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가 노예 해방의 세기, 20세기가 보통선거권과 여성 참정권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성소수자들의 해방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땅에 만연한 무지와 편견, 차별과 배제에 시달리는 성소수자에게 동시대인으로서 미안함이 앞서기 때문이다. 또한 ‘한 사람이라도 자유롭지 못한 사회는 자유로운 사회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선한 사람의 무관심이 악을 키운다"는 18세기 영국의 보수주의 정치가 에드먼드 버크의 말을 내 가슴에 새기고 있기 때문이다.
법안 통과 직후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2019년 5월 17일 대만에서 사랑이 이겼다. 진정한 평등을 위한 큰 걸음을 내디뎠고 대만을 좀 더 좋은 나라로 만들었다."
북한에 대한 공포 마케팅을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해온 한국의 극우 세력은 공포의 대상을 이민자, 난민 등 외부자로 확장하여 혐오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이질적 내부자인 성소수자로 확장하여 "피땀 흘려 세운 나라, 동성애로 무너진다"는 공포의 구호를 낳는다. 이런 모습은 개신교의 확장성에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착한 방관자는 비겁한 위선자
"광주 사람은 소수민족인가, 이교도인가?"
1980년 5월의 일주일 동안, 프랑스 공영 티브이의 저녁 8시 뉴스는 광주 민주항쟁을 연일 톱으로 보도했다
뉴스를 접한 프랑스인의 반응 중 하나가 "광주 사람은 소수민족인가, 이교도인가?"였다. 그들의 눈에는 몽둥이로 두들겨 맞고, 두 손을 뒤로 묶여 굴비처럼 엮이고, 팬티 바람으로 트럭에 끌려가고, 마구 쏜 총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이 일반 시민일 수 없었다. 그보다는 한나 아렌트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자들"로 칭한 ‘파리아(pariah)’에 가까운 존재였다.
특히 혐오는, 전두환 무리가 그렇듯이, 탄압은 물론 살육까지 마다하지 않는 세력에게 양심의 짐을 없애준다.
9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아베 정권을 비롯하여 일본의 극우 세력이 과거를 부정하고, ‘위안부’ 문제에 사죄할 뜻이 없는 것도 ‘혐한(嫌韓) 감정’으로 양심의 짐을 벗어던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혐오의 정치가 정치에 대한 혐오감을 불러일으켜서 시민들을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결과적으로 혐오스러운 정치인이 정치를 계속 독점하게 하는 부수적 효과를 가져온다는 점을 놓쳐선 안 된다.
혐오는 가진 자, 힘센 자, 다수파가 없는 자, 약한 자, 소수파에 대한 차별, 억압, 지배를 관철시키는 감정기제로서 한쪽 방향으로만 작용한다.
"정치는 본디 고귀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사회적 연대의 실현을 기본 소명으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혐오 옆의 ‘착한 방관자’는 ‘비겁한 위선자’일 뿐이다. 많은 정치인들 사이에서 정치 지도자가 아쉽다.
오, 위대한 영이여! 내가 상대방의 모카신을 신고 1마일을 걷기 전에는 상대방을 판단하지 않도록 지켜주소서
우리는 우리 각자의 눈으로 사물과 현상을 본다. 예멘 출신 난민을 향한 혐오감정은 그들에게 투사된 우리 자신의 모습인 것이다. 거기에 담겨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한편에는 ‘지디피(GDP) 인종주의’가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언제나 소수자이고 약자인 그들에게 잠시 편견과 혐오감정을 내려놓고 눈길 한번 주면 안 될까. 인간은 감성을 가진 사회적 동물이기에, 사소한 냉대와 불친절을 당해도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을 갖는 반면, 한순간의 눈길 교환만으로도 상대방이 겪은 삶의 층위를 느끼고, 그 깊이와 폭에 대한 공감, 아니 공감까지는 아니더라도 신뢰를 느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나의 과거를 오늘날 보여주고 있는 당신들, 부디 꿋꿋하게 살아내시길…. 비록 소수지만, 제주도에서 "타자를 존중하고 타자와 윤리적 관계를 맺어야 ‘나’라는 존재의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말을 실천하고 계신 분들이 고맙기 그지없다.
다수와 소수의 관계가 서로 ‘다른’ 관계가 아닌 바름과 틀림, 정상과 비정상의 관계로 치환될 때, 다수는 다수에 속하는 것만으로도 바르고 정상인 자리에 서게 되고, 소수는 소수에 속하는 것만으로도 틀리고 비정상인 자리에 계속 머물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본디 소란스러운 것이라서 사회적 갈등이 공론의 장에서 표출·토론되고 조정되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더욱이 차별을 금지하는 것은 인권과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 아닌가.
확증편향에서 벗어나기. 그것은 나부터 ‘회의하는 자아’가 되는 것 말고는 달리 도리가 없다. 그런 전제 아래 어렵더라도 이웃을 설득하는 수밖에. 학교와 교실에서 생각하는 교육이 펼쳐지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회의하면서 전진하자!" 멕시코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의 구호였다. 개인도 사회도 운동도 회의하지 않으면 변화하기 어려우며 변화하지 않으면 전진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