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현듯 깨닫는다. 그와 내가 연인이었던 시절을 지나, 연인이 아니었던 시절도 지나, 점차로 친구라는 사실조차 희미해져갈 것임을. 이제는 그에 대한 글을 쓸 수 없음을, 그에 대한 글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임을, 그러니까 앞으로 만나게 될 그는 소설이 될 수 없는사람으로만 만나게 될 것을 예감한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 모습이, 우리의 감정이, 우리의 밀도가 그와 내가 처음으로 만났던 날, 서로에 대한 기억이 없었던- 회상을 가질 수 없었던 첫 만남과 닮았음을 깨닫는다. 마침 오늘은 봄비가 내리고 있기에 원한다면 익숙한 서정에 기대어 정경을 묘사하고, 공중전화 부스에서 잠시 비를 그어도 좋겠다. 그와 나의 열없고 의미 없는 미소. 그렇게 끝과 시작은 이토록 이어져있다고, 나는 그 환상적이고도 서글픈 겹침을 예찬하며 홀로 전율하며 그와의 시작과 지금 내 눈앞, 그의 무구한 눈빛을 그리며 끝을 낼 생각이었다. 나아가 오직 소설 밖에서만 존재할 그를 다시는 쓰지 않음으로써, 나는 그를 소유하고 싶었다. 비약해 소설이 될 수 없는 순간만이 진실하며, 그렇게 문학이 아닌 삶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 P1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