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 1500년 이후 300년 동안 세계 무역량이 20배 정도 성장한 데비해, 19세기와 20세기를 합치면 200년 동안1,600배(40배 × 40배)로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크게 성장했다. 그런데 20세기는 19세기에 비해경제 성장이 훨씬 크다. 이상의 여러 수치를 종합해서 해석하면 그 의미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첫째, 19세기 이후에는 지난 시대에 비해 무역이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둘째, 20세기와 비교해볼 때 19세기에 무역의 성장이 경제성장에 훨씬 더 큰 기여를 했다. 다시 말해 19세기는 세계 무역이 급성장하고 이것이 경제의거대한 도약을 가능케 한 시대다. 국제 무역의확대가 세계 경제를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시대는 19세기였다.
이 시기에는 토지와 노동이라는 생산요소의 부존도 차이에 따라 무역이 이루어진다는 고전적인 헥셔-올린(Heckscher-Ohlin) 법칙이 작동한 것이다.
고래잡이의 실상이 어떤지 실감나게 알 수있는 방법 중 하나는 소설 《모비딕》을 참고하는 것이다.
아르메니아계 터키인 칼루스트 굴벤키안(CalousteGulbenkian) 같은 ‘석유 거인‘들이 등장했다. 굴벤키안은 모술 지역 유전을 개발하여 엄청난부를 쌓았는데,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리스본에정착한 뒤 그동안 조성한 세계 최고 수준의 예술품 컬렉션을 기증하여 굴벤키안 박물관을 건립했다.
디젤엔진은 원래 석탄 가루를 사용하는 엔진이었지만, 재가 실린더와 피스톤을 더럽혀서 결국 석유 연료로 대체했다.(Rhodes)
1916년에는 사이크스-피코(Sykes-Picot)협정을 통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만제국 영토를 어떻게 분할할 것인지를 정했다(오늘날 중동갈등의 먼 원인으로 흔히 이 비밀협정을 지목한다). 페르시아만, 시나이반도 동부, 아나톨리아 남부 지역 등을 놓고 영국-프랑스 간 일종의 관할 지역을 정한 것인데, 당시는 정확한 석유 매장량파악이 힘들었기 때문에 클레망소는 모술 지역을 영국에 넘기는 데 쉽게 동의했다. 결국 영국이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18세기에 먼저 인도가 영국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인도(India)‘라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이 전체가 하나의 통합된 단위가 된 것은 이 지역의 오랜 역사의 산물이라기보다 역설적으로영국 지배의 산물이었다. 영국이 식민 지배를 한 지역 전체가한 단위의 국가로 만들어져 후일 독립했기 때문이다. 바꾸어 이야기하면 인도 전체가 통합성을 갖추지 못한 점이 침략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조지오웰은 영국의 특성으로 축구, 펍, 차 세 가지를 들었다.(Moore)
중국은 지대물박(地大物博, 땅이 넓고 물자가 풍부하다)하여 오랑캐와 물품을 교환할 이유가 없다는 건륭제의 답변이 그들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사절단은 굳이 와서 장사를 하려면 중국의 법규를 준수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즉각 추방한다는 내용의 칙서를 받고 영국으로 귀환하였다.
중국을 보고 온 매카트니의의견은 어땠을까? "중국은 여러 방면에서 서방 국가들에 비해낙후하며 청조는 외형은 강한 것같이 보이나 실은 부패가 심하고 쇠약한 나라이므로 일격에 공략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정수일, 221~222) 교역 특권을 얻는 데 실패한 후 영국이 생각해내 것이 아편이다.
인도의 식민지 총독 워런 헤이스팅스 (Warren Hastings)는 "아편은 파멸적인 사치품이다. 이것은오직 외국 무역의 대상으로서만 허가해야 한다. 앞날을 내다보는 정부의 과제는 국내 시장에서 아편을 추방해버리는 일이다" 라고 말했다. (쉬벨부쉬, 244) 그의 의견대로 영국은 부족한 결제 수단을 확보하기 위해 중국에 아편을 대량으로 수출하는 후안무치한 정책을 시행했다.
중국의 중체서용(中體西用), 한국의 동도서기(東道西器)에 대응하는 것이 일본의 화혼양재(和魂洋才)이며, 이것은 성공적인 문화 수용 전략이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 슬로건이 실제 서구 제도와 조직의 도입이나 기술의 도입과 개발 현장에서 어떠한역할을 했는가에 대해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화혼양재는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문화 수용의 지도 원리라기보다는 구호와 상징으로서 더 중요했던 것 같다. (한경구, 46)
영어의 ‘쿨리(coolie)‘는 힌두어 ‘kuli‘에서 나온 말이며한자로는 ‘고력(苦力)‘이라고 쓴다. 이 말이 쓰이기 전에는 ‘저자(猪仔, 새끼돼지)‘라고 불렀으며, 그래서 중국 노동자송출을 ‘돼지무역(pig trade)‘이라고도 한다. 중국 남자의변발이 돼지 꼬리처럼 생겨서 그런 말이 나온 듯하다.
일본은 현실과 괴리된 방향으로 가고 있었으니, 야마토(大和)호와 무사시(武蔵)호 등 괴물 같은 거대 전함을 건조했다. (Paine, L., 571) 소이탄을 발사하는 46센티미터(18.1인치) 주포는 당시까지 함선에 탑재했던역사상 최대의 함포였다. 이게 과연 전투에서 효율적이었을까? 야마토호에 탄 한 하급 장교는 이렇게 평했다. 세계사에 3대 바보짓이 있으니, 만리장성, 피라미드, 그리고 야마토호! 이 초대형 전함은 1945년 4월 7일 오키나와에서 출항했다가 미군 항공기 300대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 승무원 3,000여 명중270여 명만 생존하고 대부분 사망했다.
이제 세계의 역사는 다시 한 페이지를 넘겨새로운 시대로 들어갔다. 맥아더는 "지난 과거의 유혈과 학살에서 벗어나 더 나은 세계가 등장하리라는 진정한 희망"을 피력했지만 그런희망은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정반대 상황이 벌어진 듯하다. 새 시대는 평화의 시대가 아니라 여전히 참혹한, 그리고 아마도 훨씬 더 극심한 폭력의 시대로 들어갔다. 패권 경쟁의 틀이 바뀌고 더 심화되었다. 이제는 단지 바다 위에서 전투를 벌이는 정도를 넘어, 바다 속에서그리고 하늘과 우주에서 전투를 벌이고, 더 나아가서 바다를 통째로 지배하려는 단계로 들어가려 한다. 해양은 갈등의 장소로 변모했다. 20세기 후반 이후 세계는 ‘냉전과 열전 사이‘를 오갔다.
이 시기에 나온 군사·안보 개념이 상호확증파괴전략(Mutual assured destruction, MAD)이다. 상대방을 불신하고 증오하는 핵 경쟁의 시대에 강대국들은 그야말로 미친 경쟁을 하고 있었다. 1960년대 초에 미국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Strange McNamara)가 처음 사용한 이 용어는 강력한 무기를 사용하겠다는 위협을 통해 적이 똑같은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억제한다는 독트린을 가리킨다.
1886년 캐나다에서 잡은 바닷가재의 수는 9,000만 마리였다. (Earle, 95) 당시 미국에서는 죄수들에게 매일 바닷가재를 주어 한때 이것을 거부하는 폭동이 일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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