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다시 한 번 그러면 손모가지를 똑 분질러 버릴줄 알어.”
어렸을 적에 뭔가 잘못했을 때 엄마가 하셨던 말씀이다.
선생님들이 칠판에 글씨를 쓰다가 분필을 부러뜨리는 것을 여러 번 봤었기 때문에
똑, 분지른다는 것은 그렇게 두 동강이 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었다.
오우, 손이 두 동강 나면 안 돼지,
하며 엄마가 생각하는 나쁜 일들을 경계하고 착한 딸이 되도록 노력했던 것 같다.
뭘 잘못했는지 몰라도 이 책의 제목은 한 술 더 떠서 아예 잘라버리란다,
성경에 오른 눈이 실족케 하거든 눈을 빼어버리고, 오른손이 범죄케 하거든 그 손을 찍어 내버리고
천국에 가는 것이 낫다고 하는 말이 있었기에 성경에 근거한 이야기구나 했더니만
그게 범죄하는 손이 아니라 기도하는 손이란다.
기도하는 손은 예쁜 손인데 왜 자르라고 하나?
더구나 이것은 파울 첼란이라는 시인의 <빛의 강박>에 실린 한 싯구라니
그 시인은, 그리고 저자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기도의 방향이 잘못 되었나? 세상은커녕 자신도 바꾸지 못하는 기도는 가소로워 죽겠다는 뜻인가?
이 책은 실상 혁명에 관한 책이다. 그러나 그 혁명의 해석이 독특하다.
책을 읽는 것이 혁명이라는 것이다.
혁명이란 본디 텍스트를 바꾸는 것이며 혁명의 본질은 폭력이 아닌 텍스트의 변혁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12C 부패한 그리스도교 개혁을 위한 교황혁명을 통하여 로마법을 교회법으로 재탄생시키고, 16C 독일혁명이라고도 불리는 종교개혁을 통해 reformed 된 개신교를 탄생시켰듯이 말이다.
법을 고치고 성서를 다시 쓰는 일이 혁명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한 가지 더 보태자면 문맹에 불과했던 무함마드에게 천사가 나타나 막무가내로 ‘읽으라’ 며 다그친 결과 눈으로 보고 읽는 방법이 아닌 새로운 방법의 텍스트 읽기로 새로운 종교마저 탄생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위대함으로 연결되는 읽기. 어떻게 읽어야 제대로 읽는 것일까.
글을 읽는다는 것은 그리고 쓴다는 것은 일종의 광기를 내포하고 있고
따라서 기묘한 방황과 열락을 내포하며, 그리고 신도 선망하게 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독서의 끝에는 시련이 기다리고 있다던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독서의 끝에서 만나는 시련을
경험해본 적이 있는가.
책을 읽고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
그것은 자신의 무의식을 쥐어뜯는 일입니다.
자신의 꿈도, 마음도, 신체도,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 일체를,
지금 여기에 있는 하얗게 빛나는 종이에 비치는 글자의 검은 줄에 내던지는 일입니다.
정면으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렇게 쓰여 있다고 밖에 믿을 수 없다면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시행하기 전에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자신이 확신에 거한 일을 실행하기에 앞서 책을 읽던 자세이기도 하다. 그는 성직자들의 오만한 악행과 믿음에 대하여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며 기존의 텍스트를 뒤집어 엎어버렸다.
또한 그는 '읽는다는 것은 기도이고 명상이고 시련이다 '라고 말했으니. 읽고 또 읽고 자신이 읽은 것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까지 읽고 확신이 서자 그것에 대한 개혁을, 즉 혁명을 시작했던 것이다.
읽는 것밖에는 할 도리가 없어서 당시 운좋게도 인쇄술의 도움을 받아 그는 성서읽기 운동을 전개시킬 수 있었다.
텍스트를 고치고 쓰는 일은 루터에게 사명이었기에 그는 무려 당시 독일 출판물의 1/3을 저술했다.
127권에 달하는 루터 전집과 97개조의 의견서는 당시 식자율 5% , 라틴어해독률 1%의 독일 사회에 던져져 혁명을 가속화하였다.
다른 나라를 살펴보면 이탈리아의 문맹률이 75%였을 당시, 러시아의 문맹률은 90%였다고 한다. 이 시기에 푸시킨이 대위의 딸을 썼고 도스토옙스키가 가난한 사람들을 썼으며 톨스토이가 유년시대를, 투르게네프가 사냥꾼의 수기를 썼다. 이 말은 역대최고의 악조건에서 최고의 작품이 쓰여졌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문학이 죽었다고 말하는 문학가들의 엄살은 거두어져야한다고 한다.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태반인 시기에 쓴 작품이었으니 그 때와 지금,
어느 때가 글을 쓰기에 더 열악한가, 가혹한가를 침 튀기며 묻고 있다.
단순히 책을 '읽었다', 가 아닌 '읽고 말았다'는 어떤 사건의 발생이 된 이상, 그 내용이 옳다고 생각되는 이상 그 말에 이끌려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만큼의 집중력과 실천력을 가지고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기존의 것을 부정하고 끊임없이 의심하는 텍스트의 변혁은 얼마나 불온한 세력인가. 그래서 문학은 혁명의 씨앗이고 기존체제의 반동이 된다고 본다.
당연히 자본주의와 기득권은 혁명을 싫어하고 반동을 귀찮아하므로 문학을 폄하하고 대학교육에서 문학부를 추방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이하게도 저자는 명령을 담고 있다고 판단하는 온갖 정보를 차단한 채 살고 있다.
누구의 부하도 되지 않고 누구도 부하로 두지 않으며 무지와 어리석음, 제한을 택해서 삶을 살고 있다한다. 정보를 차단한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바보로 여김을 받는다는 뜻인데 그는 기꺼이 삶의 음지를 택하고 정보가 말해주는 대로 행동하는 굴종의 삶을 벗어나려한다는 것이다.
쓴다는 것, 읽는다는 것은 무의식적으로 접속한다는 것입니다.
카프카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거지반 카프카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어 그가 이 책에서 강조하는 것은 <책이란 되풀이해서 읽는 것이다>이다.
자신의 무의식에 문득 닿는 그 청명한 징조만을 인연으로 삼아 선택한 책을 반복해서 읽으라고 한다. 그렇다면 과연 반복해서 읽음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읽고 쓴다는 것은 정보를 둘러싼 착취의 구도를 파괴하고, 모든 분야에 걸친 답답한 닫힌 영역을 답파하여 현 상황을 추인하는 조치를 거절한 끝에 인류사적 규모의 중요성을 갖게 된다.
이것이 혁명이다.
그렇게 쓰여 있다고 밖에 믿을 수 없는 말을 근거로 한다는 선언, 책에 자신을 투사시킨 것이라는
망상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준거의 공포를 이기고 난 후에는 끊임없이 질문해야한다고한다.
어떻게?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인가,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인가.
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초판 700부에 350부가 반품이었으니 가히 실패한 책이라 불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 중의 한 권을 헌책방에서 우연히 산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스물 한 살의 프리드리히 니체. 다른 사람도 아닌 니체.
그가 이 책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을 쓰게 되었다고 하니 책의 성공이란 것이 이보다 더할 수 있을까. 책 한 권, 한 줄의 문장은 혁명의 기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방황하는 밤, 뒤척거리다가 잠을 포기하고 일어나 우연히 펼쳐본 책의 한 줄이 사람을 바꾸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무시무시한 제목의 책은 기도하는 손으로 세상을 바꾸려하지 말고 ‘자신의 무의식에 문득 닿는 그 청명한 징조만을 인연으로 삼아 선택한 책’을 되풀이해서 읽음으로 저자의 꿈을 자신의 꿈으로 보고 자신부터 변혁시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본다.
이 책은 책을 읽는다는 것에 대해 그 어느 것보다 충실한 동기부여를 하며 그 당위성을 감동으로 이끌어준다.
이처럼 독서에 대하여 섬뜩한 필요성을 알려준 책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고보니, 책을 읽음으로써 내 삶에 작은 혁명들이 일어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는 남편이 아니라 부인이므로 부인만 했었다. '부인할 수 없음' 자체가 혁명이다.
아~ 썰렁하다. 하지만 난 이런 유머가 정말 조오타~)
말랑말랑한 영혼의 끝을 만져보고 내 자신에게 연민을 느꼈고
기존의 세계에서 벗어나 나를 확장시키기 위해 다양한 각도에 서 보았다.
생각의 문에서 문을 열고, 또 문을 열고 또 문을 열어 본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부족하지만 나만의 텍스트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가치있게 여기기 시작했다. 비록 큰 것에 비하여서 작지만 나의 고유한 사이즈를 기꺼워하기 시작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혁명이라는 거창한 말보다 버지니아 울프와 니체를
읽고 또 읽고 반복해서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리고 모리스 블랑쇼의 말에 멍해지게 된다.
'독서란 묘석 墓石 과의 열광적인 춤이다.'
춤은 계속되어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