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브 레플리카
윤이형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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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카, 나는 너에게 네가 왜 루카인지 묻지 않았다. 예전에도 지금도 나는 그것이 잘못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 역시 내가 왜 딸기인지는 묻지 않았으니까. 나는 이제 너와 함께가 아니고 여전히 어떤 것들에 대해서는 묻지 않은 채 살아간다. 어떤 일들은 그저 어쩔 수없고 어떤 일들은 노력해도 나아지지 않으며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과는 함께 살 수 없다. 그저, 그럴 수 없다. 삶이라는 이름의 그 완고한 종교가 주는 믿음 외에 내가 다른 무언가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는 내 믿음을 지켰고 너를 잃었다. 그 사실이 가끔 나를 찌르지만 나는 대체로 평안하다. 그런데 루카, 너는 어떠니. 너는 그곳에서 평안하니. 루카였고 예성이였던 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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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그건 부르는 말.
아득하게 아득한 너를 부를 때
당신이라는 말.
어디에도 없는 너를 당신, 하고 부를 때
내가 부르는 것은 너인지, 나인지, 그인지
당신은 2인칭이 아니라는 것을 아흔아홉 해를 살고 알았다.
그건 거짓말. 나에게는 부를 당신이 없고 나는 아흔아홉 해를 살지도 않았으니.
계속 속고 싶어 속으로 부르는 말.
이미 오래전 20만년 전 너의 첫 출현과 동시에 사라진 말.
그러므로 당신, 당신은 무인칭,
당신이 없는 모든 곳에 당신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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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인칭의 자리
윤해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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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참을 수 없어져서. 참을 수 없어서. 바다를 보러 왔다. 바다를 본다, 파도가 온다, 파도가 온다. 이미 사라진 것.
나는 지나간 파도, 누군가의 마지막 바다 같은 것을 참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것도 없는데 참고 있다는 기분. 그래도 참을 수 없어 눈물 같은 것을 흘리고 싶었는데. 내내 나에게 등을 지고 바다에 앉아 있던 갈매가 가볍게 날았다.
바다가 보고 싶어, 이따금. 저 하늘 위에서. 하늘 밖으로. 훌쩍, 왜 우는 소리와 떠나는 소리는 같은지.

바다가 보고 싶은 건 외로운 거래. 엄마가 보고 싶은 건 삶이 힘든 거고. 학창 시절에 우리는 이런 목록을 만들곤 했다. 그때도 바다나 엄마가 늘 보고 싶었지만.
그리움도 나이를 먹는다. - P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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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왜 만질 수 없는 날씨를 살게 되나요 문학동네 시인선 132
최현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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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을 붓고 자라는 일들을 지켜본다 대기에 비린 냄새 섞일 때 내가 잘라버린 너를 생각한다 이제 사라져도 좋을, 나도 떠나고 너도 떠난 우리의 지난 일들이 녹고 부풀 때 우리는 꿈결 속에서 장미보다 가시로 자라길 원한다 덜컥 걸린 눈물과 비명이 살인을 닮을 때 우리가 하는 일을 철 지난 노래라 하자 잊기 위해 두고 왔는데 두고 와서 잊을 수 없게 된, 거기서, 우리의 모든 창문을 타고 또다시 미끄러져내려올 때 그게 너와 나의 한때, 소나기라고 하자 그리하여 이곳이다 네가 너를 버린 실종의 곳간에서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잃어버리는 소음을 들으며 여전히 숨어 잠이 드는 - P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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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끝
윌리엄 트레버 지음, 민은영 옮김 / 한겨레출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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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떠날 테고, 매일 아침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그가 떠났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지금 아침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이 그가 있다는 사실인 것처럼. 눈을 뜨면 분홍색으로 칠한 벽과 빈 벽난로 위의 성화, 그리고 창가에 놓아둔 자신의 옷이 지금 처럼 보일 것이다. 그는 사라질 것이다. 죽은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처럼. 그가 떠났다는 사실은 부엌에서도, 마당에서도,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 테고, 레이번 스토브에 넣을 무연탄을 부엌으로 옮길 때도, 교유기를 끓일 때도, 암탁에게 모이를 줄 때나 토탄을 쌓을 때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들판에서도, 달걀을 들고 사제관 문이 열리길 기다릴 때도, 코널티 양이 동전을 세는 동안에도, 보청기를 낀 남자가 단열용 전기제품 보호구나 소젖 패드 등을 찾을 때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남편 옆에 누워 있을 때도, 그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빵을 자를 때도, 올드타임 춤곡이 흘러나올 때도.
"떠나고 싶어요?" 엘리가 물었다.
"이제 나한테 아일랜드에 남은 게 없어요."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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