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회적 상승을 어떻게 말로 포장하는가

- 시장 메커니즘과 함께 능력주의는 잔재해있던 신분, 인종, 경제적 차이, 성별 등으로 인한 계급을 타파하고 능력이 있는 누구나 시장에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점에서 공정성과 생산성이라는 원칙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진보주의자들은 ˝제3의 담론도 내놓았다. ..즉 사람들이 오직 노력과 재능으로만 시장에 성과를 내밀 수 있다면 그것은 능력에 따른 자연스러운 서열화를 이루리라는 것이었다.˝

이에 드러난 부정적 성격은 다음과 같다.
1. 책임을 강조함으로써 복지국가 개념에 의문을 제기하고 관련 리스크 부담을 정부와 기업에서 개인으로 옮기려는 태도
2. 사회적 상승에 대한 언어적 포장: 열심히 일하고 규칙대로 행동하면 누구나 자기 재능과 희망이 허용하는 한 사회적 상승을 할 수 있으리라는 약속
=> 이것이 능력주의에 대한 포퓰리즘의 반격을 초래하였다.

˝대통령 가운데 ˝그 자신의 실수가 아닌 일로˝라는 표현을 처음 쓴 사람은 캘빈 쿨리지, 그리고 허버트후버였다. 이는 철저히 개인에게 책임을 돌리는 내용이었다. 누군가가가난하거나 병 들었다면 그것은 그들의 잘못된 선택 때문이며, 정부 도움을 기대하지 말고 스스로 지켜야 한다는 주장 도중에 사용된 표현이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도 이 표현을 가끔 썼다. 하지만 그의 경우 대공황으로 일자리를 잃은 사람에게 ‘스스로의 잘못으로 그랬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 도중에 언급된 것이었다.˝
정부의 역할을 줄이려고 했던 로널드 레이건은 이 문구를 그의 어떤선임 대통령들보다 많이 사용했다. 그러나 그 후임인 두 사람의 민주당대통령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는 레이건보다 두 배나 많이 사용했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레이건처럼 은연중에 도움 받을 자격이 있는 가난한 사람과 그런 자격이 없는 가난한 사람을 구분했다.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힘에 맞서 싸우는 사람은 정부 보조를 받을 만했다. 다만 불우해서 가난해진 사람은 자격이 없었다.˝
- 정부 보조 여부를 결정함에 있어 개인의 노력, 의욕 이런 것들을 확인하는 것은 어느 정도 타당한 부분이 있다고 본다. 다만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그것들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그 외의 요소들을 전부 무가치한 것으로 치부해버렸다는 것일 테다. 정치인들은 그것이 하나의 정치적 전략이었겠지만 이것은 모든 사회 구성원의 인식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다보니 ‘아무 이유 없이‘ 지원하는 것은 세금 낭비라는 말이 쉽게 나온다. 정부 지원 결정 과정에 포함되어야 할 ‘이유‘에는 개인의 능력 요소만이 들어간다. 능력이라는 건 매우 우연적인 요소들의 결합 결과이고, 하물며 능력을 얻기 위해 노력할 힘마저 그 주변 환경이나 천부적 재능과 같은 요소들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것을 간과한 채 말이다. 참 어려운 것 같다. 그 중심을 잡는 게 참 어려운 것 같다.


고등교육에 관한 오바마의 말
˝가장 중요한 점은 명석하고 동기부여가 잘 된 청소년들에게, 그들의 재능이 그리고 그들의 직업윤리와 꿈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 요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고민해서 써 보기

-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
: ˝레이건 이후 ˝자격이 있다˝는 말은 당파를 불문하고 대통령들의 상투적 문구가 되었다. 클린턴은 이 말은 레이건보다 두배 더 썼다. 오바마는 세배였다. 그 맥락은 일상적인 언급에서부터 의미심장한 발언까지 두루 걸쳐 있었다. 클린턴은 국방부 산하 센터를 유치해 일자리 창출이 기대되는 한 도시에서 연설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받았습니다.˝ 오바마는 도매 상점 노동자들과 간담회를 하며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땀흘려 일한 이상 그의 마땅한 급료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오하이오에 개방 대학에서 연설할때 오바마는 중산층에 대한 감세를 옹호하면서 말했다. ˝여러분은 세금우대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도움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이죠.˝
˝영국에서는 1990년대 토니 블레어의 의해 제창된 능력주의 신념이 계속 영국 정치를 휘어 잡았다. 심지어 브렉시트 국민투표 뒤에도 말이다. 2010년 수상에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테레사 메이는 ‘영국을 진정으로 능력주의화하는 비전‘을 내세우면서 ‘보통 사람들, 노동계급‘이 그 주인공이라 했다. 그녀는 그들은 더 나은 조건에서 일할 자격이 있다고 밝혔다. 그녀가 제시한 더 나은 조건이란 바로 능력주의 원칙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었다.˝

- 일반적인 믿음과 달리 독일, 스페인,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스웨덴, 캐나다, 핀란드, 노르웨이, 덴마크보다 미국에서 부나 가난의 대물림 현상이 더 자주 일어난다. 미국과 영국에서는 부모의 부가 자녀에게 고스란히 이어지는 일이 거의 절반에 이른다. (이중 덴마크가 이동성이 가장 크다.)

- 힐러리와 트럼프의 대결에서 트럼프가 승리한 이유
˝힐러리 클린턴의 불운이랄까. 사회적 상승에 관한 담론은 2016년 그 추진력을 잃어버렸다. 그녀를 누른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는 사회적 상승에 대한 이야기나,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내가 아는 한 트럼프는 유세 기간 중 이 구호를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또한 그는 대통령이 되어서도 이런 이야기를 일절 안 했다. 대신 그는 승자와 패자에 대한 거친 발언을 내놓으며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노라˝고 했다. 그러나 그가 말한 위대함의 비전은, 지난 40년간 미국에서 활발한 공적 담론을 일으켰던 능력주의적 기획과 아무 상관이 없다.
사실 능력주의 엘리트에 대한 포퓰리즘적 반감이 트럼프 당선과 그해 초 영국에서 예상을 깨고 이루어진 브렉시트 표결에 일정한 역할을했다고 믿을 이유가 있다. 선거는 복합적 이벤트이므로 어떤 일이 투표자의 표를 이끌어냈는지 확실히 알기 어렵다. 그러나 트럼프와 브렉시트 그리고 다른 나라들의 포퓰리스트 정당들에 표를 던진 많은 노동계급 사람들은 사회적 상승에 대한 약속보다는 국민 주권 원칙의 재확인, 국가 정체성과 국가적 자존심 등의 강조에 동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장주도적 세계화를 환영하면서 그 이익 대부분을 챙기고 노동자들을 외국 노동자들과의 경쟁에 내몬 장본인들, 동료 시민들보다는 세계 각지의 엘리트들과 더 가까워 보이는 능력주의 엘리트, 전문가, 전문직업인 계층에 대해 분노를 표출한 것이다.
기존 질서에 대한 포퓰리즘적 증오가 꼭 능력주의적 오만에만 맞춰진 것은 아니었다. 외국인혐오증, 인종주의, 다문화주의에 대한 적대감 등도 한몫했다. 그러나 포퓰리즘의 반격에 있어 적어도 일부는 능력주의 위계질서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는 자들이 그들보다 덜 성공한 자들을 깔보고 있다는 인식에서 촉발되었다. 이런 포퓰리스트들의 불만은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수십 년간 능력주의 엘리트들은 ‘규칙을 지키며 열심히 일하는 자는 누구나 자기 재능이 허용하는 한도까지 성공할수 있으리라‘고 주문을 외워댔다. 그들은 바닥에 묶여 있는 사람들 또는 물 밑으로 가라앉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의 사정을 챙기지못했다. 사회적 상승의 담론은 그런 이들에게 있어 약속이라기보다는조롱이었다.(p.123-124)˝
-우리나라가 많이 생각난다. 이때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까.

먼저 나는 이 현상이 학생들의 성장 연령대가 로널드 레이건 시대이고 따라서 당시 유행한 개인주의 철학에 물 들었기 때문 아닐까 하고생각했다. 그러나 그 학생들 대부분은 정치적으로 보수주의적이지 않았다. 능력주의적 직관은 정치적 성향을 불문하고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 직관이란 대학 입학에서의 소수집단우대정책과 관련된 토론에서 특히 강하게 불거졌다. 소수집단우대정책에 찬성하는 학생이든 반대하는 학생이든 ‘나는 죽어라 노력해서 하버드에 왔으며 따라서 나의지위는 능력으로 정당화된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들이 운이나 기타의통제 불가능 요인으로 입학한 게 아니냐는 말에는 거센 반발이 일었다. - P107

내가 대학생들 사이에서 능력주의 정서를 느낀 것은 미국에서만이아니다. 2012년 나는 중국의 남동쪽 해안 지역에 있는 샤먼대에서 강연을 했다. 강연 주제는 ‘시장경제에 대한 도덕적 제한‘이었다. 최근의신문에서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사느라 자기 신장을 판 중국 10대 학생기사‘를 읽었던 나는 학생들에게 그 일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다. 뒤이은 토론에서 많은 학생들은 자유지상주의적 견해를 나타냈다.
그 10대 학생이 강압이나 협박에 의하지 않고 자유의사에 따라 자기신장을 팔기로 했다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 입장에 반대한일부 학생들은 가난한 사람의 신장을 사서 부자가 생명을 연장하는 일은 불공평하다고 주장했다. 강연이 끝난 뒤 한 학생은 내게 비공식적으로 답을 주었다. 부를 이룩한 사람은 그만한 능력을 입증한 것이며, 따라서 생명을 연장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후안무치한 능력주의 사고의 응용에 깜짝 놀랐다.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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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량하니까 위대하다‘ 능력주의 도덕의 짧은 역사

이 챕터에서 샌델은 능력주의 도덕의 역사를 나름의 관점으로 설명한다. 특징적인 것은 그가 능력주의 도덕의 역사를 기독교에서부터 찾았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의 토대가 기독교에 있으며, 능력주의를 정당화했던 많은 권력자의 입장의 토대가 기독교적 섭리론(내 생각에는 왜곡된 기독교적 입장)에 기초해있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다.
샌델은 먼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서의 신, 즉 인간이 선한 행위를 하면 그에 따른 상을 주고 악한 행위를 하면 벌을 주는 신의 모습을 간단히 짚고(이를 그는 능력주의 신학이라 부른다. 인간의 행위에 따라 응보적으로 상벌을 받는 것이기에), 이후 <욥기>에서의 신, 즉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한 신의 모습을 짚으며(욥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성실한 사람이었지만 무자비한 벌을 받는다.) <욥기>에서의 신은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나타난 능력주의의 신학에서 급격히 이탈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것이 그가 첫 번째로 말한, 성서에 나타나는 능력주의에 대한 상반된 입장이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게 있다. 내가 보기에 이는 성서에 대한 잘못된 해석이다. 샌델은 성경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마치 신의 모습이 성경 안에서 모순적으로 그려진 것인 마냥 대립시켰다. 이는 먼저, 근본적으로 욥기에 대한 잘못된 이해에 근거한다. 욥기에서의 하나님은 단순히 창세기와 모순되는, 선악에 따라 상벌을 내리지 않고 제멋대로 하는 신이 아니다. 욥기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아무리 결점 하나 없는 선하고 의로운 사람일지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불완전함 존재라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사람도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으며 모든 사람은 근본적으로 죄인이라는 점이 욥기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신은 인간과 차원적으로 구별되는 존재로서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존재임을 드러내는 책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책은 능력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능력주의를 다루는 차원의 상위에서, 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죄성을 논하는 책인 것이다. 따라서 욥기에서의 신을 창세기 출애굽기에서의 신의 모습과 비교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것을 비교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다. 또 하나, 과연 창세기와 출애굽기의 신학을 능력주의 신학이라 칭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이에 대한 샌델의 주장부터 먼저 살펴보자.

˝성서적 관점의 두 가지 특징이 오늘날의 능력주의와의 유사성을 드러낸다. 우선 인간의 능력에 대해 한껏 강조한다. 또한 불운한 사람들에 대해 둘 다 냉혹하다. 다른 점이라면 오늘날의 능력주의가 인간의능력과 의지에 중점을 두는 반면, 성서적 능력주의는 모든 것을 신에게 돌린다는 점을 들 수 있겠다. 상과 벌을 나눠주는 주체는 신이다. 홍수든 가뭄이든, 아니면 가뭄 끝의 단비는.
하지만 신이 인간의 선에 상을, 악에 벌을 내리느라 눈코 뜰 새 없다는 것은 너무 인간중심적인 시각이다. 역설적으로 신은 우리에게 구속받게 되며, 신이 정당한 이상 우리에게 응분의 대가를 내려야만 하게된다. 신이 상벌의 주체라 하지만 그는 각자의 실적에 따라 처리할 뿐 임의대로 행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신 앞에서라도 인간은 자기가 받을 것을 받으며 따라서 자기 운명에 책임져야 하는 것이다. ˝ p.

나는 여기서 두 번째 문단에 주목하고자 한다. 샌델은 하나님이 인간의 선에 상을 주고 악에 벌을 준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신이 인간의 행위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존재가 됨으로써 신이 인간에게 구속받게 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것이 너무 인간중심적인 시각이라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 자체가 인간중심적인 생각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샌델이 표현한 것처럼 ˝인간의 선에 상을, 악에 벌을 내리느라 눈코 뜰 새 없˝는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없어도 그 자체로 스스로 존재하는 존재이다. 인간과 모든 세계를 주재하는 존재로서 오로지 그 자신이 기준이 되어 의로 이끄는 존재이다. 신은 절대로 인간에게 구속받을 수 없다. 인간의 모든 행위에 상벌을 내리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이미지는 너무나도 인간적인 생각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능력(행위)가 신의 행동을 좌우한다는 능력주의 신학으로의 해석은 주객전도된 잘못된 해석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모든 게 다 운명이다 라는 게 아니다. 자유의지가 없든 있든 간에(지금의 대부분의 신학은 자유의지가 있다고 본다) 신은 인간과 구분되어 자존하며 인간의 기준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자신의 기준으로 심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분을 오해한 채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인간의 능력주의적 관점을 드러내고, 성경은 이를 그 안에서 번복하면서 그 자체로 모순인 책이다라는 관념을 형성하게 하는 점이 우려스러웠다. 실제로 이런 책을 통해 성경의 내용 일부를 접하고 잘못된 관념을 형성하는 사례들이 많기 때문에 더욱이 그랬다. 그래서 한번 적어보고 싶었다.


다시 챕터2 내용으로 들어가보면, 이후 그는 기독교의 중요한 주제인 ‘구원’에 대한 논쟁이 세월을 거쳐 칼뱅에 이르러 능력주의적 사고에 적합한 윤리를 장려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자신의 능력을 다해 직업 행위를 함으로써 결실을 맺는 것을 구원의 표증으로 여기게 함으로써 능력주의적인 섭리론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는 일면 타당하다. (베버에 따르면) 칼뱅의 예정설과 직업소명설은 근대 자본주의 정신을 형성했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성어거스틴)에서부터 루터, 칼뱅에 이르기까지 구원이 ‘신의 은총‘이냐 ‘율법준수와 선행으로부터 오는 자기구제‘이냐라는 질문에는 공통적으로 전자를 택했다. 그런데 이제 칼뱅이 구원의 표증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서 직업행위와 그 결실이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근면성실함으로 얻은 부와 소유들을 구원의 표증, 신의 축복이라 여기게 된 것이다. 여기서 내가 짚고 싶은 것은 이러한 논쟁이 기독교 자체의 논리를 무너뜨리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불완전한 인간들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에 가깝고, 기독교가 세계적인 종교로서 사회에 미친 영향이 크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라고 보는 게 맞다. 심지어 구원과 자기구제에 대한 논쟁은 성서 속 초대교회에서도 비일비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논쟁이 없고서야 사도바울이 그렇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반복적으로 외쳤을까. 아무튼 기독교 교리 자체와 그를 이해하는 데서 발생하는 서로 다른 입장들을 구분했으면 좋겠다. (저런 내용들을 읽고 나서 너무나 쉽게 기독교는 틀렸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다시 책으로 돌아와보면..ㅎ 샌델에 따르면 이러한 기독교적 토대는 미국의 건국부터 클린턴, 오바마에 이르기까지 미국 전역의 능력주의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람들로 하여금 많은 부와 건강함을 신의 섭리로 인식하게 만들고 자신들이 펼치는 모든 정책의 정당성을 “정의로 향하는 것”이라는 신념에 근거하게 했다. 이를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미국은 선하기 때문에 위대하다”라는 문구(아이젠하워가 토크빌에게서 잘못 인용한 말. 미국인의 기본적 의식으로 많이 깔려 있다고 함.)이다. 그러면서 샌델은 이러한 섭리론, 즉 “우리가 부유하고 건강한 것은 우리가 선하기 때문에 받은 신의 축복이다”라는 섭리론이 지금의 능력주의를 정당화하는 토대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챕터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걸렸던 점은 성서에 대한 잘못된 이해였다. 이에 따라 이 챕터를 읽는 비기독교인에게 성경에 대한 왜곡된 인식이 심겨질 수 있겠다는 우려도 함께 들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좀 길게 썼다. 그렇다고 내가 이 챕터 전체에 공감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 챕터의 전체적인 흐름이나 현재 왜곡된 기독교적 섭리론이 능력주의를 정당화해왔던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고 공감한다.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우리나라에도 적용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 전까지의 한국 교회들을 보면 이러한 능력주의, 번영 복음주의가 많이 있었다. 조금씩 이에 대한 비판적인 인식이 생기면서 변화하고 있지만 사실 지금도 많다. 가장 단적인 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를 나는 모든 걸 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적 시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 어떤 상황에서도 만족하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고 그 뜻에 따라 살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 전 말씀들까지 포함하면 이렇다.

(빌립보서 4장 / 개역개정)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런데 이런 말씀을 한 줄만 따로 빼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능력주의식으로 정말 많이 해석한다. 결국 이는 본래의 의도가 아닌 제 입맛에 맞춰 성경을 사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무튼 어쩌다보니 또 길게 썼는데 이만 힘드니 여기서 끝.
오늘의 교훈. 잘 읽자. 의도를 잘 파악해서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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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름표를 잘 붙이자.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는 게 아니다. 상대주의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러나 그만큼 허무하고 자기모순적이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고 얘기하는 건 논의의 발전을 불가능하게 만들며 회의주의에 빠지기 십상이다. 모든 것을 상대주의적으로 환원하여 생각하는 순간 남는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다. 진리 탐구를 포기하거나 속세를 떠나거나. 그러나 인간은 어디까지나 현실에 발 붙이고 살고 있으며 끊임없이 생각하는 존재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내가 경계하고자 하는 건 일상 속에서 개인의 무의식을 잠식하는 언어, 매체, 사회의 문화, 고정관념이다. 그러니까 세계의 상대성, 절대성과 다른 차원, 보다 몇 단계 낮은 차원에서의 주체성을 얘기하는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관 없이 모든 것을 용인하기보다 오히려 자기 주관이 뚜렷하게 서 있어야 한다. 깨어있자. 깨어서 주체적으로 파악하자.

이 연구에서 채노위츠와 나는 ‘크로모시도시스‘라는 가짜 병명을만들어 낸 다음 이 병이 청력을 떨어뜨릴 수도 있는 질병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이 장애의 여부를 실험할 예정이라고 알리고 증상이 적힌 소책자를 나눠 주었다. 이때 모든 참가자에게 똑같은 자료를 나눠 준 것은 아니다.
네 집단 중 세 집단에게 나눠 준 소책자에는 인구의 80퍼센트가이 장애를 갖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이 질병의 가능성을 참가자 자신과 좀 더 연결시키게끔 하려는 의도였다. 또한 크로모시도시스로진단받는 경우 스스로 어떻게 도울 것인지 방법을 생각해 보라고 그들에게 요청했다.
네 번째 집단이 받은 소책자에는 인구의 10퍼센트만이 걸리는 희소병이라고 적음으로써 질병과의 관련성을 덜 느끼도록 했다. 그들에게는 이 병으로 진단받으면 어떻게 대처할지 생각해보라고 요청하지 않았으므로, 우리의 가설에 따르면 네 번째 집단은 소책자에적힌 정보를 무심히 훑어볼 터였다.
그들은 실제로도 그러했다. 우리는 피험자 전원에게 크로모시도시스 진단을 위한 ‘청력 실험‘을 실시했다. 피험자가 정말로 크로모시도시스를 앓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려는 절차였다. 그러고 나서 소책자에 설명된 특정 장애를 알아보기 위한 일련의 후속 실험을 실시했다. 그 병이 자신과 별 관계없다고 여긴 사람들, 즉 무심한 독자들은 다른 집단과 마찬가지로 받은 특정 후속 실험에서 주어진 자료와 우리의 설명을 감안해 어떻게 질병에 대처할 것인지 생각하고 자신과 좀 더 관계있는 병이라 여긴 사람들에 비해 절반도 안 되는 성과를 보였다. 처음에 정보를 받아들인 방식이 나중에 그 정보의 사용 방식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 P231

아툴 가완디(Atul Gawande)는 자신의 저서 《합병증(Complications)》에서 의학을 "불완전한 과학, 끊임없이 변하는 지식의 기업, 불확실한정보와 실수투성이 개인"이라고 표현한다. 모든 개인은 다르고, 모든 병원체도 다르므로 필연적으로 모든 치료 전략은 달라야 한다. - P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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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맥락은 대체로 나이에 단서를 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맥락에 놓일 때, 무의식적으로 위축되어 주어진 가능성보다 열등한삶으로 이끌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최대한 우리에게 이로운 단서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

- 특히 나이에 따른 사회적 고정관념이 매우 확고한 우리나라에서 생각해볼 만한 지점이다. 노년의 단서를 매우 미세한 눈으로 샅샅이 찾아내 집어내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주어진 가능성보다 열등한 삶에 이끌리는 상황에 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20대 초반부터 장난처럼 ‘나 늙었어‘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 25살이 되면 ‘나이에 맞게‘ 어딘가에 자리 잡기 시작해야 할 것 같은 불안이 들고, 30이 되기 전부터 얼굴에 있는 작은 주름들까지 노년의 단서로 끄집어 내는 사람들. 젊어지기 위해 갖가지 노력과 방법을 동원하지만 자신이 가진 젊음은 누구보다 포착하지 못하는 사람들. (물론 나도 거기에 속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가벼운 마음으로 ‘나이 먹었어‘, ‘예전 같지 않다‘라는 농담을 내뱉더라도 그것이 반복되면 어느새 무의식에 자리해 스스로의 가능성을 묻어버리고 열등한 삶을 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된다. 노년의 단서를 찾지 말고 젊음의 단서를 찾자. 그게 나를, 우리를 보다 주체적으로 살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Q. 나의 젊음의 단서 하나를 찾아본다면?


- 나의 젊음의 단서 하나는...타자 치는 게 빠르다는 거ㅎㅅㅎ

생각을 실험하기 위해 우리는 조기 탈모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대머리는 노년의 단서이므로 일찍 대머리가 되는 남자들은 스스로 더 늙었다고 여길 수 있다. 결과적으로, 더 빨리 나이 들어갈 것을 예상할 수도 있다. 우리는 대머리가 아닌 남자들에 비해 조기 탈모로 대머리가 된 남자들이 전립선암과 관상동맥 심장 질환으로 진단받을 위험이 더 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결과를 전하면 사람들은 조기 탈모로 대머리가 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의호르몬 차이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하지만몇몇 의학 전문가에게 조기 탈모와 전립선암 사이의 관계를 물었을때, 그들 중 아무도 만족스럽게 설명하지 못했다.
다음으로 우리는 아이를 늦게 가진 여성들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들이 상대적으로 젊은 단서들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더 오래 살 것이라 예상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찍 아이를 낳은 여성들보다 늦게 낳은 여성들의 평균 수명이 더 길었다. 어떤 연령대든 아이들을 기르며 겪는 심신의 소모를 고려한다면, 반대의 결과를 예상하기 십상인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배우자와의 나이 차이가 4살 이상인 부부와 그미만인 부부를 비교했다. 전자의 경우 어린 배우자는 나이 많은 배우자가 제공하는 ‘더 나이 든‘ 단서에 둘러싸여 있으므로 수명이 더짧을 테지만, 나이 많은 배우자는 어린 배우자의 ‘더 어린‘ 단서에 사전자극되어 수명이 길어지리라 예상했다. 예상대로 우리는 상대보다 현저히 어린 배우자의 경우 훨씬 나이가 많은 쪽의 배우자보다수명이 짧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특정 맥락은 대체로 나이에 단서를 주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맥락에 놓일 때, 무의식적으로 위축되어 주어진 가능성보다 열등한 삶으로 이끌려서는 안 된다. 우리는 최대한 우리에게 이로운 단서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다. - P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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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 플라시보 효과와 노시보 효과를 보며. 누구든 즐겁고 행복하게 윤택한 삶을 누리고 싶을 것. 그럴 거면 어떤 일을 하든 긍정적 기대를 안고 하는 게 나에게 유리한 것.

- 호텔 객실 청소원들이 자신들의 일을 운동이라고 ‘인식‘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4주 후 ‘신체적 변화‘가 두드러지게 일어났다. 이는 정신, 인식이 실제로 신체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슨 일을 하든 이것이 쓸모 없고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무슨 일을 하든 나에게 도움이 되고 무언가라도 얻어가려는 사람의 삶은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플라시보 효과는 우리 대다수가 깨닫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다양한 영향을 미친다. 가짜 옻나무에 노출된 사람들에게는 진짜 발진이 생겼으며, 위약 카페인을 섭취한 사람들은 운동 능력 및 심박수가 높아지는 경험(피험자들이 카페인의 효과라고 믿는 다른 효과까지 포함해)을 하는 것으로 관찰되었다.
허버트 벤슨(Herbert Benson)과 D. P. 맥칼리 주니어(D. P. McCalie Jt)는 협심증(극심한 흉통의 일종)에 몇 가지 플라시보 같은 치료의 유효성을 연구했고, 환자들이 실제로 치료 요법을 믿었을 때는 70퍼센트에서90퍼센트의 효과가 있었던 반면에 어떤 형태로든 회의적이던 사람들에게는 30퍼센트에서 40퍼센트만이 효과가 있었음을 확인했다. - P196

어빙 커시(Irving Kirsch)와 가이 사피르슈타인(Guy Sapirstein)은 항우울제 복용에 대한 분석을 실시한 적이 있다. 2,318건의 분석 결과, 환자 가운데 25퍼센트는 실제 약물 효과에 반응을 보였고, 25퍼센트는우울증의 자연스러운 진행 덕분이었으며, 50퍼센트는 플라시보 효과 때문이었음을 확인했다. 다른 연구들도 의사가 처방한 약물과기타 치료법의 효능이 플라시보 효과 때문일 수 있는 경우가 65퍼센트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플라시보 효과가 건강 증진에 놀라우리만치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입증되기는 했지만, 이 효과 역시 사전자극과 마찬가지로 양날의 검을 내포한다. 부정적인 기대감이 환자에게 부정적인 결과로 확인되는 경우 플라시보 반응은 역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이런 효과를 ‘노시보‘ 현상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암 진단 과정에서 미국인들이 지닌 가장 일반적인 사고방식은 암이 곧 죽음을 의미한다는 확신이다. 암이 아직 신체 기능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더라도 암으로 진단받은 사람이 본인을 건강한 사람으로 여기기는매우 어렵다. 동시에 아직 암으로 진단받지 않았으므로 스스로를 건강하다고 여기며 돌아다니는 사람들 또한 존재한다. ‘악성 종양으로‘ 진단받은 환자들은 실제 병의 진행 과정과 상관없이 쇠약해지기도한다. 죽음에 대한 단순한 예상만으로도 그런 결과를 촉진시킬 수있는 것이다. - P1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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