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612의 샘 - 믿고 읽는 소설가 7인의 테마 소설집 창비교육 성장소설 3
고비읍 외 지음 / 창비교육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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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학교에 대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그려진 단편 소설집으로 『B612의 샘』을 비롯하여 이종산, 안세화, 고비읍, 조우리, 이꽃님, 허진희, 조규미 7명의 작가의 7개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이 이야기는 겉으로는 미래 학교의 형태나 교육의 방법의 변화를 보여주는것 같이 느껴질 수 있으나 결국은 인간관계 형성에 대한 이야기를 꼭 품고있다.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 아니 이 시기의 청소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또래집단의 형성'이다. 친구가 가장 중요하지만 그만큼 우정을 깊게 나눌 수 있는 관계 형성과 어울리고 다투는 일련의 과정들을 가장 어려워하는 시기이다. 같은 나이대라는 이유로 한 공간에 두지만, 같은 교육을 배울 뿐, 정작 '친구 사귀는 법' '다툴 때 화해하는 법' '우울한 친구를 위로하는법' '맞지 않는 친구를 대하는 법' '우정을 유지하는 법' '취미를 존중하고 공유하는 법' 등은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경험하면 나아지기 마련이다. 우리에게는 유소년, 청소년 시기라는 긴 시간동안 학교에서 다양한 경험과 관계를 쌓으며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들은 결국 미래의 아무리 고도화된 기술이 교육의 형태와 방법을 바꿀지언정, 아마 학교라는 공간 자체는 사라지지 않지 않을까 하는 가정에서 시작한다.


우리는 지난 2020년, 처음으로 맞는 감염병 시대를 보내며 아주 많이 당황했고, 그건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사상 처음으로 개학을 4번이나 미뤘고, 사상 처음으로 수능도 미뤘다. 개학 '연기'만을 외치던 교육부는 결국 사상 처음으로 공교육기관의 '온라인'개학이라는 방법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플랫폼이나 네트워크 구축이 잘 되어있지 않아 서버 폭주는 기본이었고, 출석체크랑 수업방향을 가다듬는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렸지만 우린 결국 적응하였고, 6월이 되어서야 전교생의 ½, ⅓의 등교를 부분적으로 허용하며 온오프라인 수업을 병행해가기 시작했다. 이듬해 2021년도에는 학년별 교차등교를 하며 온라인과 오프라인 수업을 병행했다. 플랫폼도 안정적으로 구축되기 시작했고 실시간 쌍방향 수업도 이제 익숙한 단어가 되었다.


다시 그 이듬해인 2022년, 이제는 익숙한 '온라인 원격 수업'은 '감염병'뿐만 아니라 '자연재해'에서도 유연하게 적용 될 수 있게되었다. 이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했던 일이였다. 감염병의 유행뿐만 아니라 태풍이나 홍수, 미세먼지나 황사 등의 자연재해로 학생들이 등교가 안전하지 못하다고 판단하는 경우 온라인 수업 전환이 자유로워졌고 학교장의 재량에 따라 수업 일수를 조정하여 아예 휴업하기도 한다. 이제 우리에게 '비대면' 수업이라는 말은 낯선 단어가 아니다.


온라인 수업 외에도 학교의 변화는 또 있다. 바로 학생수 감소로 인한 학급 인원수 감소 및 학급 수 감소이다. 예전에는 1학년 10반 37번 이라는 학번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기껏해야 한 학년에 3~4개반으로 구성되고 한 반학생들은 20명을 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학생수가 줄어들며 선생님 수도 줄어야 했으며, 빈 교실이 늘어났기에 교실은 교과교실제와 스마트 교실(전자 칠판과 학생 개인 패드 사용)화 되었다. 학교는 이렇게 사회 변화에 따라 함께 변화하고 적응하고 있다.

교육부에서 지난 4월 발간한 성과 자료집을 살펴보면, '코로나19 감염 예방', '초·중·고 온라인 개학' 및 '원격수업', '교육바우처', '무상교육' 및 '무상급식' , '돌봄서비스', '고교 학점제', '고교정보블라인드', '스마트 교실', '그린학교', '디지털 신기술 인재 양성 혁신 공유 대학' 등의 단어를 접할 수 있다.

세상의 변화에 따라 학교의 변화가 느린것은 사실이나, 더디게나마 미래 교육을 차근히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육부 자료에서 <미래교육체제로의 전환>부분을 살펴보면 이를 더 잘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미래의 변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나 더 해보자면, World Economic Forum (WEF, 세계경제포럼) 에서 제시한 '직업의 미래'라는 보고서에서 미래에 사라질 직업과 늘어날 직업에 관한 것이다. 2022년까지 약 7,500만여 개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2025년에는 기계(AI)가 전체 업무의 52% 이상을 맡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AI의 대체로 사라질 수도 있는 미래 직업들로는 제조업(로봇투입), 은행원(모바일거래), 부동산중개인(온라인거래), 금융애널리스트(딥러닝), 패스트푸드 음식점원(키오스크), 스포츠경기심판(비디오판독), 건설노동자(자동화 건설기계), 농부(자동화된 농기계), 텔레마케터(ARS서비스 자동화), 사서(무인서비스), 전투기조종사(무인항공기), 경비원(홍채인식과 지문인식으로 보안화), 영화배우(CG), 바텐드(로봇), 의사(자동화 검진 시스템), 경찰·형사(일부 기술 자동화), 변호사·건축가·회계사(컴퓨터 소프트웨어), 기자(빅데이터와 인공지능) 등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반면 새로생기거나 늘어날 일자리로는 인공지능·빅데이터 관련 전문, 3D프린터 관련, 신에너지 산업전문, 바이오헬스 전문, 고연령층대상 산업, 교육분야 등이다.

고도화된 기술을 다루는 직업군과, 인간다움이 발현되는 공감과 교감 및 관리가 필요한 분야, 그리고 아무리 학생수와 학급수가 감소해도 학생들에게 '배움'과 '소통'의 기회를 제공해야 하는 교육분야는 미래에도 사라지지 않을 직업군에 속해있다.


다시 책소개로 돌아와, 이 책에 수록된 7개의 단편들을 살펴보면 다 비슷한 설정들이 있다. 어쨌든 지금보다 적게는 20년쯤, 많게는 80년쯤 후의 미래 학교를 그리고 있고, 가상현실, 인공로봇 등 고도화된 네트워크 연결망이 구축되어 있다.

그러나 '학교'라는 이름과 공간(대면과 비대면의 차이는 있지만), 이것만큼은 어떤 이야기에도 바뀌지 않고 등장한다. 학교라는 공간 자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 '성인'으로 넘어가기 직전까지인 '청소년' 시기의 아이들에게 기술력이 동반된 형태와 방법은 달라진 '배움'을 전달하는 것과, 의미는 다를지언정 '교실'과 '학급'도 여전했고, '졸업'을 앞세우며 평가하고 능력을 채점하는 시스템 역시 똑같다. 지금의 학교에서의 어떤 문화가 사라지고 어떤 문화가 남겨지게 될지는 모를 일이지만, 소외, 질투, 경쟁, 폭력, 차별 등의 문제들은 장소를 불문하고 여전히 '문제'가 되는 현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사회가 고도화되면 '문제'도 사라질까. 복잡한 '감정'이 해소될까. 모두 '옳은' 선택을 하게될까. 그건 모르는 일이다, 라고 모든 작가들은 입을 모아 이야기 하고 있다.

이 책의 단편소설들의 각 줄거리와 기억에 남는 문장들을 정리해 보았다.

이종산 <B612의 샘>

학교는 매주 들어야 할 수업량이 정해져 있다. 선생님들이 미리 녹화해둔 수업 영상을 보면서 수업을 듣는 것도 있고 실시간 쌍방향 수업으로 이루어지는 것도 있다. 각자 자기 사정에 맞게 일주일 동안 들어야 하는 수업량만 채우면 된다. 좋아하는 수업을 먼저 듣고 싫어하는 수업을 미루기도 하고, 한꺼번에 많은 수업을 다 듣거나 매일 2~3개씩 할당량을 분할하여 듣는것도 학생의 몫이다. 손목에 찬 미니 윈도우가 학교 시스템과 연결되어 있는 높은 수준의 가상 공간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메타공간 학교이나 복도나 교과 교실 등이 갖춰있으며 자신이 수업 받을 가상 공간을 자신이 직접 꾸며 결과를 발표하는 시간도 있다. 학교에 따라 학생들의 얼굴 공개도 자율적이라 규칙에 따라 진짜 얼굴을 보여야하는 경우도 있고, 가상의 얼굴로 대체하는 학교도 있다. 가상공간이지만 가상 넘어에 모두 실재하는 동학년을 친구들이기에 친구들을 사귀고 어울리는 것은 같다. 이곳에서도 사회성은 길러내야 하기에 적응을 못하는 학생들을 도와주는 가상공간에만 존재하는 'A'가 뒤섞어 친구가 되어 외로움을 덜어주다 졸업할 무렵 서서히 멀어지기도 한다. 진심으로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일은 만남의 형태가 바뀐 미래에도, 그리고 누구에게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널 천천히 알아 갈 수만 있다면 누군가는 널 진심으로 좋아하게 될거야."


안세화 <다시만나는 날>

한 가정에 한 아이가 귀했던 것도 옛말이 된, 한 아파트에 한 아이가 있을까 말까한 시절로 접어든 2040년경 어른들은 아이들을 길러내기 위한 자본과 인력에 대한 투자에 합의했고 공격적인 교육 개혁이 실시되기에 이르렀다. 초중등을 합한 9학년 체제에 66차 교육과정과 함께, 사립학교가 모두 문을 닫고 거대한 부지의 국립학교들이 개교하면서 학교 운동장은 자연 친화적인 공원으로, 수업관, 놀이터, 식당, 기숙사를 비롯한 20개가 넘는 생활, 편의, 문화 시설을 갖춘 학교 건물 지어졌으며 정신적 결핍을 케어해주는 최신식 시스템에 따라 안정을 보장하기에 이른다. 예를들어 친구가 없는 학생을 위한 '메이드 AI' 등으로 말이다. 학교에서 서로를 사귀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들이 만들어 갈 가정과 사회는 더 엉망이 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상에 인간이 만드는것치고 완벽한 것은 없었다. 개혁 이후 학교라 해도 완벽하지 않았다. 학교가 완벽하지 않은 만큼 가정과 사회도 완벽하지 않았다. 단지 나아지려 노력할 뿐.

"인생이 이렇다. 작정한 대로 흘러가지 않지.

그래도 언젠가 알게 될 사실이라면 학교에서 배우는 편이 나아. "


고비읍 <나에게 물어봐>

학교에는 학생들의 마음을 위로해 주기 위해 두달에 한번 학생들의 상담을 진행하는 로봇 '온리'가 있다. 비밀유지, 태도일관, 적절조언으로 다년의 빅데이터를 쌓으며 개인로봇이 만들어졌다. 이를 '버디'라 하는데, 14살이 되면 누구나 새의 날개와 짧은 부리가 달려있는 친구같은 이 개인 로봇을 받아 20살이 되는 6년동안 이용한다. 카메라(CCTV)가 달린 눈, 스피커가 달린 부리, 모니터가 있는 가슴 그리고 날개 안쪽에 이용자와 보호자의 신상을 확인할 수 있는 개인코드가 있어서, 결제코드 연동시 대중교통 이용이나 상점 결제가 가능하며 본인만 사용할 수 있으며 이외에는 튜닝도 가능한 버디는 개인 이름을 붙여 사용하는 신분증이자 지갑같은 존재다. 또한 학교의 모든 공지와 수업내용, 과제가 버디를 통해 전달되어 영상을 확인하거나 숙제를 제출할때도 버디를 이용한다. 성인이 되도 원하여 불법 버디를 만들고 사용하면서까지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수상한 행적은 없는지 '의심'하며 감시하는 '버디와처'도 있다. 살아가면서 '의문'을 품는것이도 재능이다.어떻게 살아갈지 알 수 없지만, 마땅히 해야 할일 들에 수많은 질문을 던지며 검색만 하면 쉽게 답을 얻어지는 삶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의문에 대한 답을 찾는 여정이 길고 험난할 수록 자신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기 때문이다.

"사람만 감정을 느낄 수 있다고? 웃기는 소리야. 배운 감정을 표현하는 것 뿐인건 사람도 똑같아. 사과하고 싶지 않아도 미안하다고 말하고, 화가 났는데도 괜찮다고 말하고, 뒤에서는 욕하면서 앞에서는 좋아하는 척 해. 다 그렇게 살아."


조우리 <메타버스 학교에 간 스파이>

교통사고, 혐오시설, 각종범죄, 전염병, 학생 수 감소나 지역불균형으로 인한 폐교 위기, 장애와 비장애인의 통합교육 등 어떠한 제약도 경계도 없이 비대면 수업으로 진행되는 '메타버스 학교' 교육 관련 공약은 선거철마다 주요 쟁점이었다.

학교는 안전을 보호받는 최소의 울타리이자, 또래 아이들과의 최초의 경험을 공유하는 사회이다. 사람과 사람이 모인 곳에는 즐거운 순간만큼 괴로운 순간들도 존재하고 이것은 물리적 공간으로 존재하는 학교 뿐만이 아니라 가상세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문제였기에 최고의 교육환경을 제공한 '메타버스 시범 학교' 비밀 프로젝트를 운영하여 교육적 효과를 검증해보기에 이른다. 지금의 모습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는 가상 학교공간에 '아바타'로 대체된 학생들이 있었고, 때문에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올바른' 중학생의 모습으로 연기하는 '요원(가짜 중학생)'들도 섞여있을 수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른 맘대로 되지 않는 법 메타 버스 학교는 1회 졸업생을 배출하면서 동시에 문을 닫았다.

"처음엔 좀 신기했는데 학교가 학교지 뭐. 학교에서 문제가 발생하면 그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지 학교를 현실에서 없애면 문제도 같이 없어지나요?"



이꽃님 <에이저>

기술이 발달되면서 사람이 할일 수 있는 일이 제한되더니 수십년전부터는 AI가 모든일을 대신하게 되면서 인류의 역할에 대한 질문이 계속되어왔다. 아무리 노력해도 AI 능력을 이길 수 없기에 학생들은 좌절감만을 느낀채 배움을 포기하였고 학습의 가치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교육부는 현실과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완벽히 구현된 가상체험 학교로 방법을 전환하였고 이 가상학교에서 졸업하려면 '에이저'를 통과해야 한다. 제시된 키워드(석기시대, 화재, 전쟁 등)와 관련된 가상 상황에서 AI와 대결하여 레벨(능력치)를 평가받는 학습법으로 이를 통과한다는 것은 '인간만이 해낼 수 있는 것', '무언가를 스스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정, 협력, 지혜, 위기 대처 능력, 책임감 등을 강조했다. 지금도 고사와 평가로 학생들을 평가하듯, 미래에도 책임감이나 위기 대처 능력으로 '인간성'을 평가한다. 하지만 그 인간다움을 평가하는 주최도 결국 AI였다는 것을 안 학생들은 그 평가 기준에 의문을 품는다. 진짜 인간다움은 끊임없는 방황과 고민과 갈등하는 모습에서 나온다. 그것이 살아있는 증거이기에 고민하느냐 아무것도 결정 내리지 못한다 한들 괜찮다. 만약 어떤 것을 선택했다면 당신의 선택은 옳으며, 이렇듯 늘 누군가 응원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허진희 <너에게 맞는 속도>

국가 차원에서 인재 양성을 위해 세운 명문학교로 전액 학비가 무료인 미르고등학교는 매학기 시험을 봐서 탈락자를 만들어내지만, 끝까지 살아남은 졸업생은 미르대학교에 입학하는 치열한 경쟁구도를 지닌 학교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저마다의 취향으로 장식한 홀로그램으로 학습을 돕는 인공지능 튜터(2043년 현재 3.0ver)를 지니고 있으며 학교 수업에도 튜터를 이용해 수업을 진행한다. 튜터의 버전 업그레이드의 가격이 높기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3.0ver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훨씬 낮은 버전인 1.5ver으로 수석입학에 첫 학기 시험 1등을 한 학생이 나타났고, 자신의 튜터1.5ver 가 아주 가끔 조금 느릴뿐 불편하지는 않다고 말한다. 그런 학생에게 게다가 그런 그에게 장학금의 명목으로 3.0ver 무료 업그레이드를 시켜주겠다고 했을때 학생들은 묘한 질투감에 휩쌓여 큰 반발을 일으켰고, 학교는 다음 학기 시험에도 1등을 한다면 이라는 조건을 다시 걸며, 장학금 제도를 제대로 마련하겠다는 어중간한 태도로 타협했다. 인공지능이 아무리 발전하고 도움이 되어도 그것을 사용하는 것은 인간이기에 학교의 교육 방법이 달라질지언정 시스템이 같다면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관계도 비슷할 것이다. 학생들이 반발했던건 무료 업그레이드라는 장학금 그 자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머리가 좋고 나쁜거랑은 상관 없어. 난 지금 이 순간이 소중할 뿐이야."

조규미 <A가 오는 중>

미래 교육 위원회는 시간여행으로 지상에 없는 과거의 교실을 체험함으로써 현재의 인간이 얻은 것은 무엇이고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지 탐구하는 '교육 현장의 종적 탐구 및 체험 프로그램', 일명 '공중 교실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다양한 사례를 모으고 있다. 시간여행 터널을 통과하는 '다이싱'상태를 거쳐야 하기에 정상적인 신체 활동이 가능해지기까진 체험 후 24시간이 소요되며 이후에도 회복하면서 작은 신체적 후유증을 겪게 되는데, 노화가 진행되지 않은 어린 나이일수록 후유증이 미미해서 대간 여행 대상자는 18세 미만으로 조정되었다. A,J,K 세사람은 12주동안 1999년의 학교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22세기에 이르면서는 몸속에 네트워크 연결망을 심는것이 유행이였고 교실은 실체없이 배움의 순간만 나누는 시간적 개념이였으며 기술의 도움으로 타인과의 접촉은 최소화 되어 살아왔다. 따라서 삐삐로 연락하는 원시시대 네트워크, 사라진 운동경기(축구, 야구, 배구, 탁구 등)와 동물원, 감염병이 뭔지 모르고 사는 사람들처럼 입김과 온도와 냄새가 날만큼 가까이에서 이야기 하며 잦은 스킨십을 나누는 모습은 낯설었다. 지금은 익숙하고 당연한 것들은 과거에 없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미래에 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A는 미래에 남겨져 있지 않은 사람과의 어울림, 응원, 지지가 낯설고 기뻐 미래로 돌아가는 시간을 늦추고 만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죠. 가능하면 많은 것을 경험하고 돌아가세요."




미래의 학교지만 현재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시대가 변하더라도 그 시대의 변화를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청소년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바가 매우 직관적으로 명확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부분 본질은 같다. '나다움'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을 것. '행복'하기 위해 나와 주변을 잘 살필 것. 때문에 '인간성'이라고 불리는 그 따뜻함을 끝까지 놓지 않을 것.

한편의 이야기마다 작가의 말이 들어가있어서 작가의 집필 계기와 의도도 보다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책의 제목이 되기도 한 <b612의 샘>을 쓴 작가의 말에 가장 공감한다.

미래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아득하지만

사람의 마음, 사랑하는 마음은 크게 변하지 않을것 같습니다.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은 달라졌을지 몰라도

사람의 마음은 그리 많이 달라지지 않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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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버 (양장) - 제15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나혜림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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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는 고양이가 등장한다. '그 고양이는 밤처럼 검어서, 해가 지면 밤과 분간할 수 없을것 같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고양이는 '샛별(루시퍼, 빛을 발하는자)'이라는 뜻을 지닌 '헬렐 벤 샤하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고양이는 중학교 2학년 정인이 앞에 나타나 3400년 동안 일하다 268년의 휴가를 보내고 있는 '악의'없는 '악마'라고 소개했다.

현정인, 빛날 정(炡)에 사람 인(人)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중학교 남학생은 제주도로 가는 수학여행 가정통신문을 받고 들뜨기 보다는 354,260원이라는 돈을 보며 계산을 먼저 해야 한다.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주 3회 일하는 햄버거 가게 알바에서 최저 시급 9,160원을 받으면서 얼마동안 일해야 하고, 킬로그램당 150원을 받는 폐휴지를 얼마나 수거해야 하는지를 계산하며 수학여행을 갈 수 없는 자신의 형편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우연히 고양이를 마주친 정인이는 아르바이트장소에서 또 만난 고양이에게 따뜻한 패티를 데워주었고, 고양이는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집까지 쫓아와 대뜸 자신을 악마라고 소개한다.


만약에, 그 한마디면 신세계를 맛볼 수 있단다.

악마는 인간의 욕망과 거래를 하기 마련이다.

악마는 정인에게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계속해서 유혹한다.

그리고 뭐든 '만약에'라는 한마디로 바라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악마와 정인의 에피소드들을 보면서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생각이 났다.

타임리프(시간을 이동하는 일)라는 엄청난 능력을 손에 넣은 마코토가 시간을 돌리는 이유들은 하나같이 하찮다.

아침에 마음 놓고 늦잠을 자다가 시간을 돌려 지각을 면하거나, 노래방 시간이 다 되었을때 시간을 돌려 마음껏 노래를 부르거나, 동생이 먹어버린 푸딩을 다시 먹기 전으로 돌아가 꺼내 먹는다던가, 먹고싶은 음식이나 놓친 드라마를 다시보는데 쓰는 등 하나같이 소소한 일에 쓰며 즐거움을 만끽한다.

마찬가지로 악마의 큰 유혹에도 이 중학생 소년 정인은 '바퀴벌레가 한줄로 옆집으로 이사를 가는 일'이라던가 '와이파이가 더 잘터지는 일' 등으로 악마의 능력을 확인하는데 쓰는게 고작이었다.

"넌 하고 싶은게 없나? 소원이라든가, 꿈이라든가. 상상은 할 수 있잖아. '만약에'"

악마의 계속되는 요구에도 정인은 별다른 바람이나 소원을 이야기 해주지 않는 정인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아저씨가 이해하세요. 소원도 뭘 알아야 빌죠.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 태워서 끽해야 난로랑 칠면조밖에 못 본거랑 똑같아요.


정인이 하고싶은것은 구체적인 소원과 바람이 아니었다.

'선택', 자신이 직접 무언가를 고르는 것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은 온전한 가족도 선택하지 못했고, 가난도 선택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학교에서 수학여행 가정통신문을 나눠줬을대도 '제주도'가 뭐냐 차라리 '어디'가지 숙소가 이게 뭐냐 '어디'가는게 낫지 하면서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친구들과 달리 수학여행 자체를 가느냐 마느냐 하고 선택할 수 있는 상황도 못되었던 것이다.

이것과 저것들 사이에서 고르는게 아니라 그 길밖에 없었던 삶. 어쩔 수 없이 가야하는 삶만을 살아왔던 터라 바람이나 소원은 가당치도 않았다.


'뭘 좋아해?' '뭘 원해?' '하고 싶은거, 갖고 싶은거, 먹고싶은거 없어?' 라고 끊임없이 물어보며 계속해서 욕망을 바라는 악마에게, 정인의 대답은 계속 미뤄지기만 했다. 정인이 학교 아지트에서 텃밭을 함께 가꾸며 친해지게된 비밀 친구 재아에게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그 마음을 건들여도 보았지만 '어차피 이뤄지지 않을텐데요' '바보같아요' 라는 현실적인 정인에게 '만약에'라고 상상해 보라는 악마의 말은 미덥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인은 자신의 want와 need를 물어봐 주는 악마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물어봐 준건 고마워요. 누가 나한테 '~하고싶지?'라고 물어봐 준 거 처음이거든요. 내가 뭘 고르고 '선택'할 수 있다는거, 그거 진짜 좋네요.

신은 명령하지만 악마는 시험에 들게 하지. 선택은 인간이 하는거야.

악마는 민주적이구나'라며 정인은 웃었지만, 그게 악의 무서운 점이라는 것을 악마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복지관에서 후원을 받는 문제로 담당 복지사와 대화를 나누던 정인을 보면 정인의 '선택'에 대한 다른 관점에서의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나기도 한다.


살아야 하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거예요.

노닥거릴 여유가 있으면 저도 애들이랑 몰려다녔을거고,

돈만 있으면 저도 에어맥스 구겨신었을거예요.

청소년 요금제만 아니었으면 밤새 게임이나 하고...!


'소원도 뭘 알아야 빌죠'

'자신이 직접 무언가를 고르는 '선택' 을 해보고 싶어요'

'살아야 하니까 이렇게 산다'

정인의 속마음들은 다 이렇게 안쓰럽기만 하다.

늘 할머니의 말씀대로 '불평하면 사는게 지옥'이 되니 불편하게 살지 않아야 하며,

'상상도 지나치면 병'이기에 '기대'거나 '상상'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네가 원하는 꽃을 모두 피워줄게.

네잎 클로버로 부족해? 그렇다면 다섯잎, 여섯잎, 일곱잎, 아니 만개의 잎을 가진 클로버를 네게 줄게.


악마의 그 어떤 유혹에도 '바람'의 '만약에'를 외쳐본적 없는 정인은,

자신으로 인해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후회'의 '만약에'를 나열한다.

'만약에 ~하지 않았더라면' 으로 줄줄이 나열되는 후회의 말들을 뱉을 수록 공기중에 가득차며 오히려 그 상상들은 더 먼곳으로 멀어지는것만 같았다.

만약에.. 그 다음은 어떡하지?

정인은 악마의 손에 이끌려 상상 속의 '만약에' 세계를 체험해 보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난 잃어버리기 싫어. 내 마음대로 안풀린다고 걷어차버리고 싶지도 않아.

기억도, 삶도, 세상도.

정인이는 매혹적이고 황홀하며 현실을 잠시 잊게해줄 만약에의 '가짜' 삶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래왔듯 자신의 삶을 오롯이 책임지면서 사는 '진짜' 삶을 택한다.

방법이 있을거예요.

살아가면서 굳은 살이 생길거예요.


아니요 필요 없어요.

나중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현재도 나한테 풀기 어려운 문제인데요 뭐.

내 삶으로 돌아갈래요.

할머니가 그랬거든요, 불평하면 지옥이된다고.

만가지 가능성을 하나하나 따지면서 살 수는 없어요.

하지만 또어떻게 하나도 안따지고 살겠어요.

만의 하나, 그리고 그것때문에 놓친 구천구백구십구개의 가능성 사이에서 내 식대로 방법을 찾아볼게요.


소년 정인은 현실의 삶에 충실히 '책임'지며 살기로 했다.

한바퀴 돌아 제자리일지라도, 그것은 홈런을 때리고 한바퀴 돌아 1점을 따낸, 그러니까 '뭔가' 달라진 인생이 차곡차곡 쌓여갈 것이라고.

정인은 한걸음 내디뎠다. 또 한걸음. 다시 한 걸음.

정인의 발이 닿는 곳이 곧 길이었다.

악마와의 계약은 끝내 성립되지 못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마코토가 시간을 다룰줄 알면서도 시간을 사용했던건 현재의 '즐거움'을 위해서였다. <클로버>의 정인이도 '난 다 들어줄 수 있어'라는 악마의 유혹에 기껏해야 현재의 '불편함'을 조금 해소할만한 바퀴벌레잡기와 와이파이 세칸정도로도 만족해했다. 과한 숙제도, 원치않던 언어능력도 손사레를 쳤다.

한줄평에 썼던것 처럼 그 '만약에'라는 상상은 바람도 가지고 있지만 후회의 형태를 가질 경우가 더 많다.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 할 수 없어도 후회,할 수 있어도 후회.

중학생인 소년도 바람과 후회가 섞인 '만약에'라는 말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고 진짜 삶에 책임지며 오롯이 걸어가는데, 성인인 나는 그렇게 하고 있나 계속해서 돌아보게된다.

'잘못했다고 말해야지. 변상해야지.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을 한번 더 보고, 좋아하는 친구에게 연락하고, 도와주는 사람에게 감사하고..'

정인이가 상상에서 벗어나 현실과 마주하면서 자신이 해야할일들을 차분히 정리하며 인생의 주인으로서 책임지며 한걸음씩 떼는 장면이 눈부시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면서 떠올렸던 가상 캐스팅 3인.

헬렐(고양이)은 배우 이도현, 그리고 정인은 아역배우 최현진(고양이 상으로 캐미가 맞을듯 하다), 그리고 정인의 친구 재아는 아역배우 김민서(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다)


해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똑같이 비추고,

비는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모두에게 내린다.

마태복음 5장 45절을 변형하여 인용한 책의 내용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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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호소의 말들 - 인권위 조사관이 만난 사건 너머의 이야기
최은숙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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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초반 프롤로그에 작가가 이 책을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책을 쓰기 시작하면서 바뀐 마음가짐으로 책의 성격이 바뀐 이야기를 먼저 시작한다. 국가 인권 위원회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사소해 보이지만 곳곳에 숨어있는 '노동'과 '인권'문제로 '억울함'을 호소했던 사람들의 여러 목소리를 스피커로 연결하여 다른 사람에게 들려주고 싶었다고 한다. 여러 목소리를 모으며 '억울할 때 읽는 책'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일들이 있었어 라고 알리면서 시작했던 책이 이럴땐 이렇게 대응하는게 좋아 라는 성격의 '권리 구제 매뉴얼'의 책으로 내용으로 바뀌다가, 이런 일을 당하기 전에 이렇게 하는건 어때 라는 예방적 차원의 '인권 교과서'적인 책으로 바뀌다가 결국 그럼에도 그저, 그러한 사람들에게 어찌되었든 귀를 내어주고 들어주는 자세, 그러니까 타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어떤 호소의 말들' 이 탄생했음을 알려준다.

국가인권위원회 진정·민원 접수 메일 주소의 아이디는 호소다.

인권위 민원메일주소를 정하는 회의에 참석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누구나 무엇이든 억울한 일이 있으면 호소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메일 아이디를 호소(hoso@humanrights.go.kr)로 정했다.

더 낮고 어려운 사람들의 호소에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그럼에도 누군가의 호소를 듣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최은숙의 『어떤 호소의 말들』 中

그 많은 호소의 말들을 다 지켜 줄 수 없었기에 더더욱 우리는 호소의 말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비록 '지금은' 이라는 장벽에 무너졌더라도, '현재로서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들어주는 일' 만큼은 멈추어서는 안된다. 계속 들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그 귀는 많을 수록 좋다. 그러면 '지금은'이 '언젠가'로 그리고 '결국엔'으로 바뀌어 갈 지도 모르는 일이다.

프랑스에서는 중등 교육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내용 중 하나가 '노동권' 이라고 한다. 법률적 권리의무를 가르치는 것 외에도 노동자로서 피해를 당했을때 구제 절차를 이용하는 방법, 노조 활동 중에 필요한 단체 교섭 기술 등을 미리 배울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생 노동자로 산다는 점에서 노동자의 권리를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얼마나 타당하고 당연한 일인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노동자로서, 납세자로서, 시민으로서 대응하는 기술을 의무 교육으로 배울 수 있다면 평범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

최은숙의 『어떤 호소의 말들』 中



이 책의 이부분을 읽고 난 후라 그런가, 뉴스에서 '노동'에 대한 말이 나오는데 귀를 쫑긋 귀울이게 되었다. 개정 교과서에 관한 내용이였는데, 남침(南侵)없는 6·25전쟁, 자유(自有)없는 민주주의(民主主義), 노동(勞動)없는 근로(勤勞)로 관련 내용 표현을 수정했다는 내용(https://www.ytn.co.kr/_ln/0103_202209011724078032https://www.ytn.co.kr/_ln/0103_202209011724078032)이였다.


언제부턴가 초, 중등교육은 곧 대학진학만을 위한 교육으로 변하였고, '좋은' 대학 진학이 곧 '좋은' 직장 취업을 위한 발판으로 여겨지면서, 학교 교육은 '시험 능력 주의'교육으로만 흘러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에도 한적이 있다.

여기서 소위 말하는 '좋은'의 기준은 다 다를 것이나 거기에 노동은 아마도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 않으면 교과서에서 '노동'을 빼면서 교육할 일은 없을테니까.

그럼 우리는 모두 '좋은' 곳에서 지낼 수 있는 것인가, 의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임금 지불 현황, 연봉협상 방법, 노동 조합, 대출, 납세 등 소득과 경제에서의 실용적인 부분들을 정규교육으로 하여 얼마나 자세하게 가르쳐야 하는가는 묻는다면 그것 역시 애매한 부분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것들을 대학에서 가르쳐 주지도 않는다. 그럼 '임금 노동자'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노동교육을 대체 어디서 받아야 하는걸까, 그냥 사회로 나가서 살게되면 저절로 알게된다고 말하고 싶은걸까. 이런 질문들은 해소되지 못하고 항상 의문으로만 남아있기 마련이다.



노동을 배운적 없으니 노동과 관련된 인권 문제에 대해서도 알리 없다. '일'을 하면서 겪게되는 차별이나 침해들은 물론 '일상 생활'에서 겪게 되는 논란이나, 과거의 사례에 대해서도 살아가면서 어쩌다 '나'와 관련되어 알게 되거나 계속해서 관심 없는 채로 지내게 될 수있는 경우 두 가지로 나뉠 뿐이었다.


이번 독서를 통해서 '인권위'와 관련된 뉴스 기사들을 검색해 보았는데, 하루가 멀다하고 인권위에 진정되는 사건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눈에 띄는 단어는 '침해'와 '차별', 그리고 '구제'. 이 단어들로 인권위가 어떤 곳인지 알 수 있었다.

인권위는 피고인의 유죄나 무죄를 밝히는 조사를 하는 곳이 아니다. 범죄의 진실을 파악하고 유무죄를 판단하는 것은 수사 기관과 법원의 역할이다. 인권위는 체포와 구속과 재판의 철차중에 피의자나 피고의 '권리'가 '침해'되었는지 조사하여 '인권 침해 여부'를 밝히는 역할을 한다.

최은숙의 『어떤 호소의 말들』


사회 역학자 김승섭은 『아픔이 길이되려면』에서 인권 침해와 차별의 고통이 어떻게 사람을 아프게 하는지 과학적 통계와 연구자료로 증명해 보인바 있다고 한다.

차별의 경험은 사람을 아프게 한다. '말하지 못한 상처'는 어디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새겨진다고 표현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에서 청춘들은 계속 몸에 고통을 새기고 있으니 계속해서 아프기만하다.

우리의 교육이 '직장'으로 이어지는데도 '직장 내 괴롭힘'이 무엇인지 알수 없고 그 대처 방법도 모른다. 아마 '직장내 괴롭힘 금지' 조항이 2019년에 이르러서야 생겼다는 것 역시 알 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사회 생활 속에 만연한 '갑질', '계약직과 정규직', '성희롱', '차별', '노동조합' 등의 이야기는 외면한다. 근면하게 묵묵히 참고 일하는 것(근로)이 사회 생활이라고 말해왔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거짓말과 진실,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부끄러움, 통념에 대한 푸념 등을 다채롭게 담으며 '인권감수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누군가를 납작하게 눌러버리는지를 알아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적극적으로 예민하게 감각을 열어 놓아야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것 같다. 누군가 이런 마음상태에 '인권 감수성'이라는 예쁜 이름을 붙였다.


'인권 감수성'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하나요? 인권위 조사관으로 오래 일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 우리는 조금씩 '알아차리며' 인권 감수성을 키워나간다.인권은 법이나 제도로 뒷받침되지 않으면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지만,그 제도나 법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감수성이 없다면 실천되기 어렵다. 편견을 버리고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기 위해서는 마음이 말랑말랑해져야 한다.

말랑말랑한 마음이 법보다 훨씬 힘이 세다고 말하는 것이 인권 감수성이 아닐까? 작은 소리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

그리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것.

최은숙의 『어떤 호소의 말들』 中

이 책의 1부에는 호소의 말들에 집중되어 있다. 인권위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겪었던 다양한 사람들의 사례들을 두고 쓰는 일기장 같은 마음의 소리가 담겨있다.




'사실 너머에 있는 다양한 무늬의 진실을 헤어려 보는 것이 인권의 마음이 아닐까'

'인권 침해 가해자들에 대한 심판이 끝난 뒤에도 피해자의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쉽게 잊어버리는것 같다.'

'책임은 멀리 있는 신이 아니라 여기 있는 우리에게 있다.'

'누군가를 절대 그러지 않을 사람, 또는 당연히 그럴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적어도 인권을 다루는 일에서 만큼은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거 정말 잘못된거 맞죠? 그런데 왜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사과하지 않는거죠? 라는 말에 부끄러움을 숙제처럼 끌어안고 집에 돌아왔다.'

'뒤늦은 정의가 정의일 수 없는 것처럼 같은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며 후회의 마음만은 기록으로 남겨두고 싶다.'

'조사관으로서 더 많은 선수를 인터뷰하고 그 말들을 구슬처럼 꿰어 세상에 보여주고 싶다. 우리가 진정 응원하는 것은 폭력으로 얼룩진 메달이 아니라 운동장에 서 있는 사람임을 알리고 싶다.'

그리고 2부에서는 '슬기로운 조사관 생활'로 '조사관으로 산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 가치 추구와 바람, 삶의 자세에 더 초점을 맞춘듯 했다.

'조사관으로서의 나의 손이 여전히 따뜻한지를. 내가 가는 길이 좋은 선례가 되고 있는지를'

'진정인을 대할 때마다 공중 외줄타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때가 있다. 그리고 의심스러운 줄타기일망정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애쓰는 중이기도 하다. 아주 옅은 농도의 다정함이나마 꽉 붙잡고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친애하는 진정인들과 비슷한 일을 하는 모든 이들에게 '괜찮으세요?'라고 안부를 전하고 싶다.'

'인권 지킴이가 아니라 인권 찍힘이가 되더라도 함께 서고 싶다.'

'계속해 보겠습니다.'

'누군가 제발 큰소리로 '저런!'하고 외쳐 주세요 라는 시인의 말대로 소리치고 끌어안는 순간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특히 인권을 보호한다는 이름으로 만나는 인권 피해자들이 늘 '무고하고 선량한 희생자의 이미지의 사람들'이 아니라 때때로 '악랄하고 위선적이고 탐욕스러운 사람들' 도 있다는 것이 조사관으로서의 회의감과 고뇌에 빠지게 한다는 점이 인상깊었다. 일이 아니라 사람이 힘들다는 말이 여기서도 적용되는 구나 싶었다. 그러헥 엇갈리는 주장과 상식에 어긋나는 조치들, 말장난 같은 억지가 담긴 서류뭉치를 받아들면서도 '다 사정이 있겠지' 라고 말하며 저마다의 사정응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모습 그 자체가 위로가 되기도 했다.


우리에게 포클레인 같은 힘은 없지만

여럿이, 천천히, 꾸준히, 한삽씩 뜨는 진정성이 있고

그 힘으로 길도 뚫고 산도 옮길 수 있다고 감히 믿는다.

최은숙의 『어떤 호소의 말들』 中

작가는 모든 일이 법과 제도를 잘 만드는 것처럼 누가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해내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인권을 위한 일이라면 더더욱이.

그 마음은 서로를 '조금 슬프고 귀여운 작은 존재'로 응시하는 것이고, 작가는 그것이야 말로 '인권의 마음'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한다.

그 마음이야말로 법의 그물이 구제하지 못하는 억울함이 기댈 곳이라고.

그렇게 기대고 의지하며 다정다감한 마음을 나눈다는 것은 실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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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미래에 보내는 편지 - 소멸하는 지구에서 살아간다는 것
대니얼 셰럴 지음, 허형은 옮김 / 창비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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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생존보다 아름다움에 대해 쓰고 싶으니까요.

뜨거운미래에 보내는 편지 中



최근 기후위기와 관련된 뉴스를 본적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Be4Ky2J8uA


이번 폭우와 연관지어서 낸 기후변화에 대한 뉴스였는데,

"기후 변화는 곧 기후 위기로 불린다."는 마지막 멘트가 인상적이였다.

우리는 쓰레기문제와 기후변화에 대해 인지는 하고 있지만,

아직 그것이 위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책의 표현처럼 '선택적 외면', '적절한 낙관주의', '무감각함이 삶을 지배하는 법칙'이 되어 있어서 인지도 모른다.

문제가 있고 변화가 오고있는것은 맞지만 위기라고 말하는 때는 아직이라고,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책의 목차는 심플하다. 1차부터 4차 운동의 진행사항이 나와있고 각 운동을 진행하면서의 감정을 담았다.

그리고 책 제목처럼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그리고 책 제목처럼 편지를 쓰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읽다보면 감정선의 변화가 격해서 편지라기보다 일기같이 느껴지긴 하지만 컨셉은 부모가 자식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한다니 그렇게 받아들이는 걸로)


편지라더니 '아니 왜 자꾸 교수님이 이러셨다 저러셨다 하면서 자신이 들은 대학 수업얘기에 대한 감상을 적은 대학생의 수업일지 같은 이야기가 나오지' 싶을때 그제야 작가의 이력부분을 읽어보니 '대학 신입생 시절 UN전화걸기 운동에 동참한 것을 시작으로 10년간 환경운동의 최전방에서 일하고 있는 1990년생 기후변화 활동가' 라는 소개를 확인 할 수 있었다. 그제야 납득. 열변을 토했다가 급 다운되면서 변화하는 그 감정선도 납득. 작가는 자신이 환경보호주의자가 아니며 이 편지는 '사람들을 실재하는 존재로 만들기'라는 프로젝트를 이루기 위해 썼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책 초반에 환경에 대한 어원을 짚어주는 구절이 있는데, 그 부분이 인상깊다.

환경(environment)이라는 단어의 어원은 수수한 프랑스어 전치사 environ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그냥 '근처의' 이라는 뜻이야. 이 단어는 19세기 중반에 와서야 영어 어휘에 스며들었고 '사람 또는 사물이 지내는 종합적 조건'으로 정의됐어. 모든것(everything)이라는 단어와 거의 구분이 안갈 정도로 모호한 개념이었지. 그러다 20세기 말쯤 '환경'이라는 단어가 우리가 마음 쓰는 다른 모든것들로부터 떼어져 나와 따로 분리된 정의 안에 들어왔고, 내가 나이를 먹었을때쯤에는 부정(父情)을 품을 줄 아는 종(種)을 소환해내는 단어가 됐어. 사실상의 의미 분리가 이루어진거야.

환경은 곧 위험에 처한 고래, 아름답지만 먼 곳에 있는 숲이었어.

모두가 환경을 보호하고 싶어하지만

그 활동에 주기적으로 참여하는 이는 소수였지.

뜨거운미래에 보내는 편지 中


'근처' 에 있는 모든 것을 아우르는 것에서,

아름답지만 '먼'곳에 있는 위험에 처한 것.

환경에 대한 우리의 인식변화를 콕 찝어주는 서글픈 대목이었다.

환경문제를 '슬로모션 응급사태'라고 표현하곤 했다는 지질학 교수의 단어는 정책을 세우기엔 너무 빠르게, 서사를 전달하기에 너무 느리게 변화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을 다시한번 짚어주는 표현이기도 했다.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 간다!"라는 운동에서 쓰이는 문구는 희망적이다.

위기에서 희망을 찾되 맹목적 낙관론에 넘어가거나 절망감에 주저않지 않도록 모든 것을 바꾸려면 모두가 나서야 한다며 행진하는 사람들은 기후문제로 생사의 기로에 선 사람들, 저항 운동을 생존의 문제로써 벌이고 있는 청년 연합, 녹색업계, 화석연로 반대 투쟁가들, 과학계와 종교계 리더들, 지역주민, 노동도합원들, 텃밭 농부들, 이웃집 할머니들이었다. 환경 운동은 기후학과 지질학, 생태학, 경제학, 역사, 사회학, 공학 및 정치과학 분야에 걸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환경을 구하'고 싶어했고

또 어떤 이들은 '환경 정의'를 이루고자 했지.

뜨거운미래에 보내는 편지 中

모든 행진은 신념의 표출이다. 신념이 시대정신이 되려면 물론 집요함이 필요하다.


인류학자 애나 칭(Anna Tsing)은 우리가 인류세에서 계속 살아가려면 '알아채기의 기술' 되살려야 한다고 했다. 그건 가만히 서서보기만 하는 능력,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은채 주의를 기울이는 능력, 당혹감과 놀라움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말한다.

특히 풀과 동물을 알아채는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우리 삶에 핵심적 역할을 하는 다른 유기체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항상 자원처럼 굴지는 않거든요"라고 말했다. 이런 알아채기 기술이 위기에 처했기에 기후 위기가 찾아왔다는 것이 칭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발췌적이지 않고, 첨가적이며, 일반화보다 구체화를 선호하고, 따로 계획하지 않은 충분한 시간을 요구하는 알아채기 기술을 회복해야 한다.


기후행동 운동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싸우고 있으며,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뜨거운미래에 보내는 편지 中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살아갈 생애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많은 생애가.

어쩌면 너의 생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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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퍼민트 (양장)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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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페퍼민트(peppermint)차를 내리면 풀향이 집안에 감돌았다.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진정된다고 엄마가 좋아하는 차였다.

'미각'을 깨우는데 도움이 된다고 해서 엄마를 위해 내리던 차였고,

같은 간병인으로부터 건내받아 잠깐의 '위로'와 '휴식'을 가져다 준 차였으며,

박하 향이 섬세하게 빚어낸 평온한 공간 속에서 '용서'의 말을 건내게 한 차이다.

이야기는 '식물적인 인간을 돌보는 일과 식물을 기르는 일이 어느정도 닮아 있다' 는 문장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야기의 주인공 시안은 유난히 꽃과 나무를 좋아하여 예민한 식물이라도 죽이는 법 없이 잘 보살피던 엄마의 병간호를 오랫동안 하고 있다.

'요즘 애들중에 누가 이렇게 수발을 착실히 들겠어' '대단하다' '딱하다'라는 노골적인 동정과 연민의 시선도 6년이면 익숙해 진다. 제법 환자를 돌볼줄 알게 된건 삼십년 넘게 간병 경력을 쌓아온 배테랑이자 엄마를 함께 돌봐주시는 간병인 최선희 선생님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돌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누군가의 곁에 있는 시간만큼 미래에 누군가도 나를 지켜주고 있을거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해 보라고 했다.

한 평생 혼자 살지않는 이상 모두 결국에는 누군가를 간병하게 돼. 우리도 누군가의 간병을 받게될거야. 사람은 다 늙고 늙으면 아프니까. 스스로 자기를 지키지 못하게 되니까.

『페퍼민트』 191p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오랜 간병생활을 하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 일까? 간병인의 삶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면서 그에 대한 주변 시선은 물론 그들의 삶의 고단함과 희망을 놓지 못하는 비루함을 강조한 얘기가 아니다.

이야기는 엄마가 '무슨 일'로 식물인간이 되었을까라는 의문을 품기도 전에, 병원에서 '해일'이라는 예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와의 재회를 먼저 안겨준다. 그러면서 그 친구와의 연락이 끊기게 된 '그 사건'이라는 것이 뭐지, 그래서 이들의 그전 사이는 어땠고, '그 사건'이후로는 어땠고, 다시 만난 지금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거지라는 생각으로 이끌어나가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고의'도 아니었고"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우리 가족 다 지금은 '극복'하고 잘 지내고 있어"

"애초에 '책임'을 물을 수 없었던 일이야"


어딘가 위태로운 이 대화를 나누고 나니, 시안은 한때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냈던 그 '가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 다음이 어떻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은채 이미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가족을 간병하는 시간도 노동시간으로 인정되어 시안은 최저 시급을 받는 노동자가 되었다. 그 월급으로 엄마의 간병용품, 개인 생필품, 식료품을 사느냐 돈을 모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생활이 이전보다 약간은 나아졌다고 생각하며 위로한다.

같은 병실을 쓰는 어른들은 시안에게 아무렇지 않게 심부름을 시킨다.식판을 가져와달라, 설거지를 대신해달라, 화장실까지 부축해달라, 창문을 열어달라, 닫아달라, 간호사를 불러달라는 등의 부탁을 하루에 수십번도 더 받는다. 몸이 불편한 어른들의 부탁을 거절하는것보다 들어주는 일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엄마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일, 자극하기 위해서라면 가리지 않고 했다. 책읽어주기, 저주파 전류 흘려보내기 등. 그러나 모든 노력과 정성이 물거품이 되는 느낌은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프면 모두 어린아이처럼 행동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했다. 고마운 줄 모르고. 이게(간병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모르고. 그런걸 보면 괜히 마음이 상했다.

또래 친구인 해원은 시안에게 매일매일 입시, 연애, 학교생활 등 고민상담을 한가득씩 쏟아낸다. 고민이 이렇게 다채로울 수 있다는게 신기했다.

재회한 '시안'과'해원'은 처음엔 데면데면했지만 함께했던 시간이 더 길었기에 호불호, 사소한 습관, 추억이라고 불리는 기억들이 위력을 발휘하면서 금새 가까워졌고 금새 다시 서로에게 기대기 시작했다. 이 무렵의 또래 친구들의 연애 상담, 입시 스트레스, 학교 생활들이 '해원'을 통해 묘사되면, 같은 시기를 보내는 간병인 '시안'의 모습은 더욱더 이질감을 갖고 비교 되며 다가온다.


칠판에 또렷하게 적힌 글자가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 세계의 법칙들.배려하기. 예쁜말 쓰기. 수행평가 제출하기. 수능 D-150.이곳은 낯설고, 내가 속할 수 없는 세계라는 느낌이 이 들었다.

『페퍼민트』 120p

해원에게는 이 있었다.

주말의 약속과 계획이 있었다. 갑자기 사라지면 걱정할 걱정할 가족이 있었다.

지키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스스로를 가련하게 여길줄 알았다.

자기 사람에 대한 각별함과 애틋함이 보였다.

해원을 알아갈수록 내 삶이 얼마나 비루한지 실감하게 되었다.

『페퍼민트』 159p


시안은 스스로 평범한 고3의 세계를 이미 속할 수 없는 낯선 세계라고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해원과 함께하는 또래 친구와의 시간 역시 일상이 아니라 일탈같이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각자의 일상 묘사와 고민이 달랐던건 각자 신경써야 할 다른 일상이 있기 때문이다. 해원이 뉴스에서나 보는 노인 고독사 소식이 시안은 병원에서 종종 목격하는 경험이다. 해원이 학원 숙제나 진도에 스트레스 받을때 시안은 엄마의 몸에 욕창이 다시 생길까봐 온신경을 쓴다. 가까이에서 접했기에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해볼까 싶다는 생각나는 대로 한 소재지만 해원에게는 '그거 고될텐데'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 다른세계의 이야기처럼 대답한다.

시안의 일상은 단순했다.

해원은 시안을 만난 후로 모든게 이전 같지 앟았다.

현수와의 관계, 입시, 일상까지 모두 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안에게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들. 시안의 은 단순하고 단촐했다. 엄마와 간병. 그외에 다른건 염두에 두지 않은것 같았다.

『페퍼민트』 253p

그리고 그런 해원 역시 각자 신경써야 할 다른 일상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프록시모 바이러스 유행이 시작되었을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뉴스에서 감염병의 확산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증상이 얼마나 심한지, 신규 감염자가 몇명이나 발생했는지 매일 보도되었지만 우리에게는 먼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치사율이 5퍼센트가 넘는다는 뉴스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신경써야 할 다른 일상이 있었다. 해원은 피아노 콩쿠르에 나갈 예정이었고, 나는 가족들과 해외 여행을 갈 생각에 들떠 있었다. 

『페퍼민트』 89p

그리고 이 이질감을 가져다 준 원인이 되는 '그 사건'은 이야기가 ⅓정도 흘렀을때 등장한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감염병의 중심에서 해원의 가족은 슈퍼 전파자 N번으로 불리게 되었다. 시안의 엄마는 감염 후 지금까지 식물인간으로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저 애가 내가 느끼는 고통의 일부의 일부라도 이해하는 것,과거를 잊고 편히 사는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보지 않겠다는 것이고약한 마음이라는건 나도 알았다.하지만 그래서 뭐?누구의 인생은 망했는데 해원의 행복은 보장되어야 할 이유라도 있나?

그리고 시안은 해일과의 재회하는 순간부터 느꼈던 한때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냈던 그 '가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었던 마음의 진짜 속내를 확인한다. '고의'도 아니었고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섣불리 그간 적당히 고생했고 드문드문 행복하게 살아오면서 '극복'했다는 말을 꺼낸 가족을 이해하거나 용서할 순 없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다면 '화해'하고 다시 잘 지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그 안일함마저도.

그거 알아? 우리는 견디고 있어. 이 악취를, 시린 소독 냄새를, 좁은 침대를.

엄마는 뭘 견디고 있어? 문득 엄마도 좁은 몸을 견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를 사랑하면서 엄마 곁에서 보내는 시간을 낭비로 여긴다는게 미안하다.

엄마는 나를 키우는 동안 자신의 삶이 낭비되고 있다고 생각한 적 있을까.

『페퍼민트』 121p


우리는 재난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사실 그 누구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간병을 시작하는 경우는 없다.

그게 마지막 대화라는걸 알았다면 엄마는 내게 무슨 말을 건넸을까?

엄마는, 우리는, 분명 사랑을 말했을 것이다.

『페퍼민트』 220p

백온유 작가의 작품은 심리를 잘 파고든다. 어떤 사건에 대해 우리가 갖는 일반적인 겉핥기 감정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숙한 곳의 원초적인 감정을 툭툭 잘 내뱉고, 머리나 가슴으로 이해하려 하기 전에 그저 와닿는다.

그래,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그런 느낌으로 글을 읽어나가게 만든다.

바로 이전작품인 『유원』이 그러했다. 일반적인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 아 정말이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묘한 공감과 호기심을 자극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갔다. 화재사건이라는 소재도 죽은사람, 살려진 사람, 살려낸 사람, 그들의 가족들이라는 모두 점이 특이했고 인물들은 하나같이 입체적이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의 유행과 맞물리며 '팬데믹' 시기라는 말과 함께 '슈퍼전파자'니 '감염병'이니 '백신'이니 '지역구 폐쇄령'이라는 낯설었지만 익숙해진 단어들과 그 시기를 보낸 우리들의 감정들이 모두 녹여져 있었다.

간염병과 간병을 재난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것의 시발점이 되었던 가족의 입장(슈퍼 전파자인 해원의 엄마의 입장, 그 가족이었던 해원과 해일의 입장)과 그들로부터 감염된 가족의 입장(식물 인간이 된 시안의 엄마, 가장이 된 시안, 그의 보호자인 아빠)을 모두 입체적으로 다룬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하나의 입장을 들어보면 또 그 역시 아, 이렇게 생각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야기라는게, 소설이라는게 그렇다. 그들이 감염병 이야기를 뉴스로 들으면서도 먼나라 이야기 처럼 들었듯이, 결국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이렇게 살아왔구나 라는 지점까지만 가닿는다. 때문에 각각의 입장을 들었을때도 누구의편도 들을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이건 누가 더 '행복'한가 누가 더 '불행'한가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그렇기에 탓하고 원망하는 얘기도 무조건적인 용서와 화해를 나누자는 얘기도 아니다. 가족의 사랑이 우선이냐 우정은 어떻게 지켜내야 하느냐를 내세운 얘기도 아니다.

결국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우위를 두는 중요한것이 무엇이고(그것이 감정이든, 사람이든, 일이든),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데는 어떤것들이 관여되고 어떤마음을 버려야 하는지(이를테면 기만, 위화감, 불안감, 타인의 삶과의 비교 등)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불행하다고 말해왔지만 불행하지 않던 삶과, 잘지냈지만 잘지낸 척 했던 삶 조차도 누군가에게는 또 그 사소함으로 상처가 될 수 있다. 각자의 삶의 형태앞에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붙잡아 덜 중요한것을 버티고 더 중요한것을 지킬는 자신을 설득시키면서 살아간다.

너무 가까웠기에 병들었고, 가까웠다고 생각한 것보다 더 중요한것을 위해 버렸고, 아파했고, 다시 만나 각자의 삶의 들여다 본 그들은 다시 각자의 방식대로 더 중요한건을 지킨다. 삶이란 계속 무엇이 더중요해, 무엇을 위해 행동할래, 무엇을 지켜낼꺼니 라는 선택들 위에 서있고 결국 그것들의 반복일뿐이다.

비슷한 스토리만 반복하는 드라마로 고정된 텔레비전채널은 지루함을 주듯, 반복되는 삶이 얼마나 사람을 쇠약하게 만드는지. 가끔 고여있는 것 같다가도 삶으로 흘러 넘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것이다. 누구든 한명이 썩기 시작하면 우리는 다 썩을것이다. 오염된 물질들은 멀쩡한 것들까지 금세 전염시키니까. 그래서, 살기위해서, 자신도 모르게 그늘을 벗어나 한걸음, 햇볕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같이 있다 보면 좋은날들도 많겠지만 나쁜 날들도 있을 것이다.

불행해지면 원망할 사람을 찾게 될 것이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영혼을 해칠 것이다.

우리는 함께하지 않는게 나았다.

『페퍼민트』 264p

마지막에 이르러서 가장 첫페이지에서 읽게되었던 바로 그 문장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늘을 벗어나 햇빛으로 한걸음


이건 결국, 한걸음을 더 내딛기 위한 이야기라는 것을.

작가에 말에도 그 한걸음이 등장한다.

한발 앞서, 미리 상상할 수 없을까. 상상해서 미리 면역력을 기를 수는 없을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맞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조금 더 의연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한걸음 한걸음 걸어갈 수 있도록.

그들이 나눈 대화, 그들이 나누었던 선택을 곱씹어 본다.

그러니 정말 이 여름의 쌉싸름한 페퍼민트 향이 퍼지는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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