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퍼민트 (양장)
백온유 지음 / 창비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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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페퍼민트(peppermint)차를 내리면 풀향이 집안에 감돌았다.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진정된다고 엄마가 좋아하는 차였다.

'미각'을 깨우는데 도움이 된다고 해서 엄마를 위해 내리던 차였고,

같은 간병인으로부터 건내받아 잠깐의 '위로'와 '휴식'을 가져다 준 차였으며,

박하 향이 섬세하게 빚어낸 평온한 공간 속에서 '용서'의 말을 건내게 한 차이다.

이야기는 '식물적인 인간을 돌보는 일과 식물을 기르는 일이 어느정도 닮아 있다' 는 문장으로부터 시작된다. 이야기의 주인공 시안은 유난히 꽃과 나무를 좋아하여 예민한 식물이라도 죽이는 법 없이 잘 보살피던 엄마의 병간호를 오랫동안 하고 있다.

'요즘 애들중에 누가 이렇게 수발을 착실히 들겠어' '대단하다' '딱하다'라는 노골적인 동정과 연민의 시선도 6년이면 익숙해 진다. 제법 환자를 돌볼줄 알게 된건 삼십년 넘게 간병 경력을 쌓아온 배테랑이자 엄마를 함께 돌봐주시는 간병인 최선희 선생님에게 배웠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돌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누군가의 곁에 있는 시간만큼 미래에 누군가도 나를 지켜주고 있을거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해 보라고 했다.

한 평생 혼자 살지않는 이상 모두 결국에는 누군가를 간병하게 돼. 우리도 누군가의 간병을 받게될거야. 사람은 다 늙고 늙으면 아프니까. 스스로 자기를 지키지 못하게 되니까.

『페퍼민트』 191p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오랜 간병생활을 하는 가족에 대한 이야기 일까? 간병인의 삶을 심층적으로 들여다보면서 그에 대한 주변 시선은 물론 그들의 삶의 고단함과 희망을 놓지 못하는 비루함을 강조한 얘기가 아니다.

이야기는 엄마가 '무슨 일'로 식물인간이 되었을까라는 의문을 품기도 전에, 병원에서 '해일'이라는 예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와의 재회를 먼저 안겨준다. 그러면서 그 친구와의 연락이 끊기게 된 '그 사건'이라는 것이 뭐지, 그래서 이들의 그전 사이는 어땠고, '그 사건'이후로는 어땠고, 다시 만난 지금은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거지라는 생각으로 이끌어나가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잖아 '고의'도 아니었고"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우리 가족 다 지금은 '극복'하고 잘 지내고 있어"

"애초에 '책임'을 물을 수 없었던 일이야"


어딘가 위태로운 이 대화를 나누고 나니, 시안은 한때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냈던 그 '가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그 다음이 어떻게 될지는 생각하지 않은채 이미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가족을 간병하는 시간도 노동시간으로 인정되어 시안은 최저 시급을 받는 노동자가 되었다. 그 월급으로 엄마의 간병용품, 개인 생필품, 식료품을 사느냐 돈을 모으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생활이 이전보다 약간은 나아졌다고 생각하며 위로한다.

같은 병실을 쓰는 어른들은 시안에게 아무렇지 않게 심부름을 시킨다.식판을 가져와달라, 설거지를 대신해달라, 화장실까지 부축해달라, 창문을 열어달라, 닫아달라, 간호사를 불러달라는 등의 부탁을 하루에 수십번도 더 받는다. 몸이 불편한 어른들의 부탁을 거절하는것보다 들어주는 일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엄마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일, 자극하기 위해서라면 가리지 않고 했다. 책읽어주기, 저주파 전류 흘려보내기 등. 그러나 모든 노력과 정성이 물거품이 되는 느낌은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다.

아프면 모두 어린아이처럼 행동했다. 다른 사람을 배려하지 않고 자기만 생각했다. 고마운 줄 모르고. 이게(간병일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도 모르고. 그런걸 보면 괜히 마음이 상했다.

또래 친구인 해원은 시안에게 매일매일 입시, 연애, 학교생활 등 고민상담을 한가득씩 쏟아낸다. 고민이 이렇게 다채로울 수 있다는게 신기했다.

재회한 '시안'과'해원'은 처음엔 데면데면했지만 함께했던 시간이 더 길었기에 호불호, 사소한 습관, 추억이라고 불리는 기억들이 위력을 발휘하면서 금새 가까워졌고 금새 다시 서로에게 기대기 시작했다. 이 무렵의 또래 친구들의 연애 상담, 입시 스트레스, 학교 생활들이 '해원'을 통해 묘사되면, 같은 시기를 보내는 간병인 '시안'의 모습은 더욱더 이질감을 갖고 비교 되며 다가온다.


칠판에 또렷하게 적힌 글자가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이 세계의 법칙들.배려하기. 예쁜말 쓰기. 수행평가 제출하기. 수능 D-150.이곳은 낯설고, 내가 속할 수 없는 세계라는 느낌이 이 들었다.

『페퍼민트』 120p

해원에게는 이 있었다.

주말의 약속과 계획이 있었다. 갑자기 사라지면 걱정할 걱정할 가족이 있었다.

지키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스스로를 가련하게 여길줄 알았다.

자기 사람에 대한 각별함과 애틋함이 보였다.

해원을 알아갈수록 내 삶이 얼마나 비루한지 실감하게 되었다.

『페퍼민트』 159p


시안은 스스로 평범한 고3의 세계를 이미 속할 수 없는 낯선 세계라고 생각하고 있다. 때문에 해원과 함께하는 또래 친구와의 시간 역시 일상이 아니라 일탈같이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각자의 일상 묘사와 고민이 달랐던건 각자 신경써야 할 다른 일상이 있기 때문이다. 해원이 뉴스에서나 보는 노인 고독사 소식이 시안은 병원에서 종종 목격하는 경험이다. 해원이 학원 숙제나 진도에 스트레스 받을때 시안은 엄마의 몸에 욕창이 다시 생길까봐 온신경을 쓴다. 가까이에서 접했기에 '사회복지학과'에 진학해볼까 싶다는 생각나는 대로 한 소재지만 해원에게는 '그거 고될텐데'라는 말이 먼저 나오는 다른세계의 이야기처럼 대답한다.

시안의 일상은 단순했다.

해원은 시안을 만난 후로 모든게 이전 같지 앟았다.

현수와의 관계, 입시, 일상까지 모두 꼬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안에게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들. 시안의 은 단순하고 단촐했다. 엄마와 간병. 그외에 다른건 염두에 두지 않은것 같았다.

『페퍼민트』 253p

그리고 그런 해원 역시 각자 신경써야 할 다른 일상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프록시모 바이러스 유행이 시작되었을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뉴스에서 감염병의 확산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증상이 얼마나 심한지, 신규 감염자가 몇명이나 발생했는지 매일 보도되었지만 우리에게는 먼나라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치사율이 5퍼센트가 넘는다는 뉴스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신경써야 할 다른 일상이 있었다. 해원은 피아노 콩쿠르에 나갈 예정이었고, 나는 가족들과 해외 여행을 갈 생각에 들떠 있었다. 

『페퍼민트』 89p

그리고 이 이질감을 가져다 준 원인이 되는 '그 사건'은 이야기가 ⅓정도 흘렀을때 등장한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감염병의 중심에서 해원의 가족은 슈퍼 전파자 N번으로 불리게 되었다. 시안의 엄마는 감염 후 지금까지 식물인간으로 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저 애가 내가 느끼는 고통의 일부의 일부라도 이해하는 것,과거를 잊고 편히 사는 모습을 더 이상 지켜보지 않겠다는 것이고약한 마음이라는건 나도 알았다.하지만 그래서 뭐?누구의 인생은 망했는데 해원의 행복은 보장되어야 할 이유라도 있나?

그리고 시안은 해일과의 재회하는 순간부터 느꼈던 한때 형제보다 더 가깝게 지냈던 그 '가족'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졌었던 마음의 진짜 속내를 확인한다. '고의'도 아니었고 '책임'을 물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섣불리 그간 적당히 고생했고 드문드문 행복하게 살아오면서 '극복'했다는 말을 꺼낸 가족을 이해하거나 용서할 순 없었던 것이다. 오랜만에 만난다면 '화해'하고 다시 잘 지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그 안일함마저도.

그거 알아? 우리는 견디고 있어. 이 악취를, 시린 소독 냄새를, 좁은 침대를.

엄마는 뭘 견디고 있어? 문득 엄마도 좁은 몸을 견디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를 사랑하면서 엄마 곁에서 보내는 시간을 낭비로 여긴다는게 미안하다.

엄마는 나를 키우는 동안 자신의 삶이 낭비되고 있다고 생각한 적 있을까.

『페퍼민트』 121p


우리는 재난을 준비할 시간이 없었다.

사실 그 누구도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간병을 시작하는 경우는 없다.

그게 마지막 대화라는걸 알았다면 엄마는 내게 무슨 말을 건넸을까?

엄마는, 우리는, 분명 사랑을 말했을 것이다.

『페퍼민트』 220p

백온유 작가의 작품은 심리를 잘 파고든다. 어떤 사건에 대해 우리가 갖는 일반적인 겉핥기 감정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숙한 곳의 원초적인 감정을 툭툭 잘 내뱉고, 머리나 가슴으로 이해하려 하기 전에 그저 와닿는다.

그래,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그런 느낌으로 글을 읽어나가게 만든다.

바로 이전작품인 『유원』이 그러했다. 일반적인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 아 정말이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라는 묘한 공감과 호기심을 자극하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갔다. 화재사건이라는 소재도 죽은사람, 살려진 사람, 살려낸 사람, 그들의 가족들이라는 모두 점이 특이했고 인물들은 하나같이 입체적이였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코로나19의 유행과 맞물리며 '팬데믹' 시기라는 말과 함께 '슈퍼전파자'니 '감염병'이니 '백신'이니 '지역구 폐쇄령'이라는 낯설었지만 익숙해진 단어들과 그 시기를 보낸 우리들의 감정들이 모두 녹여져 있었다.

간염병과 간병을 재난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것의 시발점이 되었던 가족의 입장(슈퍼 전파자인 해원의 엄마의 입장, 그 가족이었던 해원과 해일의 입장)과 그들로부터 감염된 가족의 입장(식물 인간이 된 시안의 엄마, 가장이 된 시안, 그의 보호자인 아빠)을 모두 입체적으로 다룬다.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하나하나의 입장을 들어보면 또 그 역시 아, 이렇게 생각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이야기라는게, 소설이라는게 그렇다. 그들이 감염병 이야기를 뉴스로 들으면서도 먼나라 이야기 처럼 들었듯이, 결국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이렇게 살아왔구나 라는 지점까지만 가닿는다. 때문에 각각의 입장을 들었을때도 누구의편도 들을 수 없었다.

분명한 것은 이건 누가 더 '행복'한가 누가 더 '불행'한가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그렇기에 탓하고 원망하는 얘기도 무조건적인 용서와 화해를 나누자는 얘기도 아니다. 가족의 사랑이 우선이냐 우정은 어떻게 지켜내야 하느냐를 내세운 얘기도 아니다.

결국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우위를 두는 중요한것이 무엇이고(그것이 감정이든, 사람이든, 일이든), 타인과의 관계를 유지하데는 어떤것들이 관여되고 어떤마음을 버려야 하는지(이를테면 기만, 위화감, 불안감, 타인의 삶과의 비교 등)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불행하다고 말해왔지만 불행하지 않던 삶과, 잘지냈지만 잘지낸 척 했던 삶 조차도 누군가에게는 또 그 사소함으로 상처가 될 수 있다. 각자의 삶의 형태앞에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붙잡아 덜 중요한것을 버티고 더 중요한것을 지킬는 자신을 설득시키면서 살아간다.

너무 가까웠기에 병들었고, 가까웠다고 생각한 것보다 더 중요한것을 위해 버렸고, 아파했고, 다시 만나 각자의 삶의 들여다 본 그들은 다시 각자의 방식대로 더 중요한건을 지킨다. 삶이란 계속 무엇이 더중요해, 무엇을 위해 행동할래, 무엇을 지켜낼꺼니 라는 선택들 위에 서있고 결국 그것들의 반복일뿐이다.

비슷한 스토리만 반복하는 드라마로 고정된 텔레비전채널은 지루함을 주듯, 반복되는 삶이 얼마나 사람을 쇠약하게 만드는지. 가끔 고여있는 것 같다가도 삶으로 흘러 넘치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그렇게 축축해지고 한번 젖으면 좀처럼 마르지 않는다. 우리는 햇볕과 바람을 제때 받지 못해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필것이다. 누구든 한명이 썩기 시작하면 우리는 다 썩을것이다. 오염된 물질들은 멀쩡한 것들까지 금세 전염시키니까. 그래서, 살기위해서, 자신도 모르게 그늘을 벗어나 한걸음, 햇볕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야 한다.

같이 있다 보면 좋은날들도 많겠지만 나쁜 날들도 있을 것이다.

불행해지면 원망할 사람을 찾게 될 것이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화풀이를 하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영혼을 해칠 것이다.

우리는 함께하지 않는게 나았다.

『페퍼민트』 264p

마지막에 이르러서 가장 첫페이지에서 읽게되었던 바로 그 문장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늘을 벗어나 햇빛으로 한걸음


이건 결국, 한걸음을 더 내딛기 위한 이야기라는 것을.

작가에 말에도 그 한걸음이 등장한다.

한발 앞서, 미리 상상할 수 없을까. 상상해서 미리 면역력을 기를 수는 없을까.

우리가 살아가면서 맞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조금 더 의연할 수 있도록.

계속해서 한걸음 한걸음 걸어갈 수 있도록.

그들이 나눈 대화, 그들이 나누었던 선택을 곱씹어 본다.

그러니 정말 이 여름의 쌉싸름한 페퍼민트 향이 퍼지는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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