쉽게 씌어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 P110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 P111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가까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란 배추꽃

삼동(三冬)을 참아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 아른, 높기도 한데... - P112

창공

그 여름날,
열정의 포플러는,
오려는 창공의 푸른 젖가슴을
어루만지려
팔을 펼쳐 흔들거렸다.
끓는 태양 그늘 좁다란 지점에서.

천막 같은 하늘 밑에서,
떠들던 소나기,
그리고 번개를,
춤추던 구름은 이끌고,
남방(南方)으로 도망하고,
높다랗게 창공은, 한 폭으로
가지 위에 퍼지고,
둥근달과 기러기를 불러왔다.

푸드른 어린 마음이 이상에 타고, - P113

그의 동경(憧憬)의 날 가을에
조락의 눈물을 비웃다. - P114



"이 개 더럽잖니"
아니 이웃집 덜렁수캐가
오늘 어슬렁어슬렁 우리집으로 오더니
우리집 바둑이의 밑구멍에다 코를 대고
씩씩 내를 맡겠지 더러운 줄도 모르고,
보기 흉해서 막 차며 욕해 쫓았더니
꼬리를 휘휘 저으며
너희들보다 어떻겠냐 하는 상으로
뛰어가겠지요 나ㅡ 참. - P116

울적

처음 피워본 담배 맛은
아침까지 목 안에서 간질간질타.

어젯밤에 하도 울적하기에
가만히 한 대 피워 보았더니. - P117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놈들의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시를 남기지 않았나? 일제 헌병은 동(冬)섣달의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조선 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만일 윤동주가 이제 살아 있다고 하면 그의 시가 어떻게 진전하겠느냐? 아무렴! 또다시 다른 길로 분연 매진할 것이다."

-- 정지용, 1947년 12월 28일 - P119

어머니

어머니!
젖을 빨려 이 마음을 달래어 주시오.
이 밤이 자꾸 서러워지나이다.

이 아이는 턱에 수염자리 잡히도록
무엇을 먹고 자랐나이까?
오늘도 흰 주먹이
입에 그대로 물려 있나이다.

어머니
부서진 납인형도 슬혀진 지‘
벌써 오랩니다.

철비‘가 후누주군이 나리는 이 밤을

1. 슬혀진 지: 싫어진 지.
2. 철비: 철따라 내리는 비. - P121

주먹이나 빨면서 새우리까?
어머니! 그 어진 손으로
이 울음을 달래어 주시오. - P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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