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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과 기분
김봉곤 지음 / 창비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가장 소중한 걸 잃고, 가장 바라는 걸 얻었어.

<시절과 기분> 앤드게임, 김봉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고,

그와의 일을 글로 써 '소설가'가 된

'지금'의 자신을 긍정하고 싶을 때 떠올리는 문장이다.

이제 그와의 일을 '글'로 쓴다는 것(문학)

이제는 홀연 마음이 '떠나버린 누군가를 대하는 기분'을 마주하는 것이었고,

결국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

그의 이름을 바꾸지 않는 것이었다.

-형섭

나의 첫 대뷔 소설 뿐만아니라 첫 단행본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다면

그는 어떤 기분일까?

그러나 아직은 자신이 쓴 글(문학, 소설)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만든 시간(삶)속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는 걸 느낀다.

"문학 아닌 삶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마는 것이다.

글을 쓰는 시간보다 살아야 하는 시간이 압도적이라는 것.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 할지라도 아직은 굴복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나는 그것을 알아야 겠다. 내가 무엇을 정말 쓰고 싶었는지를.

그때 내가 느낀 감정의 형태를

그와 나의 눈물의 이유를

나를 무너뜨린 마음의 정체를

되찾을 풍경과 열린 시간 속에 그의 모습을 나는 꼭 알아야 겠다.

아직은 삶의 시간에 질 수 없다.

<시절과 기분> 김봉곤

다시 한 번 내 시간 속에서 내 시간 속의 그를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


김봉곤의 『시절과 기분』

이 소설을 읽기 전에 아주 짧은 사족을 얘기하자면 며칠전으로 거슬로 올라간다.

며칠전, 지인과 북카페에 갔을때 (물론 목적은 수다였지만) 카페의 책장에서 제목이 마음에 드는 책을 하나씩 골라 자리에 앉았다.

지인이 최은영의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책을 선택했을때, 난 이미 예전에 읽었던 책이라 옆에서 신나게 스포를 해댔다.

"나 이거 읽을때, 중반까지 동성앤지 모르고 읽었잖아 ㅎㅎ"

책을 읽으면서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의 저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성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설 속 두 사람이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헤어지는 무렵에 와서야 상대가 동성이라는 것을 인지했다는 것은 비단 이름이 중성적이기 때문만은 아니였다. 책 속 단편 「그 여름」과 「고백」 에서 여성 동성애자가 등장 했었고 그들의 연애사를 읽는 것은 낯선 경험이였다. 그러자 지인이 '그러고 보니 일전의 쇼코의 미소도 우정인지 연애인지 모르게 애매한 글이였잖아. 이 작가가 그런 글을 잘쓰나 보지.' 라고 답했다.

그게 고작 며칠전의 일이였는데.

이 책의 초반부터 너무나 당연하게 '이별'의 통증을 겪는 두 사람이 남녀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나는, 한참동안 책장을 넘기며 지나고 나서야 '아, 이 두 사람 남성 동성애자였구나' 라는걸 알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는 그의 억양, 키·몸무게·발사이즈까지 같았던 체형, 옷과 스타일을 항상 골라주어야 했던, 무던하고 무심한 타입이지만 과묵하진 않던, 나와 닮은사람.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헤어지고서도 이년을 더 함께 살아,

나와 오년을 함께 살았던 사람. "

이라는 부수적인 설명이 나올 때에도,

'응? 어떻게 남녀가 키,몸무게,발사이즈가 같을수가 있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읽어나갈정도로 편견은 이어졌다. 편견은 그 틀안에서 무너져 있는 디테일을 그냥 넘어가게 만들정도로 울타리가 큰 모양이였다.

심지어 책 속에서 '게이'라는 단어가 등장했을때도,

'아! 남자가 게이라는걸 깨닫고 여자를 떠났구나!'라는 바보같은 스토리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더더 뒤로 가서야 아차 싶었던 나는, 그 지점에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이별한 두 사람은 모두 남성이다. 라는 지점에서 다시 시작한 글,

『시절과 기분』 이다.


우리는 '시절'에 대해 이야기해도

'기분'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진 못한다.

<시절과 기분> 앤드게임, 김봉곤

(익숙한 풍경) 시원했던 여름집, 물까지 얼어버렸던 추운 겨울, 꾸벅이던 아침, 각자의 어머니가 보내주신 밥을 먹었던 집, 기르던 강아지가 문지방을 다 갉아 놓은 집이 그 장막 너머에 있었다. 우산을 일층으로 던져주던 모습, 항상 내차지던 화장실 슬리퍼, 그를 배웅하던 현관 등이 그 너머에 있었다.

(익숙한 대답) 효효, 끼오옹! 컁캬아아앙- 미쳤돼지다 … 등

우리만의 유행어는 여전히 쓰면서도, '자기야'에서 '야'로 바뀐 호칭을 줄임말로 착각하는 일 같은건 하지 않는다.

우리가 연인이던 시절, '함께 살던 시절'의 바람이나 불행, 추억할만한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 할 수는 있어도 '사랑했던 우리'(의 기분)에 대해서는 마치 그랬던 적이 없었던것처럼 말을 꺼내지 않는다.

(그때의) '일상'에 대해 얼마든 말해도 좋았지만, 내가 너를 얼마나 '좋아'했었는지, 그때 네가 찾아와 얼마나 '기뻤'었는지, 사랑을 나눈 일이 얼마나 '짜릿'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불문율이었다.

사건만 남기고 감정을 제거한 선택적 추억이라는게 있을 수 있을까.

이쯤 되니 '시절'이라고 말하는 시간적 과거와

'기분'이라고 말하는 감정적 과거의 차이점을 조금은 알 것 같아서,

참으로 탁월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그와 내가 연인이었던 시절을 지나,

연인이 아니었던 시절도 지나,

점차 친구라는 사실조차 희미해져갈 것임을.

이제는 그에 대한 글을 쓸 수 없음을,

그에 대한 글은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임을,

그러니까 앞으로 만나게 될 그는

소설이 될 수 없는 사람으로만 만나게 될 것을 예감한다.

<시절과 기분> 김봉곤

시절은 지나간다.

감정도 지나가는 것일까.

때때로 감정은 고여있는 것 같기도 하다가, 때때로 넘쳐나기를 반복한다.

감정이 지나갔다는 말은 써 본적이 없다.

아아, 그렇구나. 그래서 그 시절을 돌아볼 때의 감정은 그때마다 다르구나.

아무것도 아니였다가, 좋아보였다가, 서글펐다가, 그렇게 달라지는 구나.

이별을 겪었을때의 감정은 죽음을 받아들일때의 감정변화와 비슷하다고 했다.

부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분노하고, 협상하다가 절망하고, 이내 수용하게 된다 했던가. 그렇게 수용하는 듯 하다가 다시 부정하는 것으로 가는 건 아닐런지.

감정이 남아 있을땐 다시 시작하고픈 마음이 부풀어 올라 수용은 더더욱 힘들겠다.

" 나는 그에게 정말 많은 것을 받았고, 나 역시 그에게 많은 것을 주었지만

정작 자립을 가르쳐 주지 못한 자격 미달의 선생처럼,

좀, 실패한 사람의 기분으로,

그럴 필요도 없으면서 안타깝고 미안한 마음이 되어 … "

미운거 같다가, 미안했다가, 용기내려 하다가도, 이내 자신없어지고 마는.

감정은 그 시절 안에 있을 때도 마음대로 할 수 없더니

그 시절 밖에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잊혀지고 싶지 않다.

잊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 애써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김봉곤 작가의 전작인 『여름, 스피드』 가 영화 Call me by your name 의 원작소설인 『그해 여름 손님』 의 제목과 비슷해서 일까, 같은 소재를 다루어서 일까, 어쩐지 자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엘리오가 우는건 그 시절 때문일까, 지금의 기분 때문일까.

그건 모르는 일이다.

『시절과 기분』 을 읽다보니 김봉곤의 전작이 궁금해 졌다.

이번에 두번째로 등장한다는 이름을 첫번째 작품에서 찾기 위해서 였다.

김봉곤 작가를 몰랐다 하여 편견으로 읽었다고 했던가.

김봉곤 작가를 알았다 한들, 당연히 동성애 소설이겠지 하고 읽는것은 또 맞는건가.

그것 또한 모르는 일이다.

어쨌건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졌고, 그와의 일을 글로 써 '소설가' 되었다고 말하던 대뷔작 「Auto」 , 그리고 그 연장선인 「컬리지포크」 품을 찾아 읽어보니 반가운 이름이 나왔다.

-형섭 (그)

-쿠마 (그와 기르던 강아지)

그리고,

어느날 갑자기, "나, 이제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구." 라며 이별을 선사하는 연인.

그렇게 헤어지고도 이년을 더 동거했던 연인.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라는 이별의 순간을 맞이하던 그들이 있었다.

툭, 내뱉는 이별의 말은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가 생각나게 한다.

갑작스럽고 일방적이라 받아들이기 힘들다.

'나를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나의 세계에, 사전에, 사랑하지 '않는'일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사랑의 정의처럼 사랑 역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사랑하지 않는 세계를, 그때의 나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렇게 '모르는 상태'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사랑의 글쓰기'를.


강렬했던 사랑이 지나간 뒤에 그 사랑의 대상에 대해 쓰기,

허무하고 진부한 연애사건으로 잘못 기억될 뻔했던 것을 사랑으로 다시 쓰기.

-나는 모르겠다, 나는 알고 싶다.

글을 쓰는 이유, 딱 두줄, 단순하고 자명했다.

시절과 기분은, 이별 앞에서도 사랑의 시간으로 걸어가는 길의 연장선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단순히 이별을 못받아들인다기 보다, 이 기분은 뭘까, 이별 한 뒤에도 사랑할 수 있는걸까, 그 시절이 아름다워서 못있는걸까 네가 여전히 아름다운걸까, 등을 끊임없이 물으며 시절과 기분에 다가서는 느낌이다.

우리에게 반짝임이 남았다면 그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나는 모르겠고 그러기에 더욱더 알고 싶어진다.

어쩌면 사랑은 영원히 정의되지 못한채 부유하며

말할 수 없음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것을 느꼈다 라고 말하는 수 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소설가는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책 한권을 써내며,

음악가는 음악을 만들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누군가는 춤을 추며 투박해지는 것에 저항한다.

<여름, 스피드> 김봉곤

아직은 삶의 시간에 질 수 없기에,

계속해서 저항하고 있는 느낌의 책, 『시절과 기분』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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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로하, 나의 엄마들 (양장)
이금이 지음 / 창비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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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은 400여쪽 페이지에도 불구하고  #놀라운_몰입도 라는 해시테그가 붙여질정도로 책을 펴는 순간부터 정말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한번에 읽게된다. 400여페이지나 되는 소설인데, 한편의 대하드라마를 본 느낌이랄까, 장면의 묘사와 인물의 대화들이 너무나 생생히 서술되어 있어 이야기에 빨려들어가는 몰입도가 정말 대단했다. 술술술술 읽힐뿐더러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거듭되는 반전과 예측할 수 없는 전개가 책에서 손을 놓을 수 없게 했던 것 같다.

'아프게, 기쁘게, 뜨겁게 인생의 파도를 넘어서며 살아갈 것이다.'

라는 대사속에 우리네 인생사를 '아프게, 기쁘게, 뜨겁게' 라는 세가지 표현으로 밀도있게 압축한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어렸을 때 '모질게, 독하게, 그리고 진실되게' 살아가자는 표현을 좋아했었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되돌아 보건데 그 세가지의 마음가짐 중 어느것 하나 실천하지 못했다.
그러나 다짐의 말이 아닌,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기쁨과 슬픔, 그리고 열정의 감정의 말. 이 세가지를 파도와 함께 빗대어 표현한 저 문장이 마음에 와 닿았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을 끝까지 읽었을때 머릿속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던 문장은 내용상 스쳐지나가던 사소한 문장이였다.

이 시대에 태어났으니, 이 곳에 남겨졌으니, 이 생에 나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결국 나이기에.
'어떻게든. 이곳에서. 살아야한다.' 라는 말.
소설속 인물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마음으로 내내 살아왔는지를 알려주는 이 문장이, 이 소설을 내내 관통하는 핵심문장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난 이시대의 사람들은, 너는 어떻게 살고있느냐고 묻는것만 같았다.


1917년, 어진말
“버들애기씨 내년이면 열여덟이지예? 포와(하와이)로 시집가지 않을랍니꺼?”
로 시작되는 소설의 가장 첫 말.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나는 소설의 첫 한줄, 영화의 첫장면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이 첫줄을 읽으면서 피식 웃었다. 소설의 원칙에 아주 충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시대, 주인공, 나이, 지역, 그리고 시집이라는 단어가 주는 앞으로 펼쳐질 그 시대의 여성의 연대기 라는 것을 단 한 줄로 모두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소설의 몰입도는 이렇게 첫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왜 하필, 포와였을까. 왜 여성들은 사진신부가 되어 포와까지 가야 했을까.
눈길이 갔던 대목은 양쪽 다 주체성을 '빼앗겨있다' 는 점에서 닮아 있다는 것.

소설을 읽다보면 사실 인물관계도가 가장 헷갈려서 읽으면서 옆 종이에 이름이 나오는데로 일단 받아 적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이소설은 아주 간결하게도 세 여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고, 그 중에서도 [버들]로 나오는 주인공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이야기라 인물관계도를 정리할 필요가 없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했던 건 사실 시대적 배경지식을 얼마나 아느냐였던 것 같다.
정확한 시대 배경을 잘 몰랐던 나는, 중간 중간 녹아있는 역사적 사건들을 검색하기도 했다.
인물이나 사건들이 실제 있었던 일들을 바탕으로 그려져 있어, 소설이 역사적 고증을 잘 거쳤구나 싶었는데, 역시나 소설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 참고문헌이 기록되어 있었다.

『알로하, 나의 엄마들』에서는 드라마같은 내용전개도 전개지만 이념의 갈등의 표현이 압권이였다. 우리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러이러했었다고 한줄은 요약으로 알고있는 과거사실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해 생생히 묘사되어 살아난다. 감히 그랬더랬다라고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한느낌이다. 피부에 와닿는 체험을 한것같이 이입되어 불편하고 고통스러운 감정을 겪게 되었다.
그렇게 세 여성으로의 연대기 외에도 이주민의 삶, 교민사회, 독립운동, 이념 갈등, 노동 현장들을 자세히 알게 될뿐만 아니라 간접 체험하듯 엿볼 수 있다.

여기에 나오는 여성은 자신의 삶을 이끌어 가는 자세가 주도적이고, 주체적이며 시대에 맞서고자 앞장서고자 하는 진취적인 여성상으로 그려진다. 개인적으로 이 당돌함과 시대의 불합리성에 항거하고 나라의 어려움에 기여하고자 하는 마음들이 100여년이 지난 지금 상상해서 그려진 인물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TV에서 지난 수천년의 (남성 서사 중심의) 역사속에서 과연 여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기여한 일들이 없었을까에 대해 담론을 나누는 것을 본적 있었다. 아니 단지,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다. 라는 결론은 꽤나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때문에 배움에 대한 열망,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 자기주도적으로 설계하여 자유롭고 자주적인 삶을 살아가고자 그 시대의 10대 여성의 삶은 대부분 버들이나 홍주의 모습이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소설속에서 1919년도에 독립운동에 대한 언급부분에서 유관순 열사와 함께 서대문 형무소에서 수용되었던 수많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생각나는건 그녀들과 나이가 비슷했기 때문이였을지도 모른다.)

다만, 모두를 기록하지 못했고, 기록되지 못했을 뿐.

‘딸은 출가외인이 될 사람이니 어릴때부터 기대조차 하지 않던(63p), 남자가 첩을 두는 건 흉이 아니지만 과부의 재가는 흉이 되는 곳(80p)이 조선'이었다는 시대적 배경속에 결국 편승되고 꺾였을 꿈이였을테지만, 그 시대의 여성들은 분명 깨어있고 시대인식을 바꾸고자 부단히 노력해 왔으리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기록된 여성들의 이야기(천연희, 이희경, 한국이민사박물관)로 사회, 정체, 경제 상황에 대한 이해와 여성사에 대해 추측해 볼 뿐이다.

책을 읽으면, 마지막 챕터의 반전과 함께 여성들이 가장 공감하면서 읽었을 법한 부분이 바로 이름에 대한 부분이다. 김춘수의 <꽃>처럼, 이름이 지어지고 불려지는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고 말하는 존재론 적인 관점에서, 이 책에서의 스스로 이름을 짓고자 하는 장면은 무엇보다 의미가 있는 장면이였다.

하와이가 아닌 포와, 붙들이가 아닌 에스더, 진주가 아닌 펄.
그래서 인지 나중에 그녀의 딸이 "I'm Pearl." 이라고 하는 장면은 어쩐지 진한 울림을 준다.


"우리 배 타기 전에 서이서 사진 한번 박자."“



버들, 송화, 홍주의 사진
(*천연희님의 사진을 참고해서 그려봄)

신체검사를 통과하고 떠날 날이 잡혔을 때 홍주가 말했다. 포와에 닿으면 한 사람의 배우자가 되는 것이다. 그 전에 먼 길을 함께 온 친구들과의 모습을 사진으로나마 간직하고 싶었다. 셋은 사진관으로 갔다.

(가짜인)꽃다발, (기생에게나 어울릴 것 같은)부채, (무난한) 양산. 가짜라 탐탁지 않았던 꽃다발도 사진 속에선 진짜 같아 보였을 그 사진속에는 아직은 애기같았을 송화, 우직한 버들, 경험이 많아 대범하고 꾸밀 줄 알았던 홍주가 있었다.

세 사람은 5월의 신부가 되어 누군가의 아내가 되기 전, 그러니까 누구댁, 누구 엄마가 되기 전 온전히 '자신'으로 있을 수 있는 순간을 기념하며 사진을 찍어 남겼다.

그리고 그 뒤로도 기념이 되는 몇장의 사진들을 남기며 자신들의 삶의 연대기를 기록했다.
(그 사진들이 담긴 상자는 후에 판도라의 상자가 된다.)

앞서 언급했던 여성사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던 점이 아쉬웠기에, 독립운동가들이 거사를 치르기전에 남기던 사진처럼 이 세사람의 사진이 결연하게 느껴졌다. 천연희님의 사진이 그시대 사회, 경제, 전반에 걸친 역사적 사실을 고증해주는 중요한 자료로 남아있는 것을 생각하니 이들이 사진찍는 모습이 무척이나 찡하게 와 닿았다.


"고마, 퍼뜩 일나소. 지 손도 놓칠 깁니꺼?"
버들의 걸크러쉬 장면과 버들의 지극히 소박한 바람들.
버들은 낯선 땅에 갈때도, 그곳에서 마음을 둘때도, 마음을 두고 살아갈때도 내내 따뜻했다.
얼마나 애를쓰고, 얼마나 힘쓰고, 원망하고, 분해하고, 난리도 아니였던 그야말로 어느 한가지도 쉬운게 없었던 삶의 파도 속에서 파도가 일으키는 물보라마다 무지개가 스도록 삶을 꾸려나가던 사람이 버들이였다.

그녀들이 키운 자녀들이 후에 자신의 부모세대를 부끄러워해야 할지, 자랑스러워해야 할지, 불쌍하게 생각해야 할지 헷갈려 하더라 할지라도 그녀들은 치열하게 그 시대의 파도를 넘어온 것이다.

'내는 여까지 오는 것만도 벅차게 왔다.
인자는 니가 꿈꾸는 시상 찾아가 내보다 멀리 훨훨 날아가그레이.
그리고 니 이름처럼 고귀한 사람이 되그라.'
<알로하, 나의 엄마들> 이금이, 마지막장

버들은 편안하고 환한 얼굴로 자식에게 얘기해준다.
자식은 온 생에 꿈을 꾸고, 찾고, 쫓아온 세 엄마들의 생을 다 이해하진 못하더라도 비록 꿈을 이루지 못한 엄마가 이제껏 매순간, 최선을 다했으리라는 그 마음을 알게된다.
펄은 웃으며 내리는 비를 피하지도 않고, 다가오는 파도를 두려워 하지도 않으며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갈 것이라고 다짐하며 이야기는 끝이 난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어느 한가지도 쉬운게 없었다.

파도는 부서질 것을 알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나도 그렇게 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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