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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 길러진 아이 - 사랑으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희망을 보여 준 아이들
브루스 D. 페리 & 마이아 샬라비츠 지음, 황정하 옮김 / 민음인 / 2011년 5월
평점 :
혈연 관계가 아닌 할아버지 손에 남겨진 아이가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아동 복지국에선 그를 잊어 버렸고, 할아버지는 하는 수 없이 그 아이를 키우기로 한다. 지능이 약간 모자라는 이 할아버지의 직업은 개 사육사, 평생 아이를 가져본 적도 아이를 키워본 적도 없던 이 할아버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아는 방식으로 아이를 키운다. 바로 다름아닌 개처럼. 그가 딱히 나쁜 마음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할아버지는 그저 몰랐다. 아이를 개처럼 키우면 개처럼 크게 된다는 것을. 하여 개 우리에서 개들와 함께 자라난 만 여섯살의 소년을 본 의료진은 경악하고 만다. 그가 걷거나 말을 하는 대신 네 발로 기면서 으르렁댔기 때문이다. 당시 유아 시절의 트라우마를 전문으로 연구하던 저자는 도무지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난감해 한다. 인간다운 점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었으니 안 그렇겠는가. 하지만 그의 과거를 알게 된 저자는 그가 미쳤거나 정신 지체가 아니라 유아시절의 학대가 빚어낸 결과라는 것을 알게 된다. 이유를 알았으니 이제 남은 것은 그를 아이답게 고치는 것뿐, 저자는 거기서부터 본격적인 고민을 시작한다. 과연 이 아이를 제대로 인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인지 자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아시절에 습득된 것들을 바꾸어 놓는다는 것이 어렵다는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에게 접근을 하는데... 과연 개로 길러진 아이는 인간 사회에 적응할 수 있을까? 아니, 무엇보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것을 알 수나 있는 것을까?
저자가 소아 정신과 전문의라고 하는데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감사하게 된 것은 아이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으로 도와주려 한다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이미 아이가 아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어려움을 잊어 버린다. 자신들이 어린 시절 겪었던 고통들은 싸그리 잊어 버리고 , 아이들의 고통과 어려움과 슬픔을 그저 아이들의 변덕이라고 치부하기 일쑤다. 내진 어리니 뭘 알겠어란 식이라거나... 아이들은 단지 표현에 서툴 뿐인데도, 다그치고, 화를 내고, 이해하지 않는다. 이해하지 못한다는게 정확한 말인지도 모르겠지만서도. 하긴 이용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용당하는 줄도 모르는 아이들을 이용해먹는 어른들은 쎄고 셌으니 말이다. 하여간 이런 어른들의 실수에 대해 가장 그래도 용서해줄만한 것은 내가 몰랐다는 것이다. 하지만 무지를 들이민다고 해서 상처과 고통이 절로 치유되는건 아니질 않는가. 하니, 깨인 어른이라면 난 단지 몰랐다는 말로 용서를 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무지는 면죄부가 될 수 없다. 그걸론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우린 아이들을 위해 과연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트라우마때문에 힘겨운 유아시절을 보낸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을 이해하고 치료하는 과정을 써내려간 책이다. 말을 못하니 항변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방치되거나 버려지다 시피한 유아들은 나중에 어떻게 될까? 어른들의 안이한 생각처럼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이에 벌어진 일이니 별 영향이 없는 것일까? 그렇진 않다고 한다. 저자는 인간에게 유아시절이 얼마나 인생에서 중요한 시기이고, 그때 벌어진 학대가 어떻게 인간성을 훼손하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책을 보면서 감사했던 일은 말을 못하는 아이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저자가 통찰력과 이해심을 발휘하고 있더라는 점이었다. 이런 정신과 의사들 덕분에 아이들의 세계를 조금더 잘 알게 된다는 점은 얼마나 마음 놓이는 일일런지... 재능있는 사람들의 이런 값진 노력이야말로 "노블리스 오블리제" 라고 칭송받아야 하는게 아닐까 한다. 우린 이 세계가 더 나아지길 날마다 바라고 있지만서도, 그러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아이를 잘 키우는 것이라는 것은 간과하는 듯하다. 고통스런 어린 시절이 없는, 트라우마가 없는 유아기를 보낸 아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했을때 우리 사회는 훨씬 더 밝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왜 모르는 것일까? 그저 사회가 좋아져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아이들에겐 학대와 폭력과 몰이해와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쓰레기 취급이나 하는 어른들이 과연 올바른 행동을 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인지 따지고 싶다. 아니, 올바르지 않다. 절대로...
만 세살 이전의 유아를 키울때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해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꼭 읽어봐야 할만하다. 이 책을 보면서 놀란 점은 서양의 개인주의가 아이들에겐 얼마나 나쁜가 라는 점을 알게 해줬다는 것이다. 아이 시절에는 무조건 많이 안아주고, 얼러주며, 관심을 가져주고, 예뻐해 주는 것이 최고라고 한다. 접촉이나 대화가 없는 유아기가 아이들에게 최악의 양육 조건이라고 하는데, 뭐, 상식적인 말이다. 걷지도 못하는 아기를 홀로 둔다는게 말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서양에선 드문 일이 아니라고 하니, 참 할 말이 없다. 1살난 아이가 무슨 독립을 해야 하는 20살난 성인인가? 홀로 서기를 하라고 혼자 두게?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 되었다. 다른건 몰라도 이런 서양식 사고나 행동은 그렇게 인간적으로 비춰지지 않는다. 그들도 늘 옳을 수는 없는가 보다. 이 책의 저자 말로는 우리나라 같이 유아기때 늘 업고 다니는 문화가 아이들 성장엔 바람직하다고 한다. 인간적인 접촉을 유지하면서, 사람들 속에서 말을 배우게 되니 말이다. 더불어 현대에 학대로 길러진 아이들이 늘어나는 이유는 핵가족이 늘어났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분명히 말하지만, 폭력만이 학대의 전부는 아니다. 방임이나, 유기, 돌보지 않는 것 역시 학대다. 그렇기에 아이를 키우는데는 대가족이 낫다고 한다. 양육 정보를 대물림 할 수 있는데다, 부모의 학대를 방지하거나 감시하는 역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부모 기능을 못하는 사람이 있을 시 자연스런 바톤터치도 가능하고 말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유아 시절의 트라우마가 아이들에게 끼치는 막강한 영향력을 알게 해준 것이 장점이다. 거기에 이미 트라우마가 생긴 아이들을 어떻게 치료해 나가야 하는가를 보여준 것이나, 정신적인 데미지를 겪은 아이들을 우리가 얼마나 오해하기 쉬운가를 설명해 준 것도 좋았다. 치료 방법중 하나로 저자는 스킨쉽이 가져다 주는 놀라운 치유력에 대해 말하는데, 아이를 둔 부모들이라면 귀담아 들어두면 좋겠다 싶다. 유아 시절 충족되지 못한 스킨쉽은 결국 나이가 들어서라도 충족이 되야 나이에 맞게 성장이 가능하다고 하니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트라우마때문에 성장이 지체된 아이를 통해 아이들의 성장패턴을 알게 된다는 점이었다. 무엇가 잘못된 것을 보면서 빠진 것을 알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들 덕분에 보통의 아이들을 이해하는 길이 열린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 하지 않는가. 그렇게 연결 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건 아마도 이 저자에게 공을 돌려야 할 듯....그만의 통찰력과 연민과 인내가 만들어낸 이해였으니 말이다. 태어나자 마자 트라우마를 겪을 수밖엔 없었던 슬픈 운명의 아이들에게 그나마 이런 분들이라도 있다는 것이 다행이지 싶다. 이 분같은 유아 정신과 의사들이 많아진다면 우리의 미래는 훨씬 더 밝아지지 않을까...
참, 이 책을 보면서 깨달았다. 우리가 남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따라서 그들이 그렇게 변화한다는 것 말이다. 우리가 상대를 개로 취급하면 그는 개로 성장한다. 우리가 상대를 인간으로 키우면 그는 인간으로 성장할 것이다. 우리가 상대를 노예로 취급하면 그는 노예로 성장할 것이고, 우리가 그를 쓰레기로 취급하면 그는 쓰레기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상대하는 사람을 자신이 어떻게 대하는가 한번쯤은 숙고해봐야 하지 않을까. 과연 우리는 그들을 제대로 대접하고 있는가? 그게 왜 중요하냐고? 인간사회란, 그리고 관계란 거울 같은 것이다. 우리가 그를 개 취급하면 그 역시 자라서 우리를 개 취급 할 것이다. 관계란 언제나 일방적일 수는 없는 것이니 말이다. 내가 남을 대한 것 그대로 그 역시 나를 그렇게 취급하게 되지 않겠는가. 쉽게 말해 관계란 결산을 해보면 쌍방향이더라는 것이다. 오늘 투표를 하는 날인데, 우린 과연 어떤 대접을 정치가들에게 받고 있고, 과연 우리가 그런 대접을 받을만한 사람들인지 잘 생각해볼 일이다. 그들이 우리를 대접하는 것이 옳은 것 같다면 그대로 있어도 좋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를 대접하는 방식이 맘에 안 든다면, 알아야 한다. 우리가 변하지 않는 한 그들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가 막아서지 않는다면, 그게 맘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절대 모를테니 말이다. 왜 변하고 바뀌겠는가? 언제나 그게 먹히는데...그러니 개로 길러 지고 싶지 않다면 , 개 취급을 하지 말라고 우리가 나서서 짖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무지해서건 ,멍청해서건 , 우리가 주장하는 바대로 심성이 나빠서건, 그들이 우리를 개 취급 하는데는 아는 것이 그것밖에 없어서 일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 개 사육사 할아버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