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의 왕도 - 세계의 부모들에게 배우는 반전 육아법
메이링 홉굿 지음, 박미경 옮김 / 예담Friend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육아 전문가가 아닌한, 일단 아이가 태어나고 난 다음에 아이를 키울 생각을 하면 당황부터 하는 것이 보통 어른들의 정서다. 육아에는 완전 초보인 왕초짜 부모서부터, 조카들이 크는걸 보았기 때문에 이젠 육아에 관해서라면 자신이 있다고 자부하는 고모나 이모 삼촌이라도, 새로운 아이의 등장은 언제나 사람들을 긴장시킨다. 육아에 관한한 단언하건데, 단언할만한게 별로 없다. 왜냐면 아이들은 저마다 다 다르기 때문에 이 아이에게 적용되는 것이 다른 아이에겐 무용지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내 첫번째 조카는 유아기때 안아주는 것과 이불 그네를 엄청나게 좋아했지만, 두번째 조카는 안아서 재워 주는 것보단 세워서 돌아다니는 것을 선호하고, 이불 그네를 해주면 악을 쓰면서 운다. 첫번째 조카를 비교적 무난하게 키웠다고--키웠다기 보단 옆에서 지켜 보는 것이 다였지만서도---자부하던 나는 두번째 조카를 맞이하면서 첫번째 조카때 습득한 육아 지식이 대부분 쓸모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실망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말처럼, 새 아이에겐 그에 맞는 새로운 육아법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 사실은 육아에 관한한 매너리즘에 빠질 수가 없겠다는 장점이 있기도 하지만, 과거의 경험이 별반 소용이 되지 않는다는 좌절감을 의미하기도 했다. 다 새로 배우고, 다 새로 업데이트 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겨우 8년만에 말이다. 10년도 아니고, 100년도 아니며 고작 8년...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두 아이를 보면서 육아가 힘든 것은 어쩜 사람들의 개성이 다 다르듯, 아이들의 개성 역시 다 다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엄마를 만들었다는 신화같은 말이 어느정도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싶더라. 왜냐면 아이들 각자에게 맞는 육아방법을 기꺼이 고민하고 파악해낼 사람이 엄마 외엔 전무하기 때문이다. 그런걸 보면 엄마들이 육아를 힘들어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한 인간에게 맞는 사랑법을 찾아 낸다는 것이 보통 어렵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마나 엄마에겐 아이에게 향한 무한한 애정이 있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엄마들은 오늘도 고민하는 것이다. 어떤 것이 내 아이에게 맞는 것일까? 과연 이렇게 해도 괜찮은 것일까? 내가 지금 이렇게 한 행동이 내 아이의 미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면 어떻게 하지 싶은 불안감에 시달리는 것이야 말로 어쩜 엄마들에게 가장 힘든 과제일지도 모른다. 불안감만큼 사람을 잡아 먹는 것도 없으며, 불안감만큼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것도 없으니 말이다. 적어도 영유아를 키우는 엄마들에게는 말이다.


여기 이 책의 저자 역시 그런 엄마중 하나다. 미국으로 입양을 갔었던 대만계 미국인인 저자는 30 중반이 넘어서 딸을 낳으면서 어떻게 하면 잘 키울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딸을 낳기 전까지 전세계를 누비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왔던 저자는 자신이 다녔던 이곳 저곳의 육아 방식이 천차만별로 다르다는 것에 주목하게 된다. 미국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심지어는 기겁할만한 일들이 다른 나라들에선 당연하거나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한 덕목이 되어 있더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면,아르헨티나 부모들은 아이들이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는다고 해도 그다지 개의치 않아 했다. 프랑스에서 부모들은 아이들을 위해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야 한다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케냐 부모들은 유모차를 불필요 하거나 성가신 것으로 여겼고, 중국인들은 기저귀를 키우지 않은 채 돌이 지나면 배변 훈련을 시작했다. 아랍인들은 대가족을 고수한 채 개인주의라는 개념의 싹을 잘라 버렸고, 티벳인들은 임신부들을 존귀하기 대접하기로 유명했다. 일본인들은 아이들이 싸우건 성기를 가지고 아이들 사이에서 자랑을 하건 중재에 나서지 않았고,폴리네시아 부모들은 아이들과 놀아준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멕시코 부모들은 아이들이 어렸을때부터 온갖 집안일을 돕게 하도록 시켰고, 똑같은 교육을 받는 미국에서도 서양 아이들보단 동양 아이들의 성적이 더 좋았다. 도무지 이런 일들은 왜 생기며, 그렇다면 육아에 관한한 절대적인 기준은 없는 것일까? 내진 어떤 것이 아이를 행복하게 키우는데 도움이 되는 것일까 라고 저자는 질문을 시작한다. 그리고 이 책속에서 저자는 자신만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유연하게 아이를 키우자는 것이다. 어떤 것도 절대적인 것은 없으며, 어쩌면 미개하고 몽매한 나라의 육아 방식인 것 같아 보여도 알고보면 나름의 의미가 있으며, 육아에 관한한은 그들이 맞을 수도 있다고 저자는 생각하는 듯했다. 자신이 생각한 것을 자신의 딸인 소피아에게 적용해보면서 말이다.


일단 저자의 시도 자체가 흥미로웠다는 것만은 인정해야 겠다. 이렇게도 나라마다 다른 육아 방식이 존재하고, 그것이 다른 나라 사람이 듣기엔 이상하게 들릴지 모름에도 , 그 나라와 민족간에서는 나름의 역활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이니 말이다. 즉, 나라마다 이런 저런 방식이 있고, 그것이 비록 다른 나라 사람이 보기엔 경악할만한 것이었다고 해도, 전세계 부모들이 자신들의 아이를 사랑한다는 점에서만큼은 다르지 않으며, 그렇다면 아이를 키우는데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을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것, 이해할만한 논지다. 이렇게 키우건 저렇게 키우건 간에, 아이들이 정신병자가 아니라 사회의 일원으로 잘 성장해주고 있다는걸 감안해 본다면 저자의 말이 그럴듯하게 들려오기도 한다. 즉, 육아란 지극히 사회적인 경험이며, 그들이 처한 환경에 따라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변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다 유연한 잣대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키우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가 라는 그런 말을 저자는 하고 있었다. 꼭 밤 8시가 되기 전에 재워야 하고, 돌이 되면 아이를 다른 방에서 재우고, 배변 훈련은 아이가 원하는 시기까지 기다리고, 아이와 놀아줘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도 아이를 키우는데는 별 지장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저자는 전세계 부모들의 육아방식을 고찰한뒤 결론을 내린다.  그런 그녀의 말에는 나도 어느정도는 공감이 갔다. 일례로 아이를 포대기에 업고 다니는 우리나라 육아 방식에 서양인들은 놀라움을 표했으나, 지금은 아동심리학자들이 말하지 않는가. 그것이야말로 아기들에게는 안정감과 동시에 애착심을 발달시키는 동력이 된다고 말이다. 지극히 개인적인 서양식 육아 방식보다는 동양적인 껴안음이 아이들에겐 더 낫다고 전문가들은 말하고 있었다. 포대기를 실제로 사용하는 나라에 살고 있는 나로써는 전문가의 주장에 동조하는 바다. 포대기를 둘둘 감싸안고 아이와 함께 하는 외출만큼 즐거운 경험도 없으니 말이다. 어른에게 그럴진대 아이들에게도 비슷한 애착심이 형성되지 않을까 난 늘 생각해왔었다. 그렇다보니 서양식 육아 방식이 절대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서양식 육아는 통제적이고 강압적이며 지나치게 개인적인데다 아동 학대에 가깝다시피 고립적이라는 저자의 견해에 고개를 끄떡일 수밖엔 없었다. 실제로 나 역시도 그렇게 느끼는 바가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저자가 말미에 밝혔듯이 저자는 의사도 아니고 아동 전문가도 아니다. 인류학자나 과학자는 더더군다나 아니다. 그저 가족을 위해 올바른 일을 하고픈 평범함 엄마다. 바로 그것이 이 책의 한계다. 즉, 참조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저자의 견해에...그냥 호기심삼아 이런 저런 나라에서는 아이를 이렇게 키운데, 라는 정도의 이야기꺼리는 될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육아에 도움이 되는 어떤 유익한 정보를 준다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오히려 몇몇 장면에서는 소름이 끼쳤다. 분명히 일본의 극렬하고 잔인한 왕따를 어린 시절부터 부추기는 것이 분명한 일본 유치원의 장면을 보고는 갈등을 해결하는 법을 배우게 한다고 해석하는 것이나, 멕시코 아이들이 어른들과 동등한 노동을 하면서도 행복해 한다는 주장에 일말의 의심도 없이 동조하는 것이나, 동양 아이들이 집안의 어마어마한 압박속에서 공부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간과되는 것을 보면서 말이다. 그것이 페해가 눈에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옳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통찰할만한 눈이 저자에겐 없었다. 그것은 저자가 자신이 스스럼없이 밝힌대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도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육아에 관한한 모든 것을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경향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닐까도 싶었다. 즉, 자신이 해본 것은 모조건 괜찮은 것이고, 그것에 대한 비난이나 훈수에 저자는 반박을 하고 있었을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뭐라고? 그거 어떤 어떤 나라에선 아무렇지도 않은 건대, 왜 여기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실제로 그렇게 해도 잘 자라나는 아이가 있다구요, 라면서 말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해도 저자에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실제로 이 저자는 좋은 엄마이고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지만서도, 이 세상에서 가장 대하기 힘든 부모는 자신이 아이에게 하는 것은 무조건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들의 시야엔 완벽하게 옳은 것이기에, 도무지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들어간 틈이 주어지지 않은 완고한 사람 말이다. 육아에 있어 유연함을 주장하는 사람에게 의외로 완고함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재밌는 아이러니 아닌가. 그런데 실제로 내가 이 저자에게 발견한 것은 유연함이라기 보단 자신이 하는건 대부분 옳다는 고집이었다. 심리학자나 아동 전문가 내진 과학자들이 그간 일궈낸 성과를 일거에 쓰레기로 만들면서, 그딴건 다 필요 없더라. 그냥 과거 어른들이 키우는 방식대로 하면 되지 않느냐, 아이를 키우는 것에 관한한 어쩌면 과거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고 말이다. 이 얼마나 위험한 발상이란 말이냐.실제로 전혀 그렇게 못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이 저자는 상상도 하지 못한듯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천진난만한 사고가 이 책을 심심풀이용 서적정도로 만들고 있었다. 아마도 이 책을 아동 전문가가 본다면 소름이 돋아 하지 않을까 싶었다. 이렇게 위험한 발언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다니 하면서 말이다. 해서 이 책을 읽어본 결론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육아의 왕도는 어디에도 없더라는 것이었다. 어쩜 그건 당신 각자가 찾아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표지 전문에 쓰인< 전문가의 말에 지치고, 주의의 훈수에 질린 당신에게 권한다>는 말에 혹해서 보게 된 책이건만, 이 책을 읽고 나니 이런 마음이 되더라. 내 차라리 전문가의 말에 지치련다, 라는...주위의 훈수도 내 기꺼이 듣겠다. 그것이 아무리 지치고 혼란스럽고 질린다고 해도 아이를 위한 것이라면 들어주련다. 그런 말들 속에서 단 하나의 귀중한 정보를 얻는다고 해도 헛된 수고가 아닐터이니 말이다.이런 비전문가의 사이비 조언에 현혹 당하는 것보다는 그나마 나은게 아닐런지...물론 이 저자의 말이 다 틀린건 아니였지만서도, 기억해야 할 것은 이 저자는 정말로 전문가가 아니란 것이다. 저널리스트일뿐이다. 우리가 아플때 의사를 찾아가야 하는 것처럼, 적어도 육아에 관해 무언가 괜찮은 육아 지침을 얻고자 하신다면 전문가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라. 정말로 그들은 나보다 , 당신보다, 그리고 이 저자보다 낫다. 귀동냥을 할 생각이라도 그들에게 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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