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이 분다>라. 왜  제목이 바람이 분다일까 라는 의문은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풀린다. 폴 발레리의 시 '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 겠다..."라는 시에서 따온 제목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으니 말이다. 거장이라고 불리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자신의 은퇴 작품으로 선택한 이 영화, 과연 그는 자신보다 대부분이 한참 어릴 관객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영화를 보는 내내 난 그것이 궁금했었다. 격변의 세월을 70년 넘게 사셨으니, 무언가 인생을 사는 후배들에게 하고픈 말이 있을 것이라는 것은 명확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그가 누군가. 세계에서 제일이라고 손꼽히는 애니매이션계의 거장 아니던가. 그런 그가 하고픈 말이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한 평생을 정리하면서 그는 분명 무언가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변명이건 사죄건 이해를 구하는 것이건 아니면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건 간에...영화관을 나오면서 들었던 가장 큰 느낌은 불쌍하단 것이었다. 그 시대를 살아갔어야만 했던 사람들이. 우리 나라 사람들이건 일본 사람들이건 중국 사람들이건 간에...그들이 누구이던가. 지진을 겪고, 전쟁에 휩쓸리고, 내란을 겪고, 이데올로기의 혼란과 가난과 무지와 절체절명의 폐허속에서 일어나야만 했었던 사람들 아니던가. 그 속에서도, 단지 미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정신이 아직은 멀쩡하다는 이유로 꾸역꾸역 살아가야만 했었던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바람이 분다, 살아봐야 겠다.'라는 시 구절에서 허무함을 읽는 것은 비단 나뿐인 것일까? 그 절망과 비참함과 수치심, 불안과 슬픔을 뒤로하고, 그럼에도 바람이 불어오니 살아봐야 겠다고 마음을 먹어야 했던 사람들의 심정을 우리가 어찌 알겠는가?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의 현재 세대들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이런 시대를 살았었다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지만, 남는 것은 치욕과 파멸뿐이었고. 세월을 되돌아보니, 그렇게 살았던 시절이 후회된다고, 그럼에도 후회를 딛고 우리는 그렇게 한 세상을 살아냈으니, 너희도 살아라, 라고 말이다. 거기에 덧붙여 그는 전쟁이란것은 절대 안 된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보내고 있었다. 우리 눈에 보기에는 그것이 수준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도, 그런 메시지를 보내는데 하필이면 제로센의 창조자인 지로를 주인공으로 했다는 것이 말이 되냐는 볼멘 소리가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가 바라본 시각에선 그것이 최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좋아하는 최고의 것들을 모아 이 영화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그 누구도 자신이 모르는 것을 모아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런 면에서 이 애니가 그간 그가 만들었던 모든 작품들을 모아 놓은 듯한 인상이라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지 싶다. 이 영화에서는 붉은 돼지와 토토로와 코난과 포비와 나나가 보인다. 그가 평생을 사랑해온 모든 것이. 그리고 그는 그것들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런지...이게 바로 내가 평생 하고 싶었던 말이야 라고. 그래서 이번만큼은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것이 아닌, 전범이라고 불려도 할 말이 없는 지로를 내세운 것이 아닌가 싶었다. 더이상은 환상의 뒤로 숨고 싶지 않아서 말이다.

 

<진짜 사나이>에서 요즘은 실전 모의 전투에 레이저 총이 사용되는 것을 보고 웃은 적이 있다. 마치 어른들이 총 가지고 장난을 치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만약 저 총이 실탄을 장전한 실제 총이라면 그들에게 그런 여유가 묻어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일테니 말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전쟁에 나가는 것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전쟁에 나가는 것은 서 경석처럼 딸 바보 아빠일 수도 있고, 장혁처럼 성실한 근육맨일 수도 있으며, 샘처럼 호기심에 군대에 끌려 나온 사람일수도, 멋 모르고 차출된 아기 병사일수도, 어디에 세워 놓든 구멍 병사 신세를 면치 못하는 사람일 수도 있다. 개인이라는 것은 역사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며, 그 무엇도 될 수 없다. 그저 우리 모두 하나의 나사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 속에서 정신을 차리면 되지 않았느냐, 왜 그런 악의에 가담했느냐고 묻는다면, 그건 우리 인간이라는 것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우린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고, 강한 존재였던 적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경계하는 것이다. 우리의 지도자가 누가 되는가 라는 것에 대해. 그가 우리들을 어디든지 이끌고 갈 수 있다는 것을 잘 앎으로. 이 영화의 주인공인 호리코시 지로 역시 전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 우수한 무기를 가졌을 때에는 그것을 통제/ 제어하는 보다 높은 도리, 의리의 마음과 과학 정신이 필요하다."고.

 

이 영화는 멋진 비행기를 만드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을 천재 비행기 설계자가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어떻게 이용당하게 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그에게 과연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까? 아니면 단지 우리는 천재인 그가 그런식으로 이용당할 수 밖에 없었던 시대를 원망해야 하는 것일까? 객관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지로에겐 얼마든지 다른 선택이 가능했어 보인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렇게 우수한 전투기를 만들어 낸 그에게 전쟁광의 혐의를 씌워야 한다. 하지만 개인적인 면에서 보자면, 그는 그저 최선을 다한 엔지니어에 불과할 지도 모르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자신의 최선이 그런 살상을 불러왔다는 것에 평생 지울 수 없는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인물일 수도 있는 것은 아닐까. 난 그것이 미야자키 하야오가 지로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유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아마도 그렇게 살았을 것이 당연한 것이니 말이다. 이 노거장은 실은 우리는 보통 사람이었다고 , 그걸 알아달라고 애원하는 듯 느껴졌다. 웃고 떠들고 사랑하고 믿고 꿈꾸고 장난치면서 살아가고 팠던 인간들이었다고 말이다.

 

 

이 영화를 보기전에 가장 큰 두려움은 영화를 보는 도중에 일어나서 " 이봐! 너희들은 가해자야, 피해자가 아니라고~~! 웃기지 말라고 해"라고 소리치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나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반딧불의 묘>의 마지막을 보면서 어찌나 가증스럽던지, 그전까지 줄줄 울고 있었던 것을 되돌려 받고 싶었던 기억이 생생해서 말이다. 다행히도 이 영화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화질은 큰 화면으로 보길 잘 했다 싶게 생생하게 아름다웠고, 군데 군데 신경을 많이 쓴 흔적들에는 일본 사람들의 꼼꼼함과 완벽을 추구하는 집념에 감탄하고야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가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단 재미가 없고, 이야기의 주축을 이루는 일과 사랑과의 연결이 자연스럽지도 못하다. 전쟁의 참혹함을 다루면서도 인간들은 어찌나 순수한지 거의 믿기가 힘들었고, 영화속 내의 로맨스는 이미 가치를 오래전에 상실한 듯한 순애보를 다루고 있어서 헛웃음이 나더라. 우린 시대에 뒤쳐져 버린 듯한 그의 감성을 지켜 보면서 계면쩍음을 감출 길이 없어 하지만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런 감성이 아니었다면 과연 그가 그 시대를 살아낼 수 있었을까라는 점이다. 당신은 어떨 것이라 보는가? 그런 시대에 미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약간의 환상과 인간의 선의에 대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그에게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그 만의 방공호였다면, 우린 그를 조금은 이해해 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왜냐면 그 가혹한 시대를 살았던 것은 우리가 아니니 말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에게 조금씩 빚을 졌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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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3-09-08 2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 우익의 초점은 늘 '잔인했던 일본의 만행'을 애써 외면하고, 불쌍했던 일본인들, 가난했던 시절, 지진... 전쟁과 원폭...으로 맞춰집니다. 당연한 거죠. 그런 우익조차 갖지 못한 한국이 불쌍한 거구요.

이네사 2013-09-09 11:46   좋아요 0 | URL
아,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