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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버스토리
리처드 파워스 지음, 김지원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2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대자연을 소재로한 이야기는 많다. 그 속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은 종종 숲에서 잃어버린 무언갈 되찾기도 하고, 거대한 자연 앞에 한없이 무력한 인간의 모습을 그리기도 한다. 그런데 나무에 관한 이야기는 무엇이 있을까. 인간의 깨우침을 위한 도구가 아닌 진짜 나무 이야기말이다.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스토리>는 세대의 세대를 거듭하며 땅 속 깊이 연결된 9명의 등장인물을 실제 역사적 배경에 바탕한 거대하고도 독창적인 서사의 탄생이다. 이것은 사라져가는 원시림을 보존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과 계속해서 가지를 흔들고 낮은 주파수로 말을 거는 나무와의 연대를 다룬 이야기다. 여기서 우린 잠시 무리에서 벗어나 주위를 둘러볼 필요가 있다. 당신이 익숙하다고 믿는 것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 눈을 감고 떠올려보라. 혜안이 필요한 때이다.
"그 사람들은 모든 답을 알아. 더 이상 어떤 것도 그들에게 해를 입힐 수 없지." p.54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방으로 뻗어나간 뿌리는 인물들을 연결시킨다. 한 세기가 넘도록 기록된 밤나무의 초상은 호엘가의 유산이다. 과거 전국에 몰아친 병충해에도 굳건했던 나무는 이제 사그라졌고 곧 사라질 집에 홀로 남은 '니컬러스'는 나무의 초상을 그림으로 옮길 뿐이다. 중국계 미국인인 '미미 마'에게는 아버지의 유산인 아라한 두루마리와 뽕나무가 세공 된 옥반지가 있고, 한때는 자신의 탄생목인 단풍나무를 사랑했지만 일찍이 인류의 유해성을 깨달은 '애덤 어피치'와 반얀나무에 목숨을 빚진 '더글러스 파블리첵'은 수없이 넘어지면서도 묘목을 심는 일에 매진하고, 외출 금지를 걱정하며 마지막 풍경을 감상하던 '닐리 메타'는 나무에서 추락해 하반신이 마비되는 사고를, 청각과 언어 장애를 가진 '패트리샤 웨스터퍼드'는 나무의 소통을 발견한 최초의 과학자로, 감전사에서 되살아난 '올리비아 밴더그리프'는 죽음 너머의 존재에게서 계시를 듣게 되면서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고, 책임감이 강한 '레이 브링크먼'과 자유를 갈망하며 도피기제를 보이는 '도러시 카잘리'는 자꾸만 어긋나는 그들의 관계처럼 무언갈 심기로 했던 기념일 약속을 묻어버린 채 기억하지 못한다.
순수를 떠나온 이들은 군중 속에 섞여 나무를 잊는다. 하지만 나무와 함께 자라온 이들에겐 아주 작은 기폭제로도 그들의 감각을 일깨울 수 있다. 가령 휴식처를 빼앗겼다는 사소한 분노 혹은 원대한 계시, 아니면 그저 이끌리듯 흘러들어온 이들이 생명보호군(LDF)으로 모여든다. 비폭력을 외치는 생명보호군들은 나무에 자신의 몸을 묶고 투쟁한다. 그러나 이건 선과 악의 대결처럼 보이지 않는다. 분명 거대 자본과의 싸움이지만 권력을 쥔 이들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나무를 베다 장애를 얻은 벌목꾼들이 자신들의 생업을 방해말라고 고함을 내지르는 장면은 무어라 선뜻 말을 하기 어렵다. 있는 힘을 다해 거세게 몸부림치지만 뭍에 있는 기득권자들은 눈조차 깜빡이지 않으니 힘 없는 자들끼리의 아우성이다. 상황은 점차 아비규환으로 변해가고 급기야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생겨난다. 폭력성은 언제나 인간의 것이고 나무는 늘 그렇듯 묵묵히 자리를 지킨다. 그들은 우리 도처에 있다. 원형의 모습이 아니더라도 모든 형태로 존재한다. 자각하지 못해도 우리는 그들에 많은 빚을 지며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나이테가 없다는 것. "우리는 십억 년 동안 지구가 모은 유대를 현금화하고 그것을 각종 사치품에 날리며"
더욱 깊은 망각에 빠진다.
반면 전면에 나선 LDF들과 달리 각자의 자리에서 몸통을 키우고 수관을 뻗어나간 이들이 있다. 여성 과학자로서 겪는 차별을 감내하고 대중의 멸시 속에서 연구를 멈추지 않던 패트리샤는 『비밀의 숲』을 출판하면서 세상에 충격을 안긴다. 닐리는 나무에게서 어떠한 계시를 듣고 게임 『지배』를 만들고 거듭 새로운 버젼을 출시하며 사람들을 열광시키지만 가상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움직일수록 그의 욕망은 되려 공허해질 뿐이다.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고 만들었던 코드는 이제 현실의 세계를 그대로 옮겨논 것과 다를바 없다. 그의 신탁나무조차 더 이상 아무런 말이 없다. 바로 그때 패트리샤의 책이 닐리에게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지구를 통째로 옮기려는 그의 원대한 장기 프로젝트는 '플레이어'가 아닌 '학습자'라 명명하며 사람들에게 스며든다. 반면 나무와 연관없어 보이던 브링크먼 부부는 레이가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많은 변화가 생긴다. 레이의 침상에서 보이는 잊힌 그들의 정원엔 한때 전멸했던 미국밤나무가 어느덧 생명을 드리우고 도러시는 그 경이로움에 하나 하나 배워나가며 훼손하려는 자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그들의 정원엔 위대한 유산이 생겨난다.
"스무
번의 봄은 순식간이다. 가장 더운 것으로 측정된 해가 왔다가 지나간다. 그리고 또 다른 해. 그리고 열 번이 더 지나가고, 거의
모든 해가 역사상 가장 더운 해로 기록된다. 해수면이 상승한다. 한 해의 시간조차 무너진다.스무 번의 봄, 그리고 마지막 봄은 첫
해보다 2주 빨리 시작된다." p.527
또 한 번의 나무를 심기 가장 좋은 시기가 지나갔다. 자신만의 나무로 숲의 이름을 짓고 뜨겁게 저항했던 이들은 흩어졌다. 그러나 늘 그렇듯 역사는 반복된다. 사람들은 또 다시 불을 지르고 얼마 남지 않은 원시림을 지키기 위해 저항한다. 그리고 외딴 곳에서 자신만의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파수꾼, 사라지는 숲에 고통에 차 소리치는 더그전나무, 사람들을 일깨우고자 스스로 훌륭한 이야기가 된 단풍나무, 나무의 방식으로 사람들을 치유하는 뽕나무, 그리고 노란 잎을 흔들며 어딘가에서 강인하게 자라났을 메이든헤어. 죽어가는 세상을 공포 속에 바라보는 성모를 목격한 패트리샤는 결코 독이 든 성배를 마시지 못했다. 작중 무수히 반복되는 죽음과 좌절. 인류는 나무의 세계에 막 도착한 '불법체류자'다. 터를 잃고 공항에서 살아가는 참새가 아닌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그러나 리처드 파워스는 숲이 모든 것을 자연의 일부로 포용하며 장애와 여성, 인종, 이민자를 아우르는 상생하는 삶을 우리에게 몸소 보여준다. 이야기를 읽으며 보게 된 무수한 나무의 모습은 나를 또 한 명의 학습자로, 마음에 종자가 내려앉은 듯 어딘지 뻐근한 기분을 느낀다.
자신의 앞날을 계획하는 인간을 두고 신이 비웃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런데 한낱 작고 무지한 이들이 숲을 구하겠다고 기꺼이 자신의 몸을 던진다. 신을 살리겠다는 인간의 오만. 그러니까 이 대장정에는 사실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셈이다. 나무들의 접촉은 구조 요청이 아닌 유전자의 4분의 1을 공유한 조상이 내미는 구원의 손길이었고 곧 멸종될 종은 나무가 아닌 그들 자신이었다. 장(章)이 바뀔 때마다 화자와 시공간이 모호한 이야기가 짧게 등장한다. 나무에 관해선 문맹인 감옥에 갖힌 남자의 모습은 애덤과 더글러스를 연상시키고 지친 모습으로 소나무에 기댄 여자는 미미의 마지막 등장과 겹친다. 얼마나 무수한 종자가 반복됐을까. "신호가 말한다. 좋은 답은 무에서부터 재창조할 가치가 있어, 다시, 그리고 또 다시." 아주 찰나의 시간이 지나면 그들은 다시 말을 걸어올 것이다. 그들의 후손이 뿌리내릴 때까지 다시, 또 다시.
"그들이 그녀에게 말한다. 희망을 갖거나 절망하거나 예측하거나 깜짝 놀란 모습을 보이지 마. 절대로 굴복하지 말고, 나뉘고, 증식하고, 변화하고, 결합하고, 행하고, 참아. 기나긴 인생 전체에서 해왔던 것처럼. 불이 필요한 종자들이 있어. 얼어붙어야만 하는 종자들도 있고. 삼켜서 위산에 부식된 다음 분변으로 나와야만 하는 종자도 있지. 싹이 트기 위해서는 부숴서 열어야만 하는 종자도 있고.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해도 어디든지 갈 수 있어." p.6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