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땀 - 여섯 살 소년의 인생 스케치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데이비드 스몰 지음, 이예원 옮김 / 미메시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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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리뷰를 쓰기 어려운 책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 책이 그렇다. 무언가 한마디라도 남기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하긴 했는데, 아직까지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한 기분이다. 또다시 부모를 고발하는 책이다. 솔직히 기분이 좋진 않다. 고발을 당해야 하는 부모 입장에서건, 부모를 고발해야 하는 아이 입장에서건 썩 내키지 않는다. 보는 사람이 이렇게 불편한진대, 글을 쓰는 입장에선 오죽했으랴 싶다. 냉정하고 건조한 톤으로 그려내서 그렇지 아마도 저자는 이 책을 쓰면서 피를 토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얼마나 억울하고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그럼에도 동서 고금을 통해 왜 이런 책들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쉴새없이 생산되는지, 아이를 제대로 키우는 것이 이다지도 어려운 것인지 분통이 터진다. 정말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적어도 아이를 가지려면 20세 이상은 지나야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자식과의 연령차는 대충 20살에서 30이 될 것이다. 자신보다 20살이나 어린 사람과 함께 산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대충 알 것 아닌가. 이 아이에게 무엇을 하면 되고 안 된다는 것을 말이다. 단지 몰라서 그랬어요 라는 말을 예전에는 믿었는데, 요즘은 반신반의다. 과연 아이를 부모는 무어라 생각하는 것일까?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 적어도 인간에 대한 예의와 존중만 있다해도 이런 파국은 없을 것 같은데 말이다. 그런 것들을 주장하는 내가 현실성이 없는 것일까? 과연 아이를 키우는 일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어야 하는 것일까? 복잡한 기분이다.


50년대 미국 디트로이트, 여섯살 난 저자 데이비드 스몰에게 엄마란 공포의 존재다. 하루종일 기분 나쁜 표정과 거친 태도로 아이를 대하는 엄마는 여섯살난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기는 커녕 자신이 아이에게 해가 되는 존재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이리 저리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면서 엄마를 피해 다니던 저자, 하지만 여섯살난 아이가 세상을 이해해봤자 얼마나 이해하겠는가. 엄마에게 사로잡혀 따귀를 맞는 것은 당연지사다. 아이는 그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라 억울할 뿐이고. 그건 그가 나이가 들어서도 변함이 없어서, 외할머니가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서 미쳤냐고 물었다가 된통 당한 데이비드는 자신의 목에 혹이 난 것을 이웃이 발견하자 깜짝 놀란다. 그 이웃이 부모에게 하는 말, " 설마 이걸 못 본 건 아니지?"  라는 말에도 묵묵 부답이었던 엄마와 아빠--그들은 정말로 못 봤을 가능성이 크다. 그만큼 아이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뜻--하지만 아버지가 의사임에도 , 마침 아버지가 승진을 했음에도, 데이비드가 수술하기까진 3년 반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부모의 사치 광풍속에 수술에 쓸 돈을 마련하지 못한 탓이다. 아마도 돈 보다는 아이에게 무관심하기로 작정한 듯 보였지만서도... 집보다 자신에게 더 친절한 병원 사람들에게 감동한 데이비드는 하지만 간단하다는 수술이 몇 차례 더 이어지고, 종국엔 성대 한 쪽을 잃어버린 채 병원을 나서게 되자 의아해진다. 나중에 그가 암에 걸렸던 것이며, 거의 죽을뻔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그 사실을 숨긴 부모에게 앙심을 품는다. 청소년이 되자 마냥 엇나가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는 " 너에게 쏟아 부은 돈이 얼만데 이 모양이냐," 를 외치면서 질타하기에 바쁘다. 그렇게 외롭고 고통스런 청소년기를 보내던 그에게 기적처럼 희망이 찾아온다. 분노와 고통으로 삐딱해진 그를 감당하지 못한 부모가 정신과 의사에게 그를 보냈는데, 그 의사가 분노속에 일그러진 그의 본모습을 보아준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데이비드에게 꼭 필요했던 한마디를 들려 준다. "네 어머니는 널 사랑하지 않아."라는...알고는 있었지만 직시하지 못했던 한마디를 듣게 된 데이비드는 비로서 자신의 해방을 꿈꾸게 된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으로부터의 억압에서의 자유를 말이다. 그때부터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꿈을 꾸기 시작하는데...


피부를 바늘로 땀 뜨는 것 같은 고통스런 책이었다. 저자의 고백이, 그의 어린 시절의 지옥같은 광경들이 치욕스럽게 나열 되는데, 아이의 상처입기 쉬운 연약한 감수성으로 어른들의 폭력적인 몰이해를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심난했다. 왜 아이에게  부모는 이런 모습밖에 보이지 못한 것일까? 데이비드의 엄마와 아빠에게 질문을 하고 싶었다. 그 아이가 아무것도 느끼지도 보지도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라 생각한 것일까? 과연 그들에게 아들인 데이비드는 인간이기나 했던 것일까? 사랑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인간으로써의 존중만이라도 해줬다면 이런 비극은 벌어지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데이비드가 그려낸 엄마가 시중 괴팍하고 모났으며 험상궂은 아줌마라는 점이었다. 평생 한번도 웃어본 적이 없는 듯한, 성마르고 불쾌한 표정의 언제라도 싸움을 벌일 것 같은 분위기의 아줌마 말이다. 해서 뒷편이 실물 사진을 보곤 깜짝 놀랐다. 실제 데이비드의 엄마는 연약해 보이는 야리야리한 미인이었기 때문이다. 오죽 아이를 다그쳐 키우댔으면, 아이가 기억하는 엄마란 존재가 악마의 쌍둥이 자매처럼 각인되어 있겠는가. 아마도 그것이 그가 기억하는 엄마의 영혼이었을 것이다. 함께 사는 사람이 아닌한 알지 못하는...  어쩜 그 엄마는 밖에서 보기엔  친절하고 연약하며 선량한 이웃이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 가면을 집에서는 쓰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였겠지.  나중에 어른이 된 데이비드는 그래도 엄마를 이해하려 애를 쓰는 듯 보인다. 레즈비언이었던 엄마가 자신의 정체성에 따른 불행으로 자신을 그렇게 학대한 것이 아닐까 라는...그랬을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물론 그녀에게 그런 불행이 있었다니 안 된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가지 의문은 남는다. 내가 불행하다고 해서 내 자식까지 불행하게 만들어도 괜찮은 것일까?  부모에게 과연 그런 권리가 있나? 내 불행이 내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한 면죄부가 될 수 있다고 보는지 그게 의문이라는 것이다. 그건 아니지 않나? 아니라고 믿고 싶다. 아무리 삶이 복잡하고 피곤하다고 해도, 아이의 삶은 아이 몫이다. 우리의 불행으로 그늘 지우게 하면 안 되는 그들의 몫 이란 뜻이다. 어른이라면 어른답게, 아이에게 어리광을 부리는 짓은 그만 둬야 하는게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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