닐까.

 

해피앤딩으로 끝났던 동화를 계속 행복의 상태로 남겨두고 싶다면 이건 태연하게 인정해야겠다.

 

사랑하는 자는 없고 사랑만 있다.

가슴은 아프지만.

 

p.s 류는 본문에 인용된 트란스트뢰메르의 시 <소곡>에 인용되었듯이 좀처럼 가지 않는 어두운 숲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숲은 움직이게 되리라는 다음 구절을 미루어본다면 매혹이 지나고 난 이후의 사랑을 기대하고 있을거라는 생각이 든다.

요셉은 실패했지만 그 누군가는 그녀에게 밝은 숲, 움직이는 숲을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덕분에 트란스트뢰메르의 시집 <기억이 나를 본다>를 빌려 잘 굴러가지도 않는 발음으로 영시까지 읊어보는 호사를 누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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