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영화포스터 커버 특별판)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를 끝으로 올 상반기에 꼭 읽으려 했던 책 세 권을 드디어 다 읽어 치웠다. 2011년 플리처상 수상작인 <깡패단의 방문>, 2011년 부커상 수상작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그리고 2010년 부커상 수상작인 <영국인 남자의 문제>까지. 순서대로 읽은 것은 아니지만서도, 어쨌거나 다 읽었다는 사실에 조금은 홀가분해졌다. 뭐랄까. 내게 부과된 숙제를 다 해치운 그런 기분이었랄까. 적어도 권위있는 상을 수상한 작품이라면, 더군다나 그것들이 최신작이라면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독자로써 최소한 읽어 줘야 한다고 난 생각했다. 그래서 맘에 들건 안 들건 간에 결국 몇 달 간에 걸쳐 다 읽었다는 것에 대해 일단 홀가분하다. 더이상 이 책들에 대해 궁금해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 거기에 다른 리뷰어들이 이 책들에 대해 뭐라뭐라 해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할 일도 이젠 없을 테니 그것도 좋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들을 읽었다는 사실이 뿌듯하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그저 호기심이 충족되었다는 것뿐. 그나마<깡패단의 방문>은 조금 재밌있게 보았지만서도, 나머지 두 부커상 수상작들은 그다지 재밌게 읽지도 못했다. 부커상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이 아니라면 끝까지 읽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도 <예감은...> 짧기라도 하다지만서도, 짧다고 해서 만만하게 보면 안 된다. 그 짧은 소설속안에서도 앞에 떡밥으로 주어진 주인공의 청소년 시절이 어찌나 지루하던지. 다른 작가의 책이라면 일단 집어던지고 봤을 것이다. 그걸 그래도 줄리언 반슨데, 부커상 수상작인데...라면서 무언가 있을 거라고 나를 다독였었다. 다행히도, 초반의 지루하고 짜증나는 이야기는 중반을 넘어서면서 다소 흥미롭게 전개된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고 보심 되겠다. 그렇다면 사랑스럽기 그지 없는 <플로베르의 앵무새>의 작가 줄리언 반스가 이 책에서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청소년 시절 토니는 차원이 다른 천재성을 가진 에이드리언 핀과 친구가 된다. 보통 사람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에이드리언에게 경외감과 함께 열등감을 느끼던 토니는 다른 대학에 진학하게 되면서 점차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10대에서 20대로 넘어가는 시기, 여자 친구를 사귀는 것에--정확히 말하면 그녀들과 자는 것에--인생의 모든 관심사가 집중되는 시기에 그는 절망적인 연애를 하게 된다. 왜 그와 사귀는지 이해가 되지 않은 여자가 여친이었으니 말이다. 거부할 수 없는 매력과 다소 거만한 태도, 그리고 섹스에 대한 감질나는 자세로 토니를 애태우게 하던 그녀 , 베로니카는 토니가 자신의 여자친구라고 생각할만한 최초의 여자였다. 하지만 그 시절을 보내야 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그리고 애처로울만큼 필사적인 구애에 매달리던 토니는 어느날 그 연애에 종지부를 찍게 된다. 그들이 이별을 하고 난뒤 얼마후 그는 에이드리안에게서 편지를 받게 된다. 베로니카와 사귀려 하는데, 괜찮겠느냐고 정중하게 물어보는 내용이었다. 이미 헤어진 사이임에도 일순간 격한 감정에 휩쓸린 그는 분노가 담긴 답장을 쓰지만 부치진 않기로 한다. 그리고 난 후 몇 달 뒤 에이드리안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자살 이유에 대한 다양한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토니는 그가 자살한 이유가 그가 세상과 타협하기엔 너무 고결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이후 자신만의 삶을 묵묵히 살아온 토니는 이제 노인이 되었다. 결혼을 하고 , 자식을 낳고, 이혼을 하고, 할아버지가 되고, 은퇴자가 된 지금 그는 드디어 "살아남은 자"가 된 것이다. 성공한 자도, 승리한 자도, 명성이 있는 자도, 역사에 이름을 남길 만한 일을 한 자도 아니지만, 그렇기에 살아남아 역사를 회상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자 말이다. 그럭저럭 자신의 시간을 보내면서 그저 추한 노년이 아니기만을 바라고 있던 그에게 편지 한통이 배달된다. 베로니카의 엄마가 보낸 편지엔 40년전 그의 기억속에서 지워진 에이드리언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었다. 에이드리안의 일기를 그에게 남기겠다는 베로니카 엄마의 말에 도무지 그것이 무슨 뜻인지 난감한 그는 베로니카에게 연락을 취한다. 간신히 오랜만에 만난 그녀는 토니를 냉랭하게 대하면서 넌 언제나 제대로 이해하는게 없었다고 일갈을 한다. 왜 베로니카의 엄마가 자신에게 일기를 맡겼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왜 에이드리안의 일기를 베로니카가 아닌 베로니카의 엄마가 가지고 있는지, 베로니카는 또 왜 그렇게 자신에게 불친절한지 이해할 길이 없는 토니는 자신이 이해될때까지 이 일을 캐내 보기로 하는데...


젊은 시절들엔 치기와 유치함때문에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 힘들때가 있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보는 듯한 기분이랄까. 그들이 그렇게나 진지함에도 대응책 없는 벌거숭이로 세상에 나섰다는걸 본다는 것은 참으로 안스러운 일이다. 그게 삶을 살아가는 어쩔 수 없는 통과의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비록 안타까울 정도로 무지하다고는 해도, 그 무지때문에 또 재미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게 무지때문인지, 에너지가 많아서인지, 아직은 쓰여지지 않은 미래덕분에 생긴 여유때문인지,아니면 단순히 젊음때문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서도 말이다.


그에 비교해 노년은 쓸쓸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난 작가가 상을 탈만큼 좋은 책을 썼다는 것에 반색하기 보다는 줄리언 반스도 드디어 늙으시는구나, 늙어가는 작가의 책에선 쓸쓸함을 숨킬래도 숨킬 수 없는 것이로구나 싶었다. 그 젊은 시절의 호기, 냉소, 세상에 반발하는 태도, 인간을 마구잡이로 비꼬고 경멸하던 태도, 인생을 만만하게 보던 건방짐들은 다 어디로 갔단 말이냐. 인간과 삶에 대한 풍성한 기대로 반짝이던 문장들이 모두 자취를 감추어 흔적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그저 남은 것은 말년의 쓸쓸함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에 대한 쓸쓸함 말이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왔건만 살아남아보니 남은 것이 아무것도 없더라는 걸 드디어 발견한 사람의 허망함이랄까. 일찍 죽어간 사람들을 안타까워 하면서 살아남았다는 것에 그렇게 안도했건만, 결국 삶도 죽음도 짐일 뿐이라는걸 발견한 사람의 당혹스러움과 고독 말이다.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이 책 행간에 쓰여진 것들이 그런 것이라는걸 알게 되는 순간 조금 허탈한 기분이었다. 얼마전 읽은 앤 타일러의 작품을 보면서도 그 비슷한 것을 느꼈었는데, 어쩌면 작가에게 늙는다는건 생각보다 좋은게 아니지 싶다. 작가가 될만큼 머리가 좋은 사람들이 삶의 허무함을 느끼지 못할리 없으니 말이다. 지혜가 생길 거라 추측했던 나로써는 당황스런 전개였다. 아마도 그런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아니 그렇지 않다고 부인하기 위해 난 절대 그렇지 않아, 난 죽지 않을거야 라고 발악을 해대는 사람들이 <은교>같은걸 쓰는게 아닐까. 잠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게 옳은 분석이건 아니건 간에, 노년이 쓸쓸하다는 것만큼은 틀리지 않은 것 같다.그들이 정직하다면, 그걸 부인할 수 없다고 말이다. 아~~~ 한숨이 나오려 한다. 삶은 왜 이다지도 한순간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들 뿐일까. 죽는 그 순간까지 인간은 나름의 고통을 겪도록 디자인된 존재들인 것일까.


그렇게 쓸쓸함이 짙게 배인것 외엔 이 책에 대해 그다지 인상적으로 봤던 점은 없었다. 뭐, 별로 매력적이지 않은 등장인물들에 대해선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다 정상적이고 매력적이고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니 말이다. 주인공인 토니에겐 독립심 외엔 배울만한 점이 없었고, 베로니카에겐 왜 그녀를 남자들이 사랑하는지가 당최 이해되지 않았다. 여자가 보기엔 딱 밥맛인 여자던데 말이다. 남자들 입장에선 그녀가 조금은 매력적으로 생각되는 것일까? 거기에 우리의 히어로로 등장하는 에이드리안, 너무 똑똑한 나머지 일찍 삶을 마감해주신 용기를 보여주신 그가 실은 보기완 다른 사람이었다는걸 알려 주는 데, 솔직히 그가 똑똑하다는 토니의 진술이 우습기만 하더라. 진실한 그 누군가를 그린게 아니라 가공의 천재를 만들어 낸 듯한 기분이랄까. 그는 <데미안>이 아니었다. 아무리 토니가 그를 우러러 봐도 천재라고 생각될만한 깜량이 못되었다. 그래서 토니와 함께 같이 경외를 하기보단 짜증이 났다. 이런 폼만 잔뜩 잡고 있는 어설픈 가짜 천재에게 왜 내가  눈길을 돌려야 하지라는 생각에. 이 소설의 초반이 짜증이 났던건 바로 그때문이었다. 물론 베로니카와 토니의 그 엉성하기 짝이 없는 사랑도 짜증이 나긴 마찬가지였지만서도. 


그렇게 짜증이 나는 세 주인공들의 40여년에 걸친 인연이라. 아무리 봐도 좀 억지스럽단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에이드리안의 불행과 자살이, 어느 정도 토니때문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던데, 그것부터가 그렇다. 겨우 분노한 편지 한 장 때문에 삶이 그렇게 무너진다고 보는게 과연 그럴듯한 분석일까? 토니가 그런 편지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런 과거를 벌어지지 않았고, 에이드리언은 자살하지 않았을까? 그럴거라 생각하기에 베로니카는 40년이 지난 뒤에도 토니를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그런데 진짜 그게 다 토니때문일까? 그럴듯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신만 생각하며 사는 자아집중적인 20대의 사람들이 과연 친구의 분노에 찬 편지 하나로 자신의 삶을 망치게 둔다는게 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너지는 계기는 자신의 내면때문이다.외부의 사정이 아닌. 그것이 자연스럽고 설득력있다. 원래 그런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보니 줄리언 반스의 이야기가 조금은 억지스럽게 느껴졌다. 토니와 에이드리안의 엮기 위해 일부러 이야기를 만들어 낸 것 처럼 말이다. 오십보 양보해 만약 실제로 에이드리언에게 일어난 일이 토니의 편지로 촉발된 것이라 해도, 과연 토니가 자신의 행동에 반성을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도 의문이다.  그는 단지 분노와 질투에 찬 20대 청년이었다. 완벽하지도, 이성적이지도, 또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그런 시기. 그때 누군가에게 잔인하고 배려를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그가 나쁜 인간이라는 뜻일까? 그래서 에이드리안의 불행에 그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전 애인을 빼앗아간 친구에게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 것일까? 즉각적인 찬사를 보내고 그들의 앞 날에 축복을 빌어줘야 하는 것일까? 그게 과연 가능해? 아니, 꼭 그게 가능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에겐 화를 낼 권리조차 없는 것일까?


그래서 조금은 불편한 심정으로 책을 내려 놓았다. 의문이 종결되는게 아니라 많은 의문을 남긴 채로. 기쁘지도, 즐겁지도, 반갑지도, 흥미롭지도 않은 채로 말이다. 그저 작가가 늙는다는 것은 심하게 쓸쓸한 일이로구나만 마음에 남았다. 작가들마저 이럴진대, 과연 어떻게 늙어가야 좋은 것일지 두려워진다.  과연 늙는다는건 이다지도 좋은게 없는 것일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2-07-06 0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6 0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6 10: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6 1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7 02: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7-08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