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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밀하게 나를 사랑한 남자
에릭 포토리노 지음, 윤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1월
평점 :
사서에게 책을 빌리려는데 그녀가 나를 슬쩍 한번 쳐다본다. 제목때문인가? 라는 생각이 들면서 하긴 나도 처음 제목을 들었을땐 그랬지 싶어 웃었다. 이 책 야한 책 아니라구요, 라면서 변명을 하고 싶었지만 참았다. 궁금하면 직접 찾아 보던가, 그렇게 몸짓으로 말해주곤, 나는 생각했다. 사실을 알게 되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사랑은 없다는걸 바로 알아차릴텐데 하고. 그 은밀하게 나를 사랑한 남자가 작가의 의부란 것을 말이다. 요즘 같이 의붓자식을 학대한다는 뉴스가 연일 신문에 tv에 정신 사납게 장식하는 시대에, 신선했다. 누군가 자신의 의부를 애틋하게 회상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말이다. 대놓고 사랑한다는 말을 할 줄 몰라서 한번도 입밖에 낮간지러운 말을 내뱉어 본 적은 없었지만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한 한 사람. 자신의 자식도 아닌 아이가 작가로 성장할때까지 든든하게 지켜준 의부를 작가는 아련하게 회상한다. 대놓고 말하지 않아서 오히려 더 감동적인, 하지만 인간적으로 이해 가능한 사랑이란 생각에 뭉클할 수밖엔 없었다. 봐, 알겠지? 이 책 전혀 야하지 않다니까.
아버지란 말을 불러 본 적이 없는 아홉살짜리 아이에게 이제부터 나를 아빠라고 불러 주겠니? 라고 물어봐주던 엄마의 애인은 그에게 성과 함께 아빠라는 호칭 역시 허락해 준다. 그렇게 아버지가 없던 아이는 아버지가 생겼고, 동생들이 선물처럼 생겨났으며 비로서 가정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안정적으로 성장해나가게 된다. 만약 아버지가 없었다면 그의 어린 시절은 어땠을까, 어른이 된 다음 작가가 생각해보면 그 마법같은 일이 생기도록 한 의붓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남다를 수밖엔 없었을 것이다. 피를 나눈 자식은 아니지만 친자식 못지 않게 자신을 사랑한 아버지를 ,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낸 한 남자를 작가는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후, 애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면서 이 글을 써내려 나간다. 아이에게는 행복한 가족을 만들어 주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건만, 그의 말로는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어머니와 이혼 후 파산을 겪게 된 아버지는, 더이상 추하게 살지 않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려 버린뒤 총으로 자살을 했으니 말이다. 그런 그를 안타깝게 생각하면서도 그가 내린 결정을 담담하게 받아 들이려 노력하는 자식으로써의 애닮음이 애잔하더라. 비록 아버지와 하나도 닮지 않았다는 것이 세월이 흘러가면서 더 뚜렷해 졌으나, 한가족이 된 뒤 행동들이 닮아 가는것 하나 하나에 흐믓함을 감출 길이 없던 아들은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난 뒤 이해한다. 부모자식 관계라는건 단지 피라는 유전자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가족이란 그들이 가족이란 관계에 들인 사랑과 노력, 이해가 바로 관계의 핵심임을 작가는 아버지 미셀을 통해 이해하게 된 것이다.
다만 문제는 작가가 아버지가 그렇게 괜찮은 사람이였다고 애잔하게 회상은 해대면서도, 왜 그의 경제적인 사정이 형편없어진 것을 알면서도 도와주지 않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자신을 잘 해준 것을 그렇게 고마워 하면서도, 정작 아버지가 늙어서 어려움에 처하자 도움을 주기를 주저하고 머뭇거리던 작가, 그랬던 그가 아버지가 자살을 하자마자 자책을 해가면서 이런 책을 써 낸다는 것이 조금은 말이 안 되지 않는가. 그렇게 사랑하는 아버지였다면 왜 미리 도움을 주지 못했을까,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분명 곤경에 처한 사람에게 등을 돌리는 사람은 아니여 보였는데 말이다. 그런 성품이 어린 시절의 그를 감동시켰었던 것이고. 그런데 그게 일방통행이라는 점이 참 안타깝단 것이지. 그렇다보니, 이 책이 아버지에 대한 감상적인 사부곡에 지나지 않는건 아닌가 라는 의심을 버릴 수가 없었다. 진짜로 아버지를 사랑하고 그의 사랑이 사무치게 고마웠다면 그가 말년을 잘 살도록 보살피는 정도는 아니라도 작은 도움 정도는 줄 수 있어야 옳았던게 아닐까. 그게 바로 가족이니 말이다. 하지만 내가 알기론 작가란 작자들은 낭만적인 게으름뱅이 들이라서, 현실을 해결하려 행동하기 보다는 --그러니까, 아버지의 문제를 같이 고민하고 해결해 보려 노력하기 보다는---그저 일이 터지고 나서 눈물을 흘려 대는게 다이니 말이다. 말하자면 작가의 사랑이란 그 사람이 죽은 뒤에나 실천이 가능하다는 의미. 그런 면에서 작가의 비통함이 어딘지 가식같이 느껴지는건 어쩔 수 없었다. 작가들의 사랑은 얼마나 애잔하고 낭만적이며 아름다운지...하지만 작가들이 사랑을 아름답게 그릴 수 있는건, 그들이 현실에서 실제로 몸 부딪치면서 살아가는 실천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그저 멀리서 바라보면서 내가 이랬어야 했는데 저랬어야 했는데 라고 후회만 하는 사람들이기에, 그들을 사랑한 사람들에겐 정작 남는게 아무것도 없는게 아닐까 라는 씁쓸한 생각이 든다. 그런걸 보면 아마도 현실속에서 그런 사랑을 실제로 실천한 의붓아버지 미첼 같은 사람들은 평생 책을 쓸 일은 없을 것이다. 남에게 내 사랑을 내보이기 위해 쓴 이런 책 말이다. 정작 책을 쓰는건 사랑에 관한한 하나도 희생하는 법이 없는, 이기주의자 같은 아들이라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진다. 그게 바로 인생살이의 불공평한 점이겠지. 다만 책을 읽고 나서 하루가 지나고 보니 약간은 이해가 되는 점이 있긴 하다. 사랑이란게 원래 내리 사랑이라서, 우리는 윗세대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받고 자라지만, 그 사랑을 그들에게 돌려 줄 수는 없다는 것 말이다. 왜냐면 우리 역시 우리의 사랑을 아랫세대에게 퍼부어 줄 것이므로 말이다. 그것 역시 세상 사는 이치가 아닐까 싶어, 작가의 심정을 이해해 주기로 했다. 프랑스 작가 답게 문장이 횡설수설한다. 이상하게도 프랑스 작가들은 이렇게 쓰는 것이 잘 쓰는 것인줄 아는 모양. 내가 보기엔 허세 가득한, 없는 것을 있어 보이게 하려 애를 쓴다는 인상이 들던데, 뻥튀기 처럼 말이다. 뭐...프랑스 작가들이 대체로 그런 글쓰기를 하는걸 보면 그 나라의 트레이드마크인것 같기도 하고 . 하여간 있었던 일만 솔직하게 군더더기 없이 서술해 나갔었더라면 더 감동 깊었을 듯한 작품. 자신의 아들도 아니지만 어디서건 흐믓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을 작가의 아버지의 눈길에 타인인 나마저도 고마운 마음 감출 길 없긴 했다. 그런 어른다운 어른들이 박수받고 존중받는 세상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