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 달린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 케네스 그레이엄의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 깊이 읽기 주석 달린 시리즈 (현대문학) 2
케네스 그레이엄 지음, 애니 고거 주석, 안미란 옮김 / 현대문학 / 2011년 1월
평점 :
품절


그동안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을 몇 차례 만나봤지만, 한번도 이 책이 왜 걸작이라는건지, 읽어본 수많은 독자들이 각별하게 여기는지 이해가 안 갔었다. 영화를 봐도, 원서를 봐도 도무지 재밌는지 몰랐으니 말이다. 그러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속는셈치고 집어들었던 이 책은 뜻밖에도 올곧이 <버드나무...>의 매력을 내게 알려 주었다. 주석이 달려있어서가 아니라, 원작 전체를 고스란히 읽어본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알고보니 원서는 아가들을(4세이상)위해 만든 축약본이었고, 만화 영화는 책의 알짜배기가 빠진 줄거리만 건져낸 것이었더라. 그렇다 보니 내가 <버드나무>에 매력을 못 느낀 것도 당연했다. <버드나무에 부는 바람>의 진가는 너무도 아름다운 명문장들에 있었으니 말이다. 축약본이나 줄거리 만으로는 이 책의 진가를 알아차린다는건 어불성설이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앙꼬 빠진 붕어빵 같은 거라고나 할까. 하여간 그간 전체를 읽어본적이 없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니, 부끄럽다고 해야 하나 놀랍다고 해야 하나. 완역판을 읽어보니 왜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버드나무 >,<버드나무>...하는지 쉽게 이해가 갔다. 모를래야 모를수 없었다. 눈이 번쩍하고 트이는 명문장들의 향연이었으니까. 시대를 가볍게 뛰어넘는 걸작이라는 표현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쩌다 난 이걸 이제서야 읽게 되었다는 말이냐, 이렇게도 좋은 책을...이라면서 심하게 반성하면서--한편으로 책이 너무 재밌어서 반색하면서--읽게 된 책이 되겠다.


이야기는 두더지가 봄 맞이 대 청소를 하다 집을 나서는 것으로 시작한다. 여지껏 자신의 집을 살뜰하게 가꾸면서 별 불만없이 살아왔던 그는 이상한 기운에 이끌려 평생 처음 밖으로 나선다. 거기서 만난 것이 바로 물쥐, 강가에 살고 있었던 그는 처음 만난 두더쥐를 친절하게 맞아들인다. 그리고 자신의 집과 소풍에 초대 하고, 친구들을 소개시킨다. 그간 홀로 살아왔던 두더쥐는 난생처음 친구란게 생기고, 호젓한 강가에서의 호사에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하다.  그렇게 물쥐와 평화로운 나날들을 즐기고 있던 두더쥐는 호기심에 두꺼비와 오소리를 만나러 간다. 마을의 최고 부자이지만 조울증과 ADHD, 즉 주의력결핍 과다행동장애의 전형적인 증상을 고루고루 보여주시는 두꺼비는 이번에 자동차에 필이 꽂힘으로써 자신을 위험에 몰아넣는다. 난폭한 곡예운전으로 자신을 물론이고 행인들의 안전마저 위험에 처하게 만들자, 그간 이를 위태롭게 바라보던 동물 친구들은 개입에 나서기로 한다. 하지만 아전인수격에 자화자찬의 대가이자, 인내심은 박약하고, 변덕이 심한 두꺼비를 과연 누가 말릴 수 있겠는가. 개과천선할 생각이 전혀 없던 그는 인간의 자동차까지 훔침으로써 결국 20년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갇히고 마는데...


이 책이 동화책이라고? 물론 그렇다.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려면 적어도 어른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동물들이 주인공이고, 내용 자체도 아이들이 이해하기에 어렵지 않지만서도, 그들이 문장 하나하나에 박힌 아름다움까지 이해하긴 어렵지 않을까 싶었다. 쉰이 넘은 케네스 그레이엄의 살아온 경험들이 고스란히 배어든 문장들이니 안 그렇겠는가. 적어도 30대는 넘겨야지나,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이 아름다운 나레이션을 이해하거나 음미하는게 가능할 것이다. 아이들에겐 그저 의미없는 주절댐일 수 있지만,알고보면 한 문장도 의미없이 쓰여진 것이 없었으니 말이다.어떻게 이런 표현을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는 것일까? 놀라웠다. 그런 그레이엄을 보면서 왜 그가 작가가 될 수밖엔 없었고, 당대는 물론이거니와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름을 날리고 있는지 이해가 됐다. 시처럼 아름다운 명문장들이 줄줄이 이어지리니, 거기다 그 문장 하나하나가 다 신선하고--지금까지도 말이다.--전개 자체도 독창적이었다, 참나, 도대체 그동안 동화작가들은 뭐를 한 것일까? 그간 수많은 동화책을 읽어봤지만서도, 이 책에 대적할만한 독특하고 신선한 책은 만나본 적이 없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일단 읽게 되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아, 어쩌다 나는 이런 책을 이제서야 읽게 되었던고, 그리고 그레이엄은 도대체 얼마나 명문장가기이게, 이런 책을 뚝딱뚝딱 지어냈단 말이냐?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탁월한 명문장이라는 것에도 감격했지만, 그보다 더 감동스러웠던 점은 이 책이 작가가 자신의 외아들을 위해 지은 베드타임 스토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 20살을 넘기지 못하고 자살을 했다니, 이런 끔찍한 결말이 있는가 싶다. 이런 이야기를 배드타임 스토리로 읽어주는 아버지가 얼마나 된다고, 왜 그는 삶을 시작하기도 전에 버려버린 것일까? 그것도 목이 잘리고 온 몸이 부서지는 열차 자살 사고로 말이다. 그 사건이 그레이엄에게 얼마나 강력한 충격을 주었을지, 아들이 죽은 뒤로 그 긴 세월을 어떻게 감당하고 살았을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감옥에 갇힌 기분이었겠지.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 받아서 말이다. 부자 사이에 무슨 갈등이 있었길래 결국 그런 비극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는지, 지금에서야 알길이 없지만서도,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이가 나중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은 왠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이제 그 이야기를 만들어 낸 아버지와 아들은 모두 자신들의 사연을 뒤로 한 채 과거의 사람들이 되었다. 우리들에게 궁금증과 무한한 감사를 남긴 채... 그들의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평가했던지 간에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남겨 주었다는 점에서 그들의 인생은 가치가 있는게 아니었을런지. 그레이엄 부자의 명복을 조용히 빌어본다.


참, 제목에서 드러나듯 주석이 달렸다. 주석자가 이 책만을 한평생 연구했다고 하는데, 그 결과를 이 한 권에 구겨 넣은 모양이었다. 원문 사이드에 주렁주렁 달린 주석은 종종 책을 이해하는데는 도움이 된다. 가끔은 귀찮은 사족이 되기도 하고, 읽어도 안 읽어도 그만인 구절들도 있다. 그렇다고 보니 원본만 골라 읽는다고 해도 <버드나무...>의 아름다움을 알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다만, 저자의 주석이 책을 깊이있게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건 사실이다. 보다 입체적으로 볼 수 있는 관점들을 제시해 주니 말이다. 책과 저자와의 관계가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보니,< 버드나무..>가 만들어진 시대와 그레이엄의 사생활에 대한 정보는 책에 대한 이해를 한층 높이고 있었다. 그렇긴 하지만 작을 글씨를 읽는 것이 짜증나고 부담스러우신 분들이라면, 굳이 주석을 읽지 않아도 상관은 없을 것이다. 원본 자체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몰라볼 수는 없으니 말이다. 그런 유일하고 독특한 아름다움은 굳이 해석이라는 필터가 없어도, 인간이라는 감성만 가지고 있다면 느끼는데 어려움은 없을테니까. 하니, 시간이 없는 분들이라면 적어도 원본은 읽어 보십사 추천한다. 놓치면 아까운 그런 아름다움이니 말이다. 참 ,이 책의 별 점은 해서 <버드나무...>자체의 별 점이라고 여겨 주심 되겠다. 주석까지 포함한다면 점수가 내려가야 하는데, 주석때문에 원작의 별점을 까먹기는 그래서 그냥 원작의 별점으로 매기기로 했다. 어쩌겠는가. 아마 주석자도 그건 이해할 것이다. 본인이 쓴 글이 이런 걸작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을테니 말이다. 하긴 그걸 모른다면 어떻게 평생의 연구 과제로 <버드나무...>의 해석에 매달렸겠는가? 아마 주석자도 그건 이해할 거라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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