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산의 죽음이 특히 안타까운 것은 그가 오랜 시련과 고통 끝에 이제는 죽음 이외에는 자신을 좌절시킬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완전한 자신감을 님 웨일스에게 자랑할 수 있는 단계에서 그 뜻을 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33살의 청년 김산이 님을 만나 이야기할 때 그의 숱한 동지들은 거의 다 죽어버린 때였다.

이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호가 "생활도 생산도 학습도 모두 항일유격대식으로!"이다.

유격대 국가라 불리는 이북처럼 역사가 과거의 영역에 머물러 있지 않고 현재의 정치와 사회문화의 구석구석을 지배하고 있는 경우 항일무장투쟁의 경험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이북을 이해할 수 없다.

6월4일 당일의 보천보전투에서 일본군이나 경찰은 한 명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 오직 민간인 두 명, 총소리가 나면 납작 숨었어야 하는데 이게 무슨 소란인가 하고 길에 나온 일본인 술꾼 하나가 유탄에 맞아 죽었고, 일본 순사의 부인이 갓난아기를 업은 채 꿩마냥 머리를 박고 숨었는데 등에 업힌 아기가 역시 유탄에 맞아 죽은 것뿐이다.

당시 일본군이 200만 명에 달했던 것을 고려하면 순수한 군사적 의미에서 보천보전투는 일본제국주의의 터럭 끝도 다치게 하지 못한 전투였다. 그런 보천보전투가 왜 김일성에게 엄청난 명성을 안겨다주었을까?

보천보를 들이친 것은 김일성이 이끄는 동북항일련군 2군6사였지만, 이 전투를 위해 1군2사와 2군4사 등 2개사단이 배합작전을 펼친 것이다.

보천보전투는 만주의 항일운동에서는 파탄 직전에까지 갔던 조-중 민중 간의 공동항일전선의 확고한 부활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기습작전을 마치고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대원들은 구령도 없이 흩어져 저마다 한 움큼씩 흙을 주워 배낭에 넣었다고 한다. 만주에서 낳고 자란 항일투사들, 또는 어려서 만주로 건너간 유격대원들에게 조국이란 그렇게 그리운 것이었다.

정치적 의미에서 보천보전투는 유격대의 총알이 미치지 못하는 곳까지 유격대의 존재를 알린 대사건이었다. 우리의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 독립군의 활동이 희미한 옛 기억으로 사라져가던 시기에 홀연히 나타난 김일성 부대의 총성은 그 뒤 반세기가 넘게 우리 역사에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김일성의 등장을 알리는 사건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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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에 섬감녕변구(陝甘寧邊區) 보안처에서는 김산 동지의 역사를 심사하였다. ‘반역자가 아닐까?’‘일제특무가 아닐까?’‘트로츠키파가 아닐까?’하는 많은 의문을 가지고 심사하였지만 결론을 내릴 만한 근거가 없었다. 이에 강생(康生·캉성)은 비밀리에 처단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김산 동지는 억울한 죽임을 당하였다. 그때 그는 33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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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주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가/ 외적의 앞잡이이고 수천 동포의/ 학살자일 때 양심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전선이다 무덤이다 감옥이다”라고 절규했다. 그의 수많은 옥중시들은 우유팩 위에 나뭇가지나 못조각, 손톱으로 꾹꾹 눌러 쓴 것이라 한다. 어느 사람에게는 갈 데가 못 되는 곳이고 또 어떤 시인에게는 있어야 할 곳이던 감옥에서 김남주는 이렇게 깨닫는다. “아, 그랬었구나/ 로마를 약탈한 민족들도/ 약탈에 저항한 사람들을 감옥에 처넣기는 했으되/ 펜과 종이는 약탈하지 않았구나 그래서/ 보에티우스 같은 이는 감옥에서/ 『철학의 위안』을 쓰게 되었구나”라고. 중세 암흑기에도 감옥에는 불이 켜져 있어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을 쓰고,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썼다. 차르체제하의 러시아에서도 시인과 소설가에게서 펜과 종이만은 빼앗아가지 않아 체르니셰프스키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썼고, 일제강점기에도 일제가 우리 말 우리 성까지 빼앗아갔지만, 감옥에서 펜과 종이만은 빼앗아가지 않아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썼고, 홍명희는 『임꺽정』을 썼다. 그래서 김남주는 “펜도 없고 종이도 없는 자유대한에서 그 감옥에서 살기보다는” 차라리 고대의 노예로, 중세 농노로, 일제치하에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절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감옥을 보면 사회가 보이는 법이다. 이런 기막힌 소망을 지닌 김남주 시인을 우리는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까? 독재치하에서는 바깥도 감옥이었다는 말로?

대한민국사 2 | 한홍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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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발:최근 공개된 자료들은 청와대 내의 한 창고에서 ‘발견’된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를 보면 정조의 화성행차 당시의 수라상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 반찬의 종류와 재료까지 꼼꼼히 기록한 기록문화의 왕국이었다. 그러던 나라가 어쩌다가 이런 귀중한 사료들을 먼지만 쌓이게 두다가 ‘발견’해야 하는가? 그리고 연구자들은 언제까지 우리도 틀림없이 갖고 있는 자료들을 보기 위해 미국의 아카이브(국립문서보관소)를 기웃거려야 하는가?

의병전쟁을 탄압하기 위해 세운 경성감옥은 서대문감옥, 서대문형무소, 경성형무소, 서울형무소, 서울교도소, 서울구치소 등으로 그 이름이 바뀌면서 1987년 11월 서울구치소가 의왕시 청계산 기슭으로 이전할 때까지 약 80년 간 한국의 대표적 교도소로 기능해왔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이 일제의 만행에 대한 고발현장일 뿐 아니라 독재의 만행에 대한 생생한 교육현장으로 탈바꿈하는 것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로의 이행이 충분히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김남주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가/ 외적의 앞잡이이고 수천 동포의/ 학살자일 때 양심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전선이다 무덤이다 감옥이다"라고 절규했다. 그의 수많은 옥중시들은 우유팩 위에 나뭇가지나 못조각, 손톱으로 꾹꾹 눌러 쓴 것이라 한다. 어느 사람에게는 갈 데가 못 되는 곳이고 또 어떤 시인에게는 있어야 할 곳이던 감옥에서 김남주는 이렇게 깨닫는다. "아, 그랬었구나/ 로마를 약탈한 민족들도/ 약탈에 저항한 사람들을 감옥에 처넣기는 했으되/ 펜과 종이는 약탈하지 않았구나 그래서/ 보에티우스 같은 이는 감옥에서/ 『철학의 위안』을 쓰게 되었구나"라고. 중세 암흑기에도 감옥에는 불이 켜져 있어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을 쓰고,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를 썼다. 차르체제하의 러시아에서도 시인과 소설가에게서 펜과 종이만은 빼앗아가지 않아 체르니셰프스키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썼고, 일제강점기에도 일제가 우리 말 우리 성까지 빼앗아갔지만, 감옥에서 펜과 종이만은 빼앗아가지 않아 신채호는 『조선상고사』를 썼고, 홍명희는 『임꺽정』을 썼다. 그래서 김남주는 "펜도 없고 종이도 없는 자유대한에서 그 감옥에서 살기보다는" 차라리 고대의 노예로, 중세 농노로, 일제치하에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절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감옥을 보면 사회가 보이는 법이다. 이런 기막힌 소망을 지닌 김남주 시인을 우리는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까? 독재치하에서는 바깥도 감옥이었다는 말로?

분단 이후 일제잔재를 더욱 악랄하게 발전시킨 강제전향제도를 이겨낸 비전향 장기수들에서 출소 이후 사망자를 포함한 총 94명이 산 징역 햇수를 합하면 모두 2,854년, 한 사람당 평균으로는 31년이다. 27년 간 징역을 살고 나와 세상을 놀라게 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도 이 땅의 비전향 장기수 집단에 데려다 놓으면 ‘반 평균을 깎아먹는’ 처지가 된다. 그만큼 오랜 세월을 이들은 0.7평 독방에서 보냈다.

세계 최장의 장기수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지닌 김선명 선생은 1951년 투옥되어 45년을 옥중에서 보내고서야 사회로 돌아왔다. 김선명 선생보다 며칠 앞서 투옥된 분으로 얼마 전 북에서 돌아가신 이종환 선생이 계셨지만, 김선명 선생보다 2년 먼저 출옥하셔서 김선명 선생이 그런 타이틀을 안게 되셨다. 만델라보다도 18년이나 더 징역을 사신 김선명 선생의 기록은 다른 나라에서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이지만, 그 기록이 45년에 멈춘 데는 또 다른 비극적인 이유가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직후 평택 이남의 좌익 재감자들이 모두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좌익수들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이 없었더라면 세계 최장의 장기수 복역기록은 어쩌면 반세기를 넘겼을지도 모른다.

전향이란 말은 원래 일본의 사상검사들이 우리나라의 사회주의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친 후쿠모도 가즈오(福本和夫)의 방향전환론에서 따온 말이다. 일본의 사상검사들은 좌익의 용어를 빌려서 변절이나 굴복과 같이 사상을 버리는 자들의 자존심을 거슬리게 하는 용어 대신에 그럴듯한 말을 만들어내 마치 이들의 생각이 바뀐 것이 상황에 대해 주체적인 대응인 양 호도했다.

항일영웅으로서의 김일성의 명성은 식민지 조선의 특수 상황 속에서 다분히 과장된 측면이 있다. 이 과장된 명성은 조선의 대중에게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널리 알려졌지만, 서구 연구자들이나 독자들에게는 생소했다. 그러나 분명 김일성은 식민지 조선의 대중에게는 다시없는 영웅이었다. 대중의 김일성에 대한 존경과 기대는 너무나도 컸다. 해방된 조선에서 만주벌판에서 백마를 타고 일제를 무찌르던 전설적 명장 김일성 장군의 업적을 의심하거나 그를 비난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었다.

1937년 7월 중국혁명의 수도 옌안(延安)이 지루한 장마를 겪고 있을 때, 님 웨일스라는 미국의 젊은 여류작가는 장명(張明)이라는 조선인 혁명가를 만난다. 수없이 일어나는 손의 경련을 참아가며 25명의 중국인 혁명가를 인터뷰하여 그들의 자서전을 썼던 님 웨일스는 옌안에서 자기말고는 유일하게 루쉰(魯迅)도서관에 소장된 영어 책을 집중적으로 빌려가는 이 미지의 인물에 호기심을 느낀 것이다. 어렵게 수소문해서 만난 장명에게서 님은 독특한 매력을 느꼈고, 장마로 길이 끊어진 김에 조선이라는 서구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나라에서 온 33살의 혁명가와 두 달 간 20여 차례에 걸쳐 집중적인 대화를 나눈다. 그 결과가 바로 김산(金山)과 님 웨일스의 공저로 1941년에 간행된 『아리랑Song of Ariran』이다.

김산이라는 이름은 이 책을 간행하기 위해 김산과 님 웨일스가 상의하여 부친 이름으로 금강산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본명은 장지락(張志樂), 최근에 그가 일본 경찰에 취조받을 때의 사진이 발굴되었는데, 그 사진에는 본명이 장지학(張志鶴)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혁명선배이자 친구가 되는 김약산(金若山=金元鳳)과 오성륜(吳成崙)을 만나게 된다. 김산 자신을 포함하여 당시의 테러리스트들 대부분은 톨스토이의 인도주의 사상에 심취한 톨스토이주의자들로서 김산은 이 모순을 "시대는 때로 가장 온화한 사람들 중에서 자기를 희생의 제물로 삼으려는 가장 열렬한 영웅을 만들어낸다"는 말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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