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버 (양장) - 제15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나혜림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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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에는 고양이가 등장한다. '그 고양이는 밤처럼 검어서, 해가 지면 밤과 분간할 수 없을것 같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고양이는 '샛별(루시퍼, 빛을 발하는자)'이라는 뜻을 지닌 '헬렐 벤 샤하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이 고양이는 중학교 2학년 정인이 앞에 나타나 3400년 동안 일하다 268년의 휴가를 보내고 있는 '악의'없는 '악마'라고 소개했다.

현정인, 빛날 정(炡)에 사람 인(人)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중학교 남학생은 제주도로 가는 수학여행 가정통신문을 받고 들뜨기 보다는 354,260원이라는 돈을 보며 계산을 먼저 해야 한다. 할머니와 함께 살면서 주 3회 일하는 햄버거 가게 알바에서 최저 시급 9,160원을 받으면서 얼마동안 일해야 하고, 킬로그램당 150원을 받는 폐휴지를 얼마나 수거해야 하는지를 계산하며 수학여행을 갈 수 없는 자신의 형편을 생각해야 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우연히 고양이를 마주친 정인이는 아르바이트장소에서 또 만난 고양이에게 따뜻한 패티를 데워주었고, 고양이는 그게 마음에 들었는지 집까지 쫓아와 대뜸 자신을 악마라고 소개한다.


만약에, 그 한마디면 신세계를 맛볼 수 있단다.

악마는 인간의 욕망과 거래를 하기 마련이다.

악마는 정인에게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계속해서 유혹한다.

그리고 뭐든 '만약에'라는 한마디로 바라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악마와 정인의 에피소드들을 보면서 『시간을 달리는 소녀』가 생각이 났다.

타임리프(시간을 이동하는 일)라는 엄청난 능력을 손에 넣은 마코토가 시간을 돌리는 이유들은 하나같이 하찮다.

아침에 마음 놓고 늦잠을 자다가 시간을 돌려 지각을 면하거나, 노래방 시간이 다 되었을때 시간을 돌려 마음껏 노래를 부르거나, 동생이 먹어버린 푸딩을 다시 먹기 전으로 돌아가 꺼내 먹는다던가, 먹고싶은 음식이나 놓친 드라마를 다시보는데 쓰는 등 하나같이 소소한 일에 쓰며 즐거움을 만끽한다.

마찬가지로 악마의 큰 유혹에도 이 중학생 소년 정인은 '바퀴벌레가 한줄로 옆집으로 이사를 가는 일'이라던가 '와이파이가 더 잘터지는 일' 등으로 악마의 능력을 확인하는데 쓰는게 고작이었다.

"넌 하고 싶은게 없나? 소원이라든가, 꿈이라든가. 상상은 할 수 있잖아. '만약에'"

악마의 계속되는 요구에도 정인은 별다른 바람이나 소원을 이야기 해주지 않는 정인의 대답이 인상적이었다.



아저씨가 이해하세요. 소원도 뭘 알아야 빌죠.

성냥팔이 소녀가 성냥 태워서 끽해야 난로랑 칠면조밖에 못 본거랑 똑같아요.


정인이 하고싶은것은 구체적인 소원과 바람이 아니었다.

'선택', 자신이 직접 무언가를 고르는 것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은 온전한 가족도 선택하지 못했고, 가난도 선택하지 못했으며, 따라서 학교에서 수학여행 가정통신문을 나눠줬을대도 '제주도'가 뭐냐 차라리 '어디'가지 숙소가 이게 뭐냐 '어디'가는게 낫지 하면서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친구들과 달리 수학여행 자체를 가느냐 마느냐 하고 선택할 수 있는 상황도 못되었던 것이다.

이것과 저것들 사이에서 고르는게 아니라 그 길밖에 없었던 삶. 어쩔 수 없이 가야하는 삶만을 살아왔던 터라 바람이나 소원은 가당치도 않았다.


'뭘 좋아해?' '뭘 원해?' '하고 싶은거, 갖고 싶은거, 먹고싶은거 없어?' 라고 끊임없이 물어보며 계속해서 욕망을 바라는 악마에게, 정인의 대답은 계속 미뤄지기만 했다. 정인이 학교 아지트에서 텃밭을 함께 가꾸며 친해지게된 비밀 친구 재아에게 마음이 있는 것을 알고 그 마음을 건들여도 보았지만 '어차피 이뤄지지 않을텐데요' '바보같아요' 라는 현실적인 정인에게 '만약에'라고 상상해 보라는 악마의 말은 미덥지 않았다. 그럼에도 정인은 자신의 want와 need를 물어봐 주는 악마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물어봐 준건 고마워요. 누가 나한테 '~하고싶지?'라고 물어봐 준 거 처음이거든요. 내가 뭘 고르고 '선택'할 수 있다는거, 그거 진짜 좋네요.

신은 명령하지만 악마는 시험에 들게 하지. 선택은 인간이 하는거야.

악마는 민주적이구나'라며 정인은 웃었지만, 그게 악의 무서운 점이라는 것을 악마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복지관에서 후원을 받는 문제로 담당 복지사와 대화를 나누던 정인을 보면 정인의 '선택'에 대한 다른 관점에서의 고민이 고스란히 드러나기도 한다.


살아야 하니까 그냥 이렇게 사는거예요.

노닥거릴 여유가 있으면 저도 애들이랑 몰려다녔을거고,

돈만 있으면 저도 에어맥스 구겨신었을거예요.

청소년 요금제만 아니었으면 밤새 게임이나 하고...!


'소원도 뭘 알아야 빌죠'

'자신이 직접 무언가를 고르는 '선택' 을 해보고 싶어요'

'살아야 하니까 이렇게 산다'

정인의 속마음들은 다 이렇게 안쓰럽기만 하다.

늘 할머니의 말씀대로 '불평하면 사는게 지옥'이 되니 불편하게 살지 않아야 하며,

'상상도 지나치면 병'이기에 '기대'거나 '상상'하지 않고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네가 원하는 꽃을 모두 피워줄게.

네잎 클로버로 부족해? 그렇다면 다섯잎, 여섯잎, 일곱잎, 아니 만개의 잎을 가진 클로버를 네게 줄게.


악마의 그 어떤 유혹에도 '바람'의 '만약에'를 외쳐본적 없는 정인은,

자신으로 인해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후회'의 '만약에'를 나열한다.

'만약에 ~하지 않았더라면' 으로 줄줄이 나열되는 후회의 말들을 뱉을 수록 공기중에 가득차며 오히려 그 상상들은 더 먼곳으로 멀어지는것만 같았다.

만약에.. 그 다음은 어떡하지?

정인은 악마의 손에 이끌려 상상 속의 '만약에' 세계를 체험해 보기도 하지만 그 속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난 잃어버리기 싫어. 내 마음대로 안풀린다고 걷어차버리고 싶지도 않아.

기억도, 삶도, 세상도.

정인이는 매혹적이고 황홀하며 현실을 잠시 잊게해줄 만약에의 '가짜' 삶이 아니라, 지금까지 그래왔듯 자신의 삶을 오롯이 책임지면서 사는 '진짜' 삶을 택한다.

방법이 있을거예요.

살아가면서 굳은 살이 생길거예요.


아니요 필요 없어요.

나중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현재도 나한테 풀기 어려운 문제인데요 뭐.

내 삶으로 돌아갈래요.

할머니가 그랬거든요, 불평하면 지옥이된다고.

만가지 가능성을 하나하나 따지면서 살 수는 없어요.

하지만 또어떻게 하나도 안따지고 살겠어요.

만의 하나, 그리고 그것때문에 놓친 구천구백구십구개의 가능성 사이에서 내 식대로 방법을 찾아볼게요.


소년 정인은 현실의 삶에 충실히 '책임'지며 살기로 했다.

한바퀴 돌아 제자리일지라도, 그것은 홈런을 때리고 한바퀴 돌아 1점을 따낸, 그러니까 '뭔가' 달라진 인생이 차곡차곡 쌓여갈 것이라고.

정인은 한걸음 내디뎠다. 또 한걸음. 다시 한 걸음.

정인의 발이 닿는 곳이 곧 길이었다.

악마와의 계약은 끝내 성립되지 못했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 마코토가 시간을 다룰줄 알면서도 시간을 사용했던건 현재의 '즐거움'을 위해서였다. <클로버>의 정인이도 '난 다 들어줄 수 있어'라는 악마의 유혹에 기껏해야 현재의 '불편함'을 조금 해소할만한 바퀴벌레잡기와 와이파이 세칸정도로도 만족해했다. 과한 숙제도, 원치않던 언어능력도 손사레를 쳤다.

한줄평에 썼던것 처럼 그 '만약에'라는 상상은 바람도 가지고 있지만 후회의 형태를 가질 경우가 더 많다. 해도 후회, 안해도 후회, 할 수 없어도 후회,할 수 있어도 후회.

중학생인 소년도 바람과 후회가 섞인 '만약에'라는 말이 부질없다는 것을 알고 진짜 삶에 책임지며 오롯이 걸어가는데, 성인인 나는 그렇게 하고 있나 계속해서 돌아보게된다.

'잘못했다고 말해야지. 변상해야지.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을 한번 더 보고, 좋아하는 친구에게 연락하고, 도와주는 사람에게 감사하고..'

정인이가 상상에서 벗어나 현실과 마주하면서 자신이 해야할일들을 차분히 정리하며 인생의 주인으로서 책임지며 한걸음씩 떼는 장면이 눈부시다.

마지막으로 책을 읽으면서 떠올렸던 가상 캐스팅 3인.

헬렐(고양이)은 배우 이도현, 그리고 정인은 아역배우 최현진(고양이 상으로 캐미가 맞을듯 하다), 그리고 정인의 친구 재아는 아역배우 김민서(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배우다)


해는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을 똑같이 비추고,

비는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 모두에게 내린다.

마태복음 5장 45절을 변형하여 인용한 책의 내용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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