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평점 :
절판


1.

죽기 살기로 며칠 매달렸더니 애니팡 순위 1위를 달성하였다.

내심 흐뭇해하고 있는데 며칠 지나니 지난 주 순위가 종료되고 새로 잘 해보란다.

새로 낸 점수가 단박 마음에 찰 리 없다.

그래, 내가 이기나, 네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아이템을 쓰려면 일단 점수를 올리기 위해 마구 달려보는 거지.

자고로 기계를 상대로 덤볐다가 나가떨어지는 것은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이 쯤 되면 길거리를 걷다가 들리는 새소리도 애니팡의 효과음으로 들린다.

 

2 .

스마트폰을 손에 쥔 이후로 아이들이 책을 읽는 시간이 현저히 줄었고 모든 정보와 대부분의 소통을 손가락으로 해결하고 있다

“너희들이 카카오스토리에서 맺은 친구3-400명이 너의 진짜 친구라고 생각하지 마라”

“너희가 공부하려고 할 때 그 모든 친구들이 안녕? 하고 한꺼번에 인사를 건네 온다면 너무 끔찍하지 않겠니”

나는 잔소리하느라 입이 아프고 아이들은 인상쓰느라 미간이 아프다.

물론 스마트폰의 허와 실을 이해하기엔 아이들이 너무 어리고 미숙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PC, 휴대전화, 아이팟, 또는 그 이외의 다른 경이로운 물건들이 사회화하면서도 분리시키고, 접속하게 하면서도 고립시키며, 연결하게 하면서도 연결을 끊게 하는 기술들(87p)은 편리함이라는 대표기능으로 모든 감각을 서서히 마비시키고 있다.

 

그러나, ‘홀로 있는 사람들일지라도 끊임없이 접속 가능한 상태에 있게 만드는’ 스마트폰을 현재 나도 사용하고 있고 그다지 관심이 없어도 최신폰에 대한 정보를 계속 듣고 있고 있다.

딱히 유행 타는 옷을 사고 싶지 않으나 백화점이나 상점에 진열된 옷을 보고 있자면 누군가가 옷에 새겨 넣은 유행의 코드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미디어보드라는 상업시설에나 가능한 광고매체가 아파트 엘리베이터에까지 밀고 들어와 현관문을 벗어나면 결혼정보회사, 각종 건강식품과 TV프로 광고로 남녀노소의 시야를 장악한다.

사는 게 뭔가 내 뜻대로 되지 않고,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도 어쩔 수 없이 밀려가는 듯한 이 삶은 도대체 뭐지?

 

이 책은 한 잡지에 저자가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라는 부제로 44편의 글을 엮은 것이다. ‘유동한다’는 의미는 가령 내가 살고 있는 이 동네에서 10년을 살고 있어도 같은 동네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건물이 움직인다는 뜻은 아닌, 변하고 싶지 않아도 할 수 없이 떠밀려 움직여야하는 액체의 시대를 살고 있다는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른 바 발을 딛고 있는 판이 움직이는 세계를 살고 있다는 것.

 

미래를 예측하는 유일한 방법은 미래의 사건들이 우리가 바라는 것에 일치하게끔 하는 것이고, 또한 미래를 바람직하지 않은 시나리오와는 확실하게 다른 특정한 방향으로 움직이기 위해 함께 힘을 모아서 노력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다. - 안토니오 그람시 (236p)

 

이제 지그문트 바우만의 문제제기가 시작된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은 미래에 대한 예측을 불가능하게 했고, 미래에 대한 불안은 온갖 공포를 불러오더니만 결국 ‘계속 접촉을 유지하며 손을 놓지 말자’는 예방의학의 범주를 만들어냈고,

거대한 제약회사와 결탁한 세력들은 ‘질병 권하는 사회’를 만들어냈다.

대중의 공포심을 이용하여 ‘신종플루’같은 거품은 언제든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스스로 저항하며 지켜가야 할 프라이버시가 트위터나 페이스북이라는 공적인 영역에 자발적으로 퍼날라지고 있음을 고발한다.

 

프라이버시란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유일하고, 결코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주권이 유지되는 지대이자 주권을 지닌 사람들의 왕국이 되지 않으면 안되는 영역이다.

사람들은 그 영역에서 ‘내가 누구이며 무엇인지’를 결정할 수 있는 충분한 힘을 갖게 되며, 그 영역에서부터 자기 자시들의 결정을 충분히 승인하고 존중하며 조직적인 운동을 뜻대로 전개하고 새롭게 펼쳐나갈 수 있다. - 74p

 

그는 가상적인 온라인의 관계들이 현실적인 대인관계를 대체하고 능가하게 되는 일,

그래서 공동체가 네트워크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고, 공들이고 상처받는 실제의 대인관계의 어려움보다는 선택과 조작이 가능한 온라인관계를 선호함으로 실제로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소통하는 일이 줄어들게 되는 일을 염려한다.

그래서 이 시대는 데카르트의 존재증명을 이렇게 변화시켰다한다.

나는 보여진다. 따라서 나는 존재한다.

 

‘무언가를 사기 위해 돈을 모으던 사람들’은 점차 사라지고 이제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큰 힘을 들이지 않는다. 대출회사는 자신들의 이익 때문에 돈을 빌려주면서 마치 부모님이 자식에게 빌려주듯 착각하게 한다.

‘언제 갚을래?’ 꼭꼭 다짐받지도, 빨리 내놓으라고 독촉하지도 않는다.

한 때, ‘레버리지효과’라는, '빚도 자산이다'라는 금융계의 유혹은 얼마나 당당하게 빚지도록 격려했던가.편안한 노후를 보내려면 수억이 필요하다는, 보험회사에서 만들어 냈을법한 기사가 진실과 거짓사이에서 줄타기하고 있다.

 

소비지상주의는 사람들에게 모든 문제를 소비로써 해결하라고 은밀하게 부추기고 있고

이 소비세계를 강력하게 추진시키기 위해서 아동들마저 상업화하고 있다.

자신들을 치장한 물건들로써 자신이 원하는 자신의 이미지에 대한 기호로 삼으며 자신의 몸을 감고 있는 물건들이야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알려준다 생각하도록 최면을 걸고 있다.

그렇다면 살아가는 것이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일의 연속인 이런 유동의 시대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저자는 카뮈의 작품을 들어 <시지프스>와 <프로메테우스>를 설명한다.

자신의 비참한 고통에 사로잡혀 헤어나오지 못하는 시지프스와  타인들의 고통에 맞서 반항하는 삶을 사는 프로메테우스.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들의 불행으로부터 우리 스스로 거리를 두는 동안에는 결코 행복추구라는 목적에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없다는 저자의 충고가 마음을 찌른다.

나도 같은 이유로 타인이 겪었던 고통을 겪을 수 있다는 생각.

그것이야말로 인간들로 하여금 서로 연대하게 만드는 힘이 아닐까.

아름다움에도 닿아있고 비참하고 굴욕적인 일에도 닿아있는 이 부조리한 인생에서 말이다.

 

만약 병적인 자기의식을 물리치고 프로메테우스가 방문하게끔 마음을 터놓는다면,

시지프스도 지금까지 그처럼 노예 같은 상황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하는 실천가의 모습으로 탈바꿈할 수 있다.

“행복과 부조리는 지구라는 똑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두 아들이다.

그들을 결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다.” - 388p

 

그는 책의 마지막 소제목에서 어떻게 살아야할 지에 대한 해답을 드러내고 있다.

데카르트의 존재증명이 변형되어야한다면 나는 보여진다, 고로 존재한다가 아닌,

나는 반항한다, 고로 우리는 존재한다.

인간의 자유란 '단지 더 나아질 수 있는 하나의 기회에 지나지 않을 뿐'이며 그렇기에

'그처럼 자유롭지 못한 어떤 세계를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단지 당신이 실존한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반항의 행위가 되도록 절대적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 366p

 

 

이가 혼자 생각할 시간이 없어졌다는 것은 내게 큰 위기이다.

실수를 하고 잘못을 해도 그것에 대한 반성이나 회심 없이 자신의 기분을 그저 온라인상에

‘꿀꿀하다’ ‘짜증난다’라는 말로 배설하고 또 그것을 위로한답시고

‘힘내' ‘우울같은 건 날려버려’라는 친구들의 손놀림을 진짜 우정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염려스럽다.

이러다가 먼 훗날 부모란 대화도 유대관계도 필요없는 그저 자식들의 '소비의 집행자'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

물론 아이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가 엄마에게 말했던 것처럼.

"세대차이야!"

 

4.

삶의 작은 낙이었던 애니팡, 캔디팡에서 탈퇴했다.

사실 별 것도 아닌 일인데 탈퇴라는 버튼을 누르기까지는 몇 번을 망설였다.

이제 더 이상 하트가 날아오는 소리로 일상이 끊기지 않으며 오후에 배터리를 충전해야하는 번거로움도 없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후, 슬그머니 다른 게임앱을 기웃거린다.

다운받고 시작을 하려는데 약관에 동의하라는 메시지가 뜬다.

내용을 살펴보니 내 전화에 저장되어있는 연락처를 모두 수집한다는 내용이다.

사람으로 대우받는다기보다는 정보로써 식별당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정신이 버쩍 든다.

조용히 앱을 삭제한다.

 

5.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는 한 후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언니, 우리 아이는 만나지도 않는 친구들 소식을 쫘~악 꿰고 있어.

그래서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그랬더니 카톡이나 카스를 보면 된다네?“

“맞아, 연락하지 않고도 한 눈에 다 볼 수 있어.”

“언니, 그거 참 안 좋다. 나는 그거 계속 안 쓸래.”

그래,

너의 결정을 응원한다.

비록 유동하는 시대에 곧 순응하게 되어 다음에 만날 때 네 손에 스마트폰이 쥐어져있을지라도.

날개 꺾인 새처럼 힘없고 미미한 푸덕거림일지라도.

그래야 유동하는 세계에서 저 거대한 실타래의 끊어진 한 올로 살며

이 미친 속도에 침 한 번이라도 뱉을 수 있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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