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이 챕터에서 샌델은 능력주의 도덕의 역사를 나름의 관점으로 설명한다. 특징적인 것은 그가 능력주의 도덕의 역사를 기독교에서부터 찾았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토대가 기독교에 있으며, 능력주의를 정당화했던 많은 권력자의 입장의 토대가 기독교적 섭리론(내 생각에는 왜곡된 기독교적 입장)에 기초해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샌델은 먼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의 신, 즉 인간이 선한 행위를 하면 그에 따른 상을 주고 악한 행위를 하면 벌을 주는 신의 모습을 간단히 짚고(이를 그는 능력주의 신학이라 부른다. 인간의 행위에 따라 응보적으로 상벌을 받는 것이기에), 이후 <욥기>에서의 신, 즉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한 신의 모습을 짚으며(욥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무자비한 벌을 받는다.) <욥기>에서의 신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나타난 능력주의의 신학에서 급격히 이탈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것이 그가 첫 번째로 말한, 성서에 나타나는 능력주의에 대한 상반된 입장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게 있다. 내가 보기에 이는 성서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 샌델은 성경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마치 신의 모습이 성경 안에서 모순적으로 그려진 것인 마냥 대립시켰다. 이는 먼저, 근본적으로 욥기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근거한다. 욥기에서의 하나님은 단순히 창세기와 모순되는, 선악에 따라 상벌을 내리지 않고 제멋대로 하는 신이 아니다. 욥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결점 하나 없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일지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함 존재라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사람도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으며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점이 욥기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신은 인간과 차원적으로 구별되는 존재로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존재임을 드러내는 책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은 능력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주의를 다루는 차원의 상위에서,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죄성을 논하는 책인 것이다. 따라서 욥기에서의 신을 창세기 출애굽기에서의 신의 모습과 비교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것을 비교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또 하나, 과연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신학을 능력주의 신학이라 칭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에 대한 샌델의 주장부터 먼저 살펴보자.
˝성서적 관점의 두 가지 특징이 오늘날의 능력주의와의 유사성을 드러낸다. 우선 인간의 능력에 대해 한껏 강조한다. 또한 불운한 사람들에 대해 둘 다 냉혹하다. 다른 점이라면 오늘날의 능력주의가 인간의능력과 의지에 중점을 두는 반면, 성서적 능력주의는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린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상과 벌을 나눠주는 주체는 신이다. 홍수든 가뭄이든, 아니면 가뭄 끝의 단비는.
하지만 신이 인간의 선에 상을, 악에 벌을 내리느라 눈코 뜰 새 없다는 것은 너무 인간중심적인 시각이다. 역설적으로 신은 우리에게 구속받게 되며, 신이 정당한 이상 우리에게 응분의 대가를 내려야만 하게된다. 신이 상벌의 주체라 하지만 그는 각자의 실적에 따라 처리할 뿐 임의대로 행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신 앞에서라도 인간은 자기가 받을 것을 받으며 따라서 자기 운명에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 p.
나는 여기서 두 번째 문단에 주목하고자 한다. 샌델은 하나님이 인간의 선에 상을 주고 악에 벌을 준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신이 인간의 행위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존재가 됨으로써 신이 인간에게 구속받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너무 인간중심적인 시각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자체가 인간중심적인 생각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샌델이 표현한 것처럼 ˝인간의 선에 상을, 악에 벌을 내리느라 눈코 뜰 새 없˝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없어도 그 자체로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이다. 인간과 모든 세계를 주재하는 존재로서 오로지 그 자신이 기준이 되어 의로 이끄는 존재이다. 신은 절대로 인간에게 구속받을 수 없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 상벌을 내리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이미지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능력(행위)가 신의 행동을 좌우한다는 능력주의 신학으로의 해석은 주객전도된 잘못된 해석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모든 게 다 운명이다 라는 게 아니다. 자유의지가 없든 있든 간에(지금의 대부분의 신학은 자유의지가 있다고 본다) 신은 인간과 구분되어 자존하며 인간의 기준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자신의 기준으로 심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을 오해한 채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인간의 능력주의적 관점을 드러내고, 성경은 이를 그 안에서 번복하면서 그 자체로 모순인 책이다라는 관념을 형성하게 하는 점이 우려스러웠다. 실제로 이런 책을 통해 성경의 내용 일부를 접하고 잘못된 관념을 형성하는 사례들이 많기 때문에 더욱이 그랬다. 그래서 한번 적어보고 싶었다.
다시 챕터2 내용으로 들어가보면, 이후 그는 기독교의 중요한 주제인 ‘구원’에 대한 논쟁이 세월을 거쳐 칼뱅에 이르러 능력주의적 사고에 적합한 윤리를 장려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능력을 다해 직업 행위를 함으로써 결실을 맺는 것을 구원의 표증으로 여기게 함으로써 능력주의적인 섭리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면 타당하다. (베버에 따르면) 칼뱅의 예정설과 직업소명설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했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성어거스틴)에서부터 루터, 칼뱅에 이르기까지 구원이 ‘신의 은총‘이냐 ‘율법준수와 선행으로부터 오는 자기구제‘이냐라는 질문에는 공통적으로 전자를 택했다. 그런데 이제 칼뱅이 구원의 표증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서 직업행위와 그 결실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근면성실함으로 얻은 부와 소유들을 구원의 표증, 신의 축복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여기서 내가 짚고 싶은 것은 이러한 논쟁이 기독교 자체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에 가깝고,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서 사회에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라고 보는 게 맞다. 심지어 구원과 자기구제에 대한 논쟁은 성서 속 초대교회에서도 비일비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논쟁이 없고서야 사도바울이 그렇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반복적으로 외쳤을까. 아무튼 기독교 교리 자체와 그를 이해하는 데서 발생하는 서로 다른 입장들을 구분했으면 좋겠다. (저런 내용들을 읽고 나서 너무나 쉽게 기독교는 틀렸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보면..ㅎ 샌델에 따르면 이러한 기독교적 토대는 미국의 건국부터 클린턴,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역의 능력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부와 건강함을 신의 섭리로 인식하게 만들고 자신들이 펼치는 모든 정책의 정당성을 “정의로 향하는 것”이라는 신념에 근거하게 했다. 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미국은 선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라는 문구(아이젠하워가 토크빌에게서 잘못 인용한 말. 미국인의 기본적 의식으로 많이 깔려 있다고 함.)이다. 그러면서 샌델은 이러한 섭리론, 즉 “우리가 부유하고 건강한 것은 우리가 선하기 때문에 받은 신의 축복이다”라는 섭리론이 지금의 능력주의를 정당화하는 토대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챕터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걸렸던 점은 성서에 대한 잘못된 이해였다. 이에 따라 이 챕터를 읽는 비기독교인에게 성경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심겨질 수 있겠다는 우려도 함께 들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좀 길게 썼다. 그렇다고 내가 이 챕터 전체에 공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챕터의 전체적인 흐름이나 현재 왜곡된 기독교적 섭리론이 능력주의를 정당화해왔던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공감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우리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까지의 한국 교회들을 보면 이러한 능력주의, 번영 복음주의가 많이 있었다. 조금씩 이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생기면서 변화하고 있지만 사실 지금도 많다. 가장 단적인 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를 나는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적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하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그 뜻에 따라 살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전 말씀들까지 포함하면 이렇다.
(빌립보서 4장 / 개역개정)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런데 이런 말씀을 한 줄만 따로 빼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식으로 정말 많이 해석한다. 결국 이는 본래의 의도가 아닌 제 입맛에 맞춰 성경을 사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무튼 어쩌다보니 또 길게 썼는데 이만 힘드니 여기서 끝.
오늘의 교훈. 잘 읽자. 의도를 잘 파악해서 읽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