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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 두번째 무라카미 라디오 ㅣ 무라카미 라디오 2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남희 옮김, 오하시 아유미 그림 / 비채 / 2012년 6월
평점 :
"채소의 기분에, 바다 표범의 키스" 라니....책을 펼치기도 전에 호기심이 생긴다. 도무지 어떤 내용이길래 저런 제목이 붙었을까 하고. 설마 아무런 연관도 없는데, 제목을 멋지게 지으려고 쓴건 아니겠지? 라는 의구심도 없진 않았는데, 읽어보니 그런건 아니였다. 진짜로 채소의 기분을 궁금해 하고, 바다 표범의 키스에 대해 말하는 내용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가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면, 절대 궁금해 할 생각이 없는 내용인데도, 하루키상이 말씀하신다고 또 솔깃해 하는걸 보니 우습다. 사실 대단한 재능이긴 하다. 그렇게 설득력 있기도 쉽지 않으니 말이다. 너무 잘 하니까 얄미울 정도다. 물론 만약 이런 말이 그의 귀에 들어간다면 그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 나를 오해하지 말아 주세요, 라고 하실지도 모르겠지만서도. 하여간 나, 이 작가 별로 사랑하고픈 마음은 없는데도, 새로운 책이 나왔다고 하면 여전히 궁금해 하는건 왠지 모르겠다. 모른 척 외면을 하고 싶어도 눈길이 간다. 특히나 저런 제목을 단 책이라면...아마 저자가 하루키 상이 아니라고 해도 호기심이 생기긴 했을 것이다. 어딘지 산뜻하지 않는가? 범상찮은 제목이다. 그나저나 저런 작명 센스는 도무지 어디서 나오는걸까? 나이가 들어도 감각만큼은 변함이 없으신 모양이다. 근 30년동안 문학계를 뒤 흔든 작가 답지 않은가. 그의 소설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말을 하긴 해도, 그가 글을 잘 쓴다는 점에서만큼은 나도 이의가 없다.
무엇보다 그의 글은 선동적이다. 독자로 하여금 몰입을 하게 하는 능력이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일례로 난 양배추 샐러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 사박사박 실처럼 가늘게 썰어서 사발에 수복하게 담아놓고 혼자서 그걸 다 먹어 버린다'는 문장을 읽고 있노라면 갑자기 이 세상에서 양배추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같이 느껴진다. 그는 전혀 설득하고픈 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나혼자 설득이 되어서는 난리 부르스다. 그가 교주거나 광고쟁이가 아니라는건 얼마나 다행인지...그의 재능이 세상에 나쁜 쪽으로 쓰였을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니 말이다. 어쩌면 그가 자신의 재능을 글에만 한정한 것은 지극히 감사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서론이 길었다. 뭐, 걱정하실 필요는없다. 어차피 본론에 나가야 할 내용이 그다지 길지 않으니 말이다. 이 책은 저자가 <1Q84>를 끝내고 난 뒤, 심신이 지친 마음을 달래고자, 오랜만에 에세이를 함 써봐? 라는 생각으로 집필하게 되신 거라고 한다. 제목을 <두번째 무라카마 라디오>로 해서 1년간 <앙앙>이란 잡지에 연재한 것인데, 어깨에 힘빼고, 편안하게 쓴 것이니 그렇게 봐달라고, 특별히 주문하신다. 읽어보니 진짜로 그래 보인다. 일단 < 앙앙>이란 잡지가 십대에서 이십대 여성을 겨냥한 것이다 보니, 눈 높이를 위해서라도 심오하게 쓰면 안 됐을 것이다. 길이도 짤막짤막, 어려운 단어도 없고, 그냥 신변 잡기 정도의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인 그런 이야기들이 주야장천 이어진다. 작가가 에세이가 굳이 무거워야 할 필요 있냐고 물었듯이, 이건 그냥 미장원에서 머리 하면서 기다릴 때, 아무 생각없이 페이지 휙휙 넘기면서 읽기에 딱인 그런 글들이다. 머리를 오래 굴리지 않아도 그냥 감각적으로 이해가 되고 공감이 되는 그런 글들, 머리속에 잔상이 오래 남았으면 하는 바람이 없진 않지만, 실은 읽고 나면 아쉽게도 남는게 아무것도 없는 그런 글 말이다. 해서 하루키 상의 에세이를 좋아하시는, 특히 <먼 북소리>정도의 퀄리티를 기대하셨던 분들이라면 기대를 내려 놓으심이 좋을 것이다. 아니면 책을 내려 놓으시거나. 그의 감각이나 탁월한 안목,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리게 할 줄 아는 능력, 그렇게 성공했음에도 나는 여전히 마이너리티라고 주장하는 것만큼은 여전했지만서도, 저자가 서론에서 밝혔듯이, 이 책은 가볍게 읽으라고 쓴 에세이다. 작가가 그렇게 말했음에도 뭔가 심오하지 않다고 불평 불만을 터뜨린다면 그건 본인의 독해력에 문제가 있는 거겠지. 그럼에도, 작가가 무라마키 하루키다. 아무리 가벼워도 읽을만은 할거란 뜻이다. 신변 잡기라고 해도 흥미롭게 들려오는 부분이 있을 것이고, 그가 워낙 보통 사람과는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의 시야에 잡힌 세상을 엿보는 부분도 분명 재밌긴 하다. 한마디로 설렁설렁 가볍게 읽기 좋은 수필집이다. 저자가 무게 잡지 않고 썼기 때문에 독자 역시 무게 잡고 읽을 필요가 전혀 없는...어찌보면, 이 짜증나는 여름, 아무것도 읽히지 않는다고 고민이신 분들에겐 안성맞춤일지도 모르겠다. 그냥 술술 읽히니 말이다. 노고가 필요없는 독서가 필요하다시는 분들에게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