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이즌우드 바이블
바버라 킹솔버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1959년, 무지 몽매한 아프리카 인들의 영혼을 구제하겠다는 이상으로 가득찬 목사 네이선은 아내와 딸 넷을 데리고 아프리카 콩고로 향한다. 아름답지만 연약한 아내 올리애너와 미스 아메리카다운 자태와 허영끼를 지닌 열 다섯의 첫째 레이첼, 일란성 쌍동이지만 정상으로 태어난 리아와 반신불수 장애아로 태어난 에이다, 그리고 천둥벌개숭이 다섯살 막내 루스 메이까지,  다섯 여자들은 아버지의 열정에 희생양이 되어 자신이 살던 곳과는 전혀 거리가 먼 땅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곤 그곳이 자신이 생각하던 곳과 다르며, 실제로 적응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걸 알게 된다. 힘들게 바리 바리 싸들고 간 간 짐들마저 별 쓸모가  없다는 것이 서서히 판명되는 가운데, 엄마 올리애너는 그저 아이들을 먹이고 죽지 않게 하는것에 온 신경을 쏟는 것으로도 하루 해가 모자람을 알게 된다. 독선적이고 무모하리만치 외골수인 네이선의 전도 방식은 원주민과의 끊이지 않는 갈등의 원천이 되지만, 정작 네이선은 신경쓰지 않는다. 그들이 무지하고 영혼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자신이 여기 와 있을 이유가 없다는 생각때문이다. 그런 오만함의 상대는 비단 원주민들에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아내와 딸들 ,다섯 여자들을 거느리고 있긴 하지만 그 어떤 여자도 사랑하지 않는 그는 집안에서 폭군으로 군림하게 된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사명감에, 군소리 없이 남편을 따르던 올리애너는 콩고의 사정이 백인들이 살아가기엔 점차 험악해지자 떠날 것을 남편에게 종용한다. 하지만 모든 백인들이 공포에 질려 짐을 싸는 사이에도 오히려 네이선은 자신의 신심을 하느님께 증명할 기회라면서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아이들을 사랑하지만 남편이 그들에게 상처를 주는걸 막지 못하던 무능하고 무기력한 엄마였던 올리애너는 높아져 가는 긴장감을 이기지 못하고 탈진하게 된다. 그녀는 왠지 어디선가 이 모든 것을 끝장 낼 비극이 기다리고 있으며, 자신이 하는 것이라곤 넋놓고 기다리는 것이라는 자괴감에 시달리게 된다. 과연 이 다섯 여자들의 운명은? 

 

한 남자의 선도 열정에 휩쓸려 인생을 아프리카에 저당잡히게 된 다섯 여자들의 운명이 30여년에 걸쳐 중개되고 있던 소설이다. 다섯 여자들의 목소리로 돌아가며 자분자분 진행되는 이 책은 그 다섯의 이야기를 조합해 상황을 짐작하게 한다는 점이 특징으로, 막연하게만 들어오던 아프리카 선교의 실상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던 것이 장점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고 방황하는 영혼을 구제한다는 사명감에 고난의 길로 들어섰지만, 그 누구보다 사랑의 의미에 대해 알지 못하는 목사 네이선이란 캐릭터는 특히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답답한 기독교 인들의 전형처럼 보여져서 나름 통쾌했다. 시종일관 독나무 성경( 사랑이 아니라 독을 퍼트리는 말씀이라는 의미) 을 쓰면서 자신은 오로지 진실만을 말하며 행한다고 생각하는 남자,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바보며 비겁자에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영혼이라 생각하는 남자, 아프리카 원주민들의 일부 다처를 고발하면서 정작 자신의 딸들과 아내에게 자신이 가하는 학대와 독재의 죄에 대해선 무심한  남자, 언제나 자신이 옳기에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만은 자신의 고난에 대한 답을 주실 것이라 믿었던 남자, 성경에 쓰인 모든 고난을 몸소 겪으므로써, 비로서 자신의 신심이 증명되었다고 믿었을 남자... 그가 바로 아프리카인의 영혼을 구제하겠다고 나선 목사 네이선의 정체다. 처음엔 그런 그의 대의에 아버지고 남편이기에 따라 나섰던 다섯 여자들은 점차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하지만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는 막막한 타지에 홀로 남겨진 다섯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었을까. 더군다나 당시 1960년대의 시대 상황에서라면 말이다. 과연 그 다섯 여자들이 어떻게 그 난제에서 벗어나게 될지 궁금해서 계속 보게 되던 그런 소설이 되겠다.


아프리카 선교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슈바이처 박사다. 이 책을 보면서 슈바이처 박사가 그렇게 유명하게 된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디에서고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데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밝혀지기 전까진 끝까지 사람을 믿고 보는 그런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가 기독교 인이건 아니건 간에, 아니 배웠던 안 배웠건 간에...그는 단지 자신이 믿는 가치를 상대에게 주입하게 위해 이유 불문하고 독단적인 방법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의술을 배운 것도 그때문 아니었는가. 선교가 아니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말이다. 사람들이 그의 휴머니티를 칭송하게 되는 것도 지극히 자연스런 반응일 것이다. 그와 반대로 여기에 나오는 네이선은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이 광신도가 되었을때 어떻게 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성경 구절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지만, 실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음을 알지 못한다. 바로 거기에서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자신외에는 아무도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그의 성품은 가족과 자신의 주변에 고통을 가져 오는 이유가 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사명을 가진 그에게 그건 무시해도 좋은 일일 뿐이다. 주변에서 종종 이런 딜레마에 빠진 사람들을 보게 된다. 벽창호라고 해야 하나? 자신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믿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말이다. 그런 사람과 사는 고통은 이겨내기엔 믿음은 너무도 얄팍한 것이고, 그렇다고 계속하기엔 그 고통이 너무 크다. 고통은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하고, 결국 믿음에 가려워졌던 위선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면 사람들은 고민하게 된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벗어나야 하나 하고 말이다. 그런 사람들의 고통과 고민을 종종 들어왔기에, 난 이 책이 나오는 주인공들이 가공의 소설속 주인공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지금도 현실속에서 얼마든지 실재할 수 있는 것이라서 말이다. 아마 그래서  더 관심을 갖고 보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이 그 난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저으기 궁금했던 것이다.

 

하여간 결론부터 말하자면, 선교 이야기라고 해서 고리타분하지 않을까, 내진 선교를 찬양하는 그런 책이 아닐까 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생생하게 들려오던 아프리카의 목소리에 다양한 시선으로 상황을 보게 하던 넒은 시야, 그리고 아프리카 정치 상황에 대한 꼼꼼한 사전 조사까지...꽤나 공들여 쓴 책이라는 인상을 갖기에 충분한 소설이었다. 거기에 페미니스트적인 주장에 현대적으로 아프리카를 해부하는 목소리까지, 정치적으로도 들어줄만한 이야기를 하고 있던 소설이 아니었는가 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주변에서 네이선과 같은 사이비 목자를 직접 봐왔던 관계로 더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었다. 작가의 결말에 나 역시도 공감을 하는 바이며, 그들이 결국 그런 파국을 몰고 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길인가 보다 라는 생각도 든다. 그 누구도 그런 파국을 바라지는 않지만, 아무리 막아보려 한들, 정작 당사자가 마이동풍이면 백약이 소용 없으니 말이다.  

 

읽는 재미가 쏠쏠하던 소설이었다. 강렬하고 빠른 전개에, 일관성 있는 인물들의 개성, 영화로 만들어 진다면 괜찮겠다 싶을 정도로 출중한 서사성이 몰입도를 높인다. 다만 마지막에 지루하게 늘어지는 것이 옥의 티. 완벽하게 끝을 맺으려다보니 마지막에 가서 쓸데없이 장황하게 횡설수설하는 느낌이었는데, 작품의 완성도를 생각하면 안타깝더라. 본인이 하던대로 직설적이고 깔끔하게 끝을 맺었더라면 오히려 더 나았을텐데 싶어서 말이다. 하고 싶은 말이 다 떨어졌을때나, 절실하게 하고픈 말이 아닐땐 입을 다무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는 전략임을, 작가들은 아는 것도 좋지 싶다. 중언부언으로 말을 늘인다고만 해서 다 좋은 글이 되는것은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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