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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손
마이런 얼버그 지음, 송제훈 옮김 / 연암서가 / 2012년 2월
평점 :
다른 것도 아니고 아버지의 손이라니...특이하네 라고 생각하신 분들이 있다면 일단 책을 펼쳐들고 나면 이해가 갈 것이다. 왜 제목이 저랬는지 라는 것을...이유는 바로 저자 마이런 얼버그의 부모는 청각장애인이라는데 있다. 해서 저자는 태어났을때부터 부모가 손으로 말하는 것을 보고 자랐다. 하니, 저자가 70년대 말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얼굴보다 손을 더 기억한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보통의 부모 자식들이 하는 대화를 그들은 늘 손으로 했을 테니 말이다. 허공을 가르면서 수다를 떨기도 하고, 야단을 치기도 하고, 질문을 하고, 자랑스럽다고 사랑한다고 말을 하던 것이 다 손이었으니, 저자가 아버지의 손에 대해 애착을 느끼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 그렇다면 저자가 아버지의 손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가 보기로 하자.
저자는 30년대 대공황 이후에 청각장애인의 부부의 첫 아이로 태어난다. 지금도 청각 장애인들이 아이를 키운다는 것이 쉽지않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당시 자신을 갖기로 한 부모의 결정이 얼마나 낙관적인 것이었을지 짐작이 된다. 양쪽 부모들이 결혼은 해도 아이만은 갖지 말라고 다짐을 했음에도 아이를 낳기로 한 마이런의 엄마 아빠는 그들의 결정에 저의기 만족한다.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그러하듯, 그들 역시 자신의 자식을 낳자마자 사랑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모든 행복을 다 가진 듯 그렇게 행복했었다는 부부는 30년대 청각 장애인이 아이를 키우는 고난이도의 미션에 도전하게 된다. 일단 아이가 부모를 닮아서 귀가 들리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마이런의 부모는 아이가 정상이라는 것에 안도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육아가 더 쉬워진 것은 아닐 것이다. 아이를 키우고 말을 가르치고 하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아이를 잘 키워 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 부모를 이제 늙은 마이런이 회상한다. 결코 쉽지않은 않았을 그 길을 단지 사랑이란 이름으로 걸어나간 아버지와 엄마의 이름으로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30년대 청각 장애인들이 겪었어야 하는 고난들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병신이라는 이름으로 직장에서고 거리에서도 손가락질을 받았다는 그들, 놀라운 것은 당시에도 수화가 저능아의 대화법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다는 사실이었다. 해서 마이런의 아버지는 청각 장애인 학교에서도 몰래 몰래 수화를 배웠어야만 했다고 하던데,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왜 본인들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정상인들이 나서서 금지하고 못하게 하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를 못하겠다. 그들이 소통을 하는 수단으로 수화가 필요하다고 하면 된거 아니겠는가. 장애인들도 본인들이 다 생각하고 행동하고 하는데--말하자면 머리를 다친 것은 아니라는 뜻--꼭 참견쟁이들이 자신들이 더 잘 안다는 듯 나서서 훼방을 놓는 것을 보면 짜증이 난다. 정 그렇게 참견하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하겠다면 일단 그들의 말을 진지하게 들어주는게 먼저일 것 같은데, 참견쟁이들이 남의 말에 귀 기울이는건 또 못 봤단 말이지. 그저 일방적으로 자신들이 옳다는 것만 주장할뿐. 더군다나 자신이 아닌 남의 인생 방식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 참견쟁이들의 훼방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아버지는 머리가 있는 분이라, 수화를 배우고, 직장을 얻고, 그리고 아리따운 아내를 얻어 가정을 꾸린다. 그리고 자랑스런 아들을 낳아서 자신만의 부자 관계를 만들어 간다. 아마도 쉽지 않은 길이었을 것이다. 아들 입장에서는 남들과 다른 환경에 산다는 것에 저으기 불만이 있었을 것이고, 아버지 입장에선 들리지도 않는데 아들을 잘 키워 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렸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저자가 회상하는 아버지는 아들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모든 수모와 수난들을 감내할 수 있는 그런 든든한 아버지였다. 자신이 밖에서 어떤 말을 듣고 , 대접을 받는다고 해도, 아내와 아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말이다. 그런 아버지를 회상할 수 있다는 것으로 아마 저자의 어린 시절의 불만이 어느정도는 희석되지 않을까 한다. 불만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내기란 누구에게도 어려운 법이다. 다만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하고 회상하는가는 전적으로 본인에게 달린 것이겠지. 드라마틱한 전개 없이 담담하게 자신의 어린 시절과 부모를 회상하던 것이 마음에 들었지만 조금 심심했던 전개는 별로였다. 잔잔한 서술 방식과 어른 아이로 키워져야 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비교적 뚜렷하게 적어내려 했던 것만은 박수를 받아도 좋지 싶지만서도 말이다.
아,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 하나.
지금 보고 있지는 않은데 요즘 하는 일본 드라마에 이런 내용이 있다. 일곱 살 난 딸과 살아가던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는데, 그 수발을 그 어린 딸이 한다는 그런 내용. 사람들은 내용을 보기도 전에 그런 효녀가 있나, 라면서 감탄을 하는가 보던데, 난 솔직히 욕지기가 났다. 그런 비극을 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어른이라도 말이다. 부모가 치매에 걸리면 일단 비명부터 지른다. 그런 일들을 어린 아이에게 시키면서 그게 옳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많다는 것은 어찌 생각해야 하는 것인지. 아이는 인간이 아니야? 아이는 어른으로 성장하면 안 돼? 아이는 어른들의 도구야? 어른들이 회피하는 모든 책임을 다 져도 좋을 만큼 대단한 존재들이냐고? 왜 어른들은 자신들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아이들에게 떠맡기면서 그렇게 좋아들 하는 것일까? 단지 그들이 멍청해서일까. 아니면 감정적인 변태들이여서? 제발 부탁인데, 무엇이건가에 아이들에게 기대하거나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일단 자신에게 자문해 보길 바란다. 어른이 나에게 이런 일을 기대한다면 나는 어떤 심정일까라는. 적어도 어른이라면 그 정도의 자아성찰 정도는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저자가 부모를 그렇게 사랑했음에도,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부모의 통역사 노릇을 하면서 어른들과 상대해야 했던 것이 적잖이 부담이 되었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저자의 부모는 그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저 자신들과 세상을 소통하게 해줄 존재가 생겼다는 것이 마냥 좋았을 지도. 하지만 그건 아이에게 앵벌이를 시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아이를 이용하는 것이니 말이다. 저자가 착하고 어려서, 그리고 그들의 부모가 나쁜 마음으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엇나가지 않았던 것은 다행이지만서도, 만약 그랬다고 해도 그에게 뭐라할 수는 없었을 듯 싶다. 아이 시절엔 모두 커야 하기 때문이다. 어른 흉내를 내면서 어른들을 돌보는 것이 아닌...아, 혼자 자신을 추스리지도 못하면서 아이를 낳아, 그들을 볼보기는 커녕 오히려 아이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돌보게 하는 어른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아침에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얼마나 비참한 현실인지...그리고 그걸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효라는 이름으로 혼동하고 있는지... 괴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