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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이 온다 ㅣ 창비교육 성장소설 10
이지애 지음 / 창비교육 / 2023년 8월
평점 :
내가 성장 소설을 좋아하는데는 이유가 있다.
성장소설에는 항상 중요한 키워드로 '호의의 연대'를 말한다. 물론 어떠한 상처를 극복하는데 자신의 마음먹기와 행동이 최우선이겠지만 거기엔 늘 관계 맺기가 있다.
누군가와 연대하고 누군가 마음을 나누고 보다듬고 그것을 또 누군가에게 나눠주는데 까지 이르러야, '성장'이라고 말하는 것에 다다르는 것이 성장소설에 큰 특징이다.
늘 내가 받은 호의를 다른 다시 전달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이 소설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은, 그리고 어쩐지 뭉클해졌던 대사는,
"그러게 서로서로 좋은것만 줘야지. 결국 이렇게 돌아오잖아"라는 한마디였다.
' 사랑도 받아본사람이 잘받고 잘준다 ' 고 했던가.
호의를 받아본적 없는 사람은 그것을 언제 어떻게 갚아야할지 몰라 어색해 한다. 주는것도 받는것도 익숙치않다. '호의는 반드시 돌려받기 위해 주는것이 아니라는 것' 을 모를리 없지만서도 그것에 안절부절하며 '어쩔 줄 모르겠다'며 굳은 표정을 하는 친구들.
여기에 나오는 친구들은 그랬다. 도무지 '익숙해 질 수 없는 호의', 모든게 낯설기만 해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는 친구들.
'어떻게 되는 것도, 어떻게 크는 것도 바란적 없이, 어떻게든 되겠고, 어떻게든 컸잖아' 라고 말하는 아직 어른이 덜 된 이 친구들은 '보호 종료'가 된 '자립 준비 청년'이다.
이 소설은, 그룹홈에서 자란 친구들이 독립해서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서로의 독립을 지켜보며 서로를 돌보고 위하는 마음이 가득담긴 책이다.
어떤 것들을 받았기에, 좋은 것들만 줘야지, 라고 말 할 수 있는걸까.
"결국 돌아오니까 서로 좋은것만 줘야지"라는 말은 정말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말이다.
이 책의 주요 인물들인 민서, 해서, 솔은 '그룹 홈'이라고 부르는 '공동 생활 가정'에서 함께 지낸 친구들이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친권을 포기하면서 맡겨진 김민서(6), 이혼과 재혼으로 맡겨진 민해서(10),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신고하면서 맡겨진 윤솔(9)이 만난 나이는 다 10세 이하일 때였다.
그룹홈은 부모가 돌볼 수 없거나 부모가 돌보기를 거절하여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이 모여 사는 집이다.
학교에 다니는 (또래)아이들과
최대한 '비슷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도록 하는게
그룹홈의 목적이라고 했다.
그룹홈은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이 그룹을 지어 '보통 가정'과 '비슷한 가정 환경'을 만든다. 일단 보육원, 고아원과 같은 '시설'이 아니라 일반적인 주택이나 아파트같은 주거지에서 생활하며, '담당 사회 복지사'들이 보호자 역할을 한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기에 이곳에 적응했다'는 말처럼 해야 할 일과 하면 안되는 일이라는 '규칙'들 속에서 이를 지키며 지내는 입소생활을 한다. 그리고 그 규칙의 최종 단계가 바로 '통장에 찍힌 오백만원의 자립 지원금과 함께' 떠밀리듯 '18세가 되면 시설에서 나가야 한다' 라는 규칙이다. '보호종료아동'이 되는 것이다.
'보통가정'처럼 보이기 위해 보통의 주거에서 살다가 갑자기 오백만원과 함께 살곳을 잃은 아이들은 곧바로 살곳부터 찾아야 했다. 살아간다는건, 살 곳이 있는것이 전제였다.
'보호'가 '종료'된 채로 살아간다는건, 살 '곳'을 마련해야 하고, 그렇게 살림을 차렸으면 나아갈 방도를 꾸려나가며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 '보호'자였던 '자립지원전담요원'의 역할도, 돌봄도, 집도, 모두 직접 구해야 한다.
이 모든 일은 '누구나' '언젠가' 해야할 일이지만,
'보호아동'의 '보호 종료'에는 '선택'이 없기에
'보통가정'의 '독립'과는 다르다.
'보통 가정' 이라는 것은 온전한 부모 아래의 가정을 말한다.
그러니까, 부모를 '선택'한 적 없지만 부모가 '온전히 있다'는 것을 말한다.
온전한 부모가 돌보는 가정에서 자라는 것이 '옳은 인생'이라면,
그렇지 않은 가정에서 자라는 것은 '오점 인생'이 되는걸까.
남들과 다른 까닭에 설명할 게 많은 인생은 피곤했다.
자세히 설명한다고 더 환영받는 것은 아니기에
시간을 들여 설명하는 일은 분명 손해였다.
남들과 '다른' 까닭에 '설명'할게 많은 인생은 피곤한 삶,
누린 적 없는 삶의 형태를 평균으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하는 모습이 모든걸 말해준다.
'온전한'이 '완벽함'이라면, '다름'은 불완전이고 불안함이된다.
'다름'은 '놀림'의 대상이거나 '약점'이되었기에 자연스럽게 '오점'처럼 남겨져있다.
어쩔 수 없이 상처받는다.
상처의 원인을 생각하는 방식은 제각각이였고, 거기에 따른 방법도 제각각이었다.
민서는 어렸을때부터 '아빠 탓'을 했다. 그러나 해서와 솔은 '자기 탓'을 해왔다.
"부모를 바꾸는것보다 나를 바꾸는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나한테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게 쉬웠어. 그게 희망이었고"
그들을 둘러싼 환경은 같았으나 살아가는 모습은 달랐다. 서로의 변화가 궁금했기에 그들은 자립하고 나서도 자주 만나게 되었다.
세상이 무너지는 '슬픔'을
'불행'이라는 두글자에 담기엔 그릇이 너무 작게 느껴졌다.
상처에 대한 기억은 그 '상처를 되물림하고 싶지 않다'는 공통적인 특징을 갖고있지만 여기에 나오는 세명은 모두 다른 생각과 '반대의 선택' 을 보여주었다.
"나는 아빠와 닮지 않기 위해 아빠가 해 온 모든 것들을 하지 않기로 했다."
라며, 반복되지 않기 위해 '그 사람'은 물론 '그 사람'이 살던 방식과 최대한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민서였다. 최고로 좋아하는 것보단 최선의 선택을 했고, 책임 질 수 있는 것들만 책임지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준다.
"난 엄마처럼 삻기 싫어,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게 내 소원이야."
반면 내가 완벽하지 않았기 내가 부족했던 부분은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그 마음으로 어떻게든 채워주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해서였다. 완전한 구슬이라는 뜻이라는 '완벽'이를 태명으로 짓고, 완벽한 가정에서 행복하게 키우겠다는 꿈을 꾸는 모습을 보여준다.
"다들 아빠를 너무 나쁘게만 생각하는거 같아."
한번을 미루고 다음 한번을 더 미루며 마음과 행동이 바뀔지도 모른다며 '다시, 잘 살거라고 믿었어'라며 희망을 품고 사는 사람은 솔이였다. 계속해서 기대하며 불행은 한때였을 뿐이며 다른 사람에게도 찬성표를 받고 싶어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닥인줄 알았는데 더 바닥이 있더라.
이것보다 더 바닥도 있을까봐 사는게 너무 무서워.
책 속에서 유일하게 '희망'이라는 것을 품고 살았던 솔이가 이런 말을 했을 때도, '나도 매일 밤 영원히 잠들게 해달라고 빌어'라고 대답하며 '이게 슬픈 얘기던가'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상처가 너무나 익숙하고 당연하게 물들어 있는 것이 이 친구들의 대화였다.
자립 준비금으로 받았던 돈이 오백만원이였던가, 그 돈을 받고 세상에 나왔을때 얼마나 막막했던가.
그러나 돈이 필요하단 소리에 오백은 줄 수 있어 선뜻 빌려줄 정도의 사람이 그룹홈의 친구들이였다. 그들에게는 부모와 자식간에도 얻을 수 없었던 연대와 믿음이 분명 존재했던 것이다.
"책임지지도 않을 거면서 제멋대로 주는 호의는 악의보다 나쁘다."
'선량한 얼굴로 선물을 사들고 그룹홈으로 찾아오다가 마음을 주면 어느순간 발길을 끊는 가족 단위 봉사자들'도, '먹을 것을 챙겨주면서도 아빠 욕을 하던 식당 이모들'도 '동정'이란 이름으로 남게되는 잘해주다가 쉽게 멀어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오히려 사람을 더 아프게한다. 타인을 믿는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하고 조심해야 할 일이 아닐까.
그들은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그래도 그들은 끝까지 '호의의 연대'를 말한다.
갚고, '살아'
'갚고 살아', 민서는 나를 놓지 말라는 말을, 그래도 우리는 서로를 놓지 말고 같이 살자는 말을 하기 위해 '살아' 라는 말에 힘을 주며 말했다. 갚는게 사는 이유가 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빚지고 갚으며 사는 것을 반복한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기대어 운다. 상처 받는 일은 허다하다. 다만 부디 홀로 울지 않았으면.
두렵다는 이유로 사람을 끊어내는게 아빠같은 방식 같았다.
나는 솔 언니와 해서 언니를 끊어내고 싶지 않았다.
전부 부질없더라도, 다시 상처받더라도, 결국 실패하더라도
나는 믿어보기로 했다
그 마음이 모아 세사람은 완벽이를 만날 준비를 한다.
무서워요. 어떻게 해야 해요?
완벽이를 처음 만나서 하는 말은, 너무나 작고 소중한 이 존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서 무섭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차분히 아이를 안으며 '완벽이는 이런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 는 사실을 책임감으로 받아들였다. 네가 겪을 세상에는 부디 내가 겪은 아픔은 없길, 부디 따뜻하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완벽이는 이런 일을 겪지 않기를 바란다' 는 마음으로 다음 세대에게 연대하듯이, 우리도 우리가 겪은 상처와 불편함과 오점을 대할 때, '너도'가 아니라 '너라도'라는 마음으로, 호의를 연대하며 앞으로의 세상으로 나아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