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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플릿 스커트
아그네스 로시 지음, 김진준 옮김 / 바리데기 / 1996년 6월
평점 :
품절
도서관 서가를 돌다보면 이런 책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아 언제나 쓸쓸하고 외롭게 서 있는 책...이 책이 바로 그랬다. 오랫동안 지켜 봐도 누구도 빌려 가지 않아 먼지만 잔뜩 쌓여 있었는데, 오늘은 왠지 그 모습이 안 되어 보여 큰 맘 먹고 빌려왔다. 오래된 책이라 다소 유치하고 진부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줄거리는 이렇다.
대부호의 아내 타일러 부인은 상습 절도로 3일간의 감옥살이를 하게 된다. 3남 1녀의 엄마로, 부잣집 사모님으로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는 그녀였지만 도벽은 고쳐지질 않는다. 한때 정신병원에 입원한 적도 있었지만 다시 재발한 도벽, 그녀는 필요도 없는 것들을 훔치는 자신이 이해되질 않는다. 손을 써보겠다는 남편을 만류하고 이번만큼은 자신이 한 행동에 책임을 지겠다고 감옥 살이를 자청한 그녀는 같은 방을 리타라는 스물 일곱의 여자와 쓰게 된다. 음주 운전과 마약 소지로 감옥에 들어온 리타는 감옥에 들어왔다는 사실보다 남편과 삐걱대는 관계가 더 걱정스럽다. 감옥이 아니었다면 전혀 만날 가망이 없던 두 사람은 감옥이라는 공간에 갇혔다는 동질감때문이었는지 서로에게 마음을 털어놓기에 이른다. 감옥에 있는 그 3일동안 그 둘은 서로의 문제가 무엇인지 들여다 보게 되는데...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다. 왜냐면 누구도 자신의 거울이 되어줄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문제를 객관적으로 바라볼만한 눈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없기 때문에 우리에겐 상대가 필요하다. 내 자신의 문제를 들여다 봐 줄만한 친구로써 말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당신의 거울이고, 당신은 나의 거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각자는 대부분 문제들을 한보따리씩 안고 사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에 거울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것이 아마도 인간이 혼자 살아갈 수 없는 한가지 이유라고 본다. 그런면에서, 부잣집 마나님인 타일런 여사와 리타는 뜻밖에도 감옥에서 자신들의 거울을 만나게 된다. 타일러 부인은 본인 조차도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 병을, 정신과 의사도 고치지 못했던 병을 리타에게 털어놓음으로써 이해하게 된다. 리타 역시 꽉 쥐고 놔주지 않으려 하는 결혼 생활이 이미 오래전에 파탄났음을 깨닫게 된다. 창피해서, 또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말하지 못했던 것을 허심탄회하게 말함으로써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결국 그들의 감옥에서의 3일은 예기치 않게도 깨달음의 나날이 되버린다. 평생을 몽유병 환자처럼 악습과 고통을 껴안은 채 생각없이 살아가던 두 사람이 드디어 자신들의 문제를 파악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하지만 과연 문제를 깨달았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 되기는 하는 것일까? 감옥을 나온 두 사람은 과연 어떻게 될까?
1996년 나온 책인데, 이 책도, 원서도 절판인 모양이다. 현재는 당연시되는 페미니스트적 견해들이 소설속에 날렵하게 들어있는 걸 보곤 웃었다. 이 책이 나왔을때만 해도 진보적인 발언이라고 여겨졌을텐데, 이젠 어느정도 상식으로 받아들여진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저자가 보여준 여성의 삶에 대한 분석이 날카롭던데, 그런 통찰력은 지금도 색이 바라지 않고 유효하지 않는가 한다. 페미니스트 여성들이라면 한번 보심도 좋을 듯...여자들만이 공감할 수 있는 솔직 담백한 이야기들이 성찬처럼 풀려져 나가니 말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저자가 선배여자라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녀가 고민하고 바라본 문제들은 여전히 우리들의 문제니 말이다. 절판된 책이긴 하나, 어떤 도서관에서는 누군가 주목해주길 바라면서 쓸쓸하게 서 있을지 모르니, 보시면 데리고 가셔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