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이 챕터에서 샌델은 능력주의 도덕의 역사를 나름의 관점으로 설명한다. 특징적인 것은 그가 능력주의 도덕의 역사를 기독교에서부터 찾았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토대가 기독교에 있으며, 능력주의를 정당화했던 많은 권력자의 입장의 토대가 기독교적 섭리론(내 생각에는 왜곡된 기독교적 입장)에 기초해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샌델은 먼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의 신, 즉 인간이 선한 행위를 하면 그에 따른 상을 주고 악한 행위를 하면 벌을 주는 신의 모습을 간단히 짚고(이를 그는 능력주의 신학이라 부른다. 인간의 행위에 따라 응보적으로 상벌을 받는 것이기에), 이후 <욥기>에서의 신, 즉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한 신의 모습을 짚으며(욥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무자비한 벌을 받는다.) <욥기>에서의 신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나타난 능력주의의 신학에서 급격히 이탈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것이 그가 첫 번째로 말한, 성서에 나타나는 능력주의에 대한 상반된 입장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게 있다. 내가 보기에 이는 성서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 샌델은 성경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마치 신의 모습이 성경 안에서 모순적으로 그려진 것인 마냥 대립시켰다. 이는 먼저, 근본적으로 욥기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근거한다. 욥기에서의 하나님은 단순히 창세기와 모순되는, 선악에 따라 상벌을 내리지 않고 제멋대로 하는 신이 아니다. 욥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결점 하나 없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일지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함 존재라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사람도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으며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점이 욥기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신은 인간과 차원적으로 구별되는 존재로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존재임을 드러내는 책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은 능력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주의를 다루는 차원의 상위에서,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죄성을 논하는 책인 것이다. 따라서 욥기에서의 신을 창세기 출애굽기에서의 신의 모습과 비교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것을 비교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또 하나, 과연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신학을 능력주의 신학이라 칭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에 대한 샌델의 주장부터 먼저 살펴보자.

˝성서적 관점의 두 가지 특징이 오늘날의 능력주의와의 유사성을 드러낸다. 우선 인간의 능력에 대해 한껏 강조한다. 또한 불운한 사람들에 대해 둘 다 냉혹하다. 다른 점이라면 오늘날의 능력주의가 인간의능력과 의지에 중점을 두는 반면, 성서적 능력주의는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린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상과 벌을 나눠주는 주체는 신이다. 홍수든 가뭄이든, 아니면 가뭄 끝의 단비는.
하지만 신이 인간의 선에 상을, 악에 벌을 내리느라 눈코 뜰 새 없다는 것은 너무 인간중심적인 시각이다. 역설적으로 신은 우리에게 구속받게 되며, 신이 정당한 이상 우리에게 응분의 대가를 내려야만 하게된다. 신이 상벌의 주체라 하지만 그는 각자의 실적에 따라 처리할 뿐 임의대로 행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신 앞에서라도 인간은 자기가 받을 것을 받으며 따라서 자기 운명에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 p.

나는 여기서 두 번째 문단에 주목하고자 한다. 샌델은 하나님이 인간의 선에 상을 주고 악에 벌을 준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신이 인간의 행위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존재가 됨으로써 신이 인간에게 구속받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너무 인간중심적인 시각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자체가 인간중심적인 생각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샌델이 표현한 것처럼 ˝인간의 선에 상을, 악에 벌을 내리느라 눈코 뜰 새 없˝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없어도 그 자체로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이다. 인간과 모든 세계를 주재하는 존재로서 오로지 그 자신이 기준이 되어 의로 이끄는 존재이다. 신은 절대로 인간에게 구속받을 수 없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 상벌을 내리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이미지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능력(행위)가 신의 행동을 좌우한다는 능력주의 신학으로의 해석은 주객전도된 잘못된 해석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모든 게 다 운명이다 라는 게 아니다. 자유의지가 없든 있든 간에(지금의 대부분의 신학은 자유의지가 있다고 본다) 신은 인간과 구분되어 자존하며 인간의 기준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자신의 기준으로 심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을 오해한 채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인간의 능력주의적 관점을 드러내고, 성경은 이를 그 안에서 번복하면서 그 자체로 모순인 책이다라는 관념을 형성하게 하는 점이 우려스러웠다. 실제로 이런 책을 통해 성경의 내용 일부를 접하고 잘못된 관념을 형성하는 사례들이 많기 때문에 더욱이 그랬다. 그래서 한번 적어보고 싶었다.


다시 챕터2 내용으로 들어가보면, 이후 그는 기독교의 중요한 주제인 ‘구원’에 대한 논쟁이 세월을 거쳐 칼뱅에 이르러 능력주의적 사고에 적합한 윤리를 장려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능력을 다해 직업 행위를 함으로써 결실을 맺는 것을 구원의 표증으로 여기게 함으로써 능력주의적인 섭리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면 타당하다. (베버에 따르면) 칼뱅의 예정설과 직업소명설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했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성어거스틴)에서부터 루터, 칼뱅에 이르기까지 구원이 ‘신의 은총‘이냐 ‘율법준수와 선행으로부터 오는 자기구제‘이냐라는 질문에는 공통적으로 전자를 택했다. 그런데 이제 칼뱅이 구원의 표증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서 직업행위와 그 결실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근면성실함으로 얻은 부와 소유들을 구원의 표증, 신의 축복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여기서 내가 짚고 싶은 것은 이러한 논쟁이 기독교 자체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에 가깝고,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서 사회에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라고 보는 게 맞다. 심지어 구원과 자기구제에 대한 논쟁은 성서 속 초대교회에서도 비일비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논쟁이 없고서야 사도바울이 그렇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반복적으로 외쳤을까. 아무튼 기독교 교리 자체와 그를 이해하는 데서 발생하는 서로 다른 입장들을 구분했으면 좋겠다. (저런 내용들을 읽고 나서 너무나 쉽게 기독교는 틀렸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보면..ㅎ 샌델에 따르면 이러한 기독교적 토대는 미국의 건국부터 클린턴,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역의 능력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부와 건강함을 신의 섭리로 인식하게 만들고 자신들이 펼치는 모든 정책의 정당성을 “정의로 향하는 것”이라는 신념에 근거하게 했다. 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미국은 선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라는 문구(아이젠하워가 토크빌에게서 잘못 인용한 말. 미국인의 기본적 의식으로 많이 깔려 있다고 함.)이다. 그러면서 샌델은 이러한 섭리론, 즉 “우리가 부유하고 건강한 것은 우리가 선하기 때문에 받은 신의 축복이다”라는 섭리론이 지금의 능력주의를 정당화하는 토대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챕터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걸렸던 점은 성서에 대한 잘못된 이해였다. 이에 따라 이 챕터를 읽는 비기독교인에게 성경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심겨질 수 있겠다는 우려도 함께 들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좀 길게 썼다. 그렇다고 내가 이 챕터 전체에 공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챕터의 전체적인 흐름이나 현재 왜곡된 기독교적 섭리론이 능력주의를 정당화해왔던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공감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우리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까지의 한국 교회들을 보면 이러한 능력주의, 번영 복음주의가 많이 있었다. 조금씩 이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생기면서 변화하고 있지만 사실 지금도 많다. 가장 단적인 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를 나는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적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하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그 뜻에 따라 살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전 말씀들까지 포함하면 이렇다.

(빌립보서 4장 / 개역개정)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런데 이런 말씀을 한 줄만 따로 빼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식으로 정말 많이 해석한다. 결국 이는 본래의 의도가 아닌 제 입맛에 맞춰 성경을 사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무튼 어쩌다보니 또 길게 썼는데 이만 힘드니 여기서 끝.
오늘의 교훈. 잘 읽자. 의도를 잘 파악해서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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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름표를 잘 붙이자.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게 아니다. 상대주의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만큼 허무하고 자기모순적이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얘기하는 건 논의의 발전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회의주의에 빠지기 십상이다. 모든 것을 상대주의적으로 환원하여 생각하는 순간 남는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진리 탐구를 포기하거나 속세를 떠나거나. 그러나 인간은 어디까지나 현실에 발 붙이고 살고 있으며 끊임없이 생각하는 존재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내가 경계하고자 하는 건 일상 속에서 개인의 무의식을 잠식하는 언어, 매체, 사회의 문화, 고정관념이다. 그러니까 세계의 상대성, 절대성과 다른 차원, 보다 몇 단계 낮은 차원에서의 주체성을 얘기하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관 없이 모든 것을 용인하기보다 오히려 자기 주관이 뚜렷하게 서 있어야 한다. 깨어있자. 깨어서 주체적으로 파악하자.

이 연구에서 채노위츠와 나는 ‘크로모시도시스‘라는 가짜 병명을만들어 낸 다음 이 병이 청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 질병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이 장애의 여부를 실험할 예정이라고 알리고 증상이 적힌 소책자를 나눠 주었다. 이때 모든 참가자에게 똑같은 자료를 나눠 준 것은 아니다.
네 집단 중 세 집단에게 나눠 준 소책자에는 인구의 80퍼센트가이 장애를 갖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이 질병의 가능성을 참가자 자신과 좀 더 연결시키게끔 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크로모시도시스로진단받는 경우 스스로 어떻게 도울 것인지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그들에게 요청했다.
네 번째 집단이 받은 소책자에는 인구의 10퍼센트만이 걸리는 희소병이라고 적음으로써 질병과의 관련성을 덜 느끼도록 했다. 그들에게는 이 병으로 진단받으면 어떻게 대처할지 생각해보라고 요청하지 않았으므로, 우리의 가설에 따르면 네 번째 집단은 소책자에적힌 정보를 무심히 훑어볼 터였다.
그들은 실제로도 그러했다. 우리는 피험자 전원에게 크로모시도시스 진단을 위한 ‘청력 실험‘을 실시했다. 피험자가 정말로 크로모시도시스를 앓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려는 절차였다. 그러고 나서 소책자에 설명된 특정 장애를 알아보기 위한 일련의 후속 실험을 실시했다. 그 병이 자신과 별 관계없다고 여긴 사람들, 즉 무심한 독자들은 다른 집단과 마찬가지로 받은 특정 후속 실험에서 주어진 자료와 우리의 설명을 감안해 어떻게 질병에 대처할 것인지 생각하고 자신과 좀 더 관계있는 병이라 여긴 사람들에 비해 절반도 안 되는 성과를 보였다. 처음에 정보를 받아들인 방식이 나중에 그 정보의 사용 방식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 P231

아툴 가완디(Atul Gawande)는 자신의 저서 《합병증(Complications)》에서 의학을 "불완전한 과학, 끊임없이 변하는 지식의 기업, 불확실한정보와 실수투성이 개인"이라고 표현한다. 모든 개인은 다르고, 모든 병원체도 다르므로 필연적으로 모든 치료 전략은 달라야 한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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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맥락은 대체로 나이에 단서를 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맥락에 놓일 때, 무의식적으로 위축되어 주어진 가능성보다 열등한삶으로 이끌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최대한 우리에게 이로운 단서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

- 특히 나이에 따른 사회적 고정관념이 매우 확고한 우리나라에서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다. 노년의 단서를 매우 미세한 눈으로 샅샅이 찾아내 집어내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주어진 가능성보다 열등한 삶에 이끌리는 상황에 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20대 초반부터 장난처럼 ‘나 늙었어‘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 25살이 되면 ‘나이에 맞게‘ 어딘가에 자리 잡기 시작해야 할 것 같은 불안이 들고, 30이 되기 전부터 얼굴에 있는 작은 주름들까지 노년의 단서로 끄집어 내는 사람들. 젊어지기 위해 갖가지 노력과 방법을 동원하지만 자신이 가진 젊음은 누구보다 포착하지 못하는 사람들. (물론 나도 거기에 속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가벼운 마음으로 ‘나이 먹었어‘, ‘예전 같지 않다‘라는 농담을 내뱉더라도 그것이 반복되면 어느새 무의식에 자리해 스스로의 가능성을 묻어버리고 열등한 삶을 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된다. 노년의 단서를 찾지 말고 젊음의 단서를 찾자. 그게 나를, 우리를 보다 주체적으로 살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Q. 나의 젊음의 단서 하나를 찾아본다면?


- 나의 젊음의 단서 하나는...타자 치는 게 빠르다는 거ㅎㅅㅎ

생각을 실험하기 위해 우리는 조기 탈모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대머리는 노년의 단서이므로 일찍 대머리가 되는 남자들은 스스로 더 늙었다고 여길 수 있다. 결과적으로, 더 빨리 나이 들어갈 것을 예상할 수도 있다. 우리는 대머리가 아닌 남자들에 비해 조기 탈모로 대머리가 된 남자들이 전립선암과 관상동맥 심장 질환으로 진단받을 위험이 더 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결과를 전하면 사람들은 조기 탈모로 대머리가 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호르몬 차이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몇몇 의학 전문가에게 조기 탈모와 전립선암 사이의 관계를 물었을때, 그들 중 아무도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했다.
다음으로 우리는 아이를 늦게 가진 여성들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젊은 단서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더 오래 살 것이라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찍 아이를 낳은 여성들보다 늦게 낳은 여성들의 평균 수명이 더 길었다. 어떤 연령대든 아이들을 기르며 겪는 심신의 소모를 고려한다면, 반대의 결과를 예상하기 십상인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배우자와의 나이 차이가 4살 이상인 부부와 그미만인 부부를 비교했다. 전자의 경우 어린 배우자는 나이 많은 배우자가 제공하는 ‘더 나이 든‘ 단서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수명이 더짧을 테지만, 나이 많은 배우자는 어린 배우자의 ‘더 어린‘ 단서에 사전자극되어 수명이 길어지리라 예상했다. 예상대로 우리는 상대보다 현저히 어린 배우자의 경우 훨씬 나이가 많은 쪽의 배우자보다수명이 짧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특정 맥락은 대체로 나이에 단서를 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맥락에 놓일 때, 무의식적으로 위축되어 주어진 가능성보다 열등한 삶으로 이끌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최대한 우리에게 이로운 단서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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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 플라시보 효과와 노시보 효과를 보며. 누구든 즐겁고 행복하게 윤택한 삶을 누리고 싶을 것. 그럴 거면 어떤 일을 하든 긍정적 기대를 안고 하는 게 나에게 유리한 것.

- 호텔 객실 청소원들이 자신들의 일을 운동이라고 ‘인식‘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4주 후 ‘신체적 변화‘가 두드러지게 일어났다. 이는 정신, 인식이 실제로 신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슨 일을 하든 이것이 쓸모 없고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무슨 일을 하든 나에게 도움이 되고 무언가라도 얻어가려는 사람의 삶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플라시보 효과는 우리 대다수가 깨닫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다양한 영향을 미친다. 가짜 옻나무에 노출된 사람들에게는 진짜 발진이 생겼으며, 위약 카페인을 섭취한 사람들은 운동 능력 및 심박수가 높아지는 경험(피험자들이 카페인의 효과라고 믿는 다른 효과까지 포함해)을 하는 것으로 관찰되었다.
허버트 벤슨(Herbert Benson)과 D. P. 맥칼리 주니어(D. P. McCalie Jt)는 협심증(극심한 흉통의 일종)에 몇 가지 플라시보 같은 치료의 유효성을 연구했고, 환자들이 실제로 치료 요법을 믿었을 때는 70퍼센트에서90퍼센트의 효과가 있었던 반면에 어떤 형태로든 회의적이던 사람들에게는 30퍼센트에서 40퍼센트만이 효과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 P196

어빙 커시(Irving Kirsch)와 가이 사피르슈타인(Guy Sapirstein)은 항우울제 복용에 대한 분석을 실시한 적이 있다. 2,318건의 분석 결과, 환자 가운데 25퍼센트는 실제 약물 효과에 반응을 보였고, 25퍼센트는우울증의 자연스러운 진행 덕분이었으며, 50퍼센트는 플라시보 효과 때문이었음을 확인했다. 다른 연구들도 의사가 처방한 약물과기타 치료법의 효능이 플라시보 효과 때문일 수 있는 경우가 65퍼센트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플라시보 효과가 건강 증진에 놀라우리만치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입증되기는 했지만, 이 효과 역시 사전자극과 마찬가지로 양날의 검을 내포한다. 부정적인 기대감이 환자에게 부정적인 결과로 확인되는 경우 플라시보 반응은 역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이런 효과를 ‘노시보‘ 현상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암 진단 과정에서 미국인들이 지닌 가장 일반적인 사고방식은 암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확신이다. 암이 아직 신체 기능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더라도 암으로 진단받은 사람이 본인을 건강한 사람으로 여기기는매우 어렵다. 동시에 아직 암으로 진단받지 않았으므로 스스로를 건강하다고 여기며 돌아다니는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악성 종양으로‘ 진단받은 환자들은 실제 병의 진행 과정과 상관없이 쇠약해지기도한다. 죽음에 대한 단순한 예상만으로도 그런 결과를 촉진시킬 수있는 것이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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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말이 정신을 지배한다.

- 조건부 언어가 불러 일으키는 창의적 사고
: 글을 쓸 때 피해야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표현들이 있다. ‘내 생각에는~‘, ‘~인 것 같다‘, ‘~라고 볼 수 있다‘, ‘~라고 생각한다‘, ‘~라고 할 수 있다‘ 등. 이런 표현들은 신뢰성을 떨어트린다는 이유로 지양된다. 이런 표현은 모두 ‘~이다‘라고 바꾸도록 유도된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이러한 조건부 언어를 새롭게 보게 한다. 어쩌면 우리나라의 경직된 사고는 자기주장만을 강하게 표현하게 하는 언어사용방식과 연결되어있지 않을까. 자기도 확신을 덜 가지면서 괜히 있어 보이려, 신뢰성을 얻으려는 얕은 전략으로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좀 더 언어 사용에 있어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언어를 들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첫 번째 연구에서는 도시 개발에 관한 교과서의 일부를 조건부로바꾸었고, 두 번째 연구에서는 심폐소생술 교육을 위해 기획된 교과서를 조건부로 바꾸었으며, 세번째 연구에서는 조건부 진술과 절대적 진술이 기재된 이름표(이를테면 "이것은 애견용 치아 장난감으로 사용될 수있습니다" "이것은 애견용 치아 장난감입니다")가 달린 물체를 보여준 뒤실험 참가자들이 얼마나 창의적으로 이용하는지 실험했다. 조건부로 제시받은 참가자들은 그 정보를 고민하며 창의적으로 이용했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으면 위험하다고 말한다면 당연히 스트레스가 뒤따를 것이다. 높은 콜레스테롤 수치가 위험할 수 있음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스트레스를 덜 받겠지만 아무 말도 듣지 않았을 때보다 건강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조건부 언어를 사용하면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 좀 더 의식을 집중할 수 있다. 물론 말하는 이의 태도와 상관없이 듣는 사람으로서 조건부로 알아들을 수도 있다. 언어와 경험은 똑같은 것이 아니며 차이보다 유사성에 중점을 둔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비슷하게 묘사하더라도 나의 건강상 경험은 나라는 개인의 고유한 것임을 깨달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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