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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나침반
앤 타일러 지음, 변용란 옮김 / 살림 / 2010년 11월
평점 :
절판
평생 일해온 학교에서 조기 은퇴를 권고받은 육순의 리엄은 자신이 벌써 은퇴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살랬다고, 씀씀이만 줄이면 사는 덴 지장이 없을 거라고 자신을 다독이는 리엄... 집 먼저 줄여야 겠다 생각한 한 그는 퇴직을 하자마자 임대주택으로 이사를 한다. 이사한 그날 밤, 이곳에서 내가 말년을 보내겠구나 생각하던 리엄은...그 후 병원에서 정신이 들고 만다.
이사간 첫 날, 집에 강도가 들었다는 것이다. 집 구조에 익숙치 못했던 리엄이 문을 잠그지 않고 잔 것이 화근이었다. 그나마 이웃집 부부의 신고로 목숨은 건졌다는데, 머리에 상처를 입고 입원중인 리엄은 그 상황이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다. 어리둥절해진 리엄은 꼬치꼬치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물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무도 모른 다는 것... 다들 충격때문에 그럴 수 있다며 위로를 해주지만, 목숨이 위태로웠을 정도의 사건을 겪었는데도 기억이 없다는 것에 그는 기분이 상해버린다. 갑자기 참을 수 없이 기억에 집착하게 된 리엄은 사라져버린 기억을 찾겠다고 뇌 신경과 전문의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노망난 할아버지의 기억을 되새겨주고 있는 유니스를 보게 된 그는 자신에게도 기억을 되살려 주는 사람이 있었음 바라게 된다. 그 할아버지가 부러워진 그는 거짓말로 유니스에게 접근하는데...
내가 미국의 박완서라고 부르는 앤 타일러의 신작이다. 연세가 드시면서 내놓은 작품들이 좀 비관적인 것들이라 걱정을 했었는데, 이 책 역시 노년이 겪는 여러 난감한 상황들을 보여줌으로써 다소 암담하다는 느낌은 들긴 했지만, 과거 작품들보단 그래도 밝은 느낌이 들어서 안도했다. 글을 잘 쓴다는 의미에서 미국의 박완서라고 했지만--또 존경받는 여류 작가기도 하고--리뷰를 쓰면서 생각해보니, 삶을 다루는 태도에선 닮은 점이 없어 보이기는 한다. 어찌보면 공통분모가 여자인게 다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흠.
뭐, 하여간, 노년의 일상을 꼼꼼하게도 담아놓으셨는데, 이렇게 쓸쓸할까? 라는 생각이 들정도로 암담하긴 하다. 거짓말을 못하시는 분이니, 정말 그럴지도 싶기도 하고, 또 시각 차이이니 이렇게 나쁘진 않을거야. 라는 생각도 든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녀가 그린 책속의 일상들이 너무도 설득력 있어서 그럴 듯 하긴 했으나, 분명 우리의 삶과는 많이 달랐지 않는가. 그렇다면 앤 타일러가 그린 이런 노년처럼 늙어갈 확률은 0.1% 정도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우리랑 정서도 다르고, 문화도 다르고, 노년을 바라보는 시선도 다르니 말이다. 무엇보다 여성과 남성의 차이도 있는 것이니까.
여성이라면 적어도 친구나 가족들이 주변에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인 리엄에겐 남은 것이라곤 자신뿐이다. 사별한 아내 한 명에 이혼한 아내 한 명, 그리고 딸 셋과 손자가 있긴 하지만 모두 다 그에게는 먼 사람들이다. 가족이라기 보다는 가끔 만나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밖엔 없으니 말이다. 결국 그의 노년의 희망이라면 짝을 만나는 것,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평생 살아도 만나지 못한 짝을 육순의 그에게 찾아올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없다고 보심 된다. 그렇게 인생을 놓다시피 체념하고 살아온 그에게 강도를 만난 사건은 자신 안의 무언가를 일깨우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놀랍게도 자신을 좋아해주는 유니스를 만난 리엄은 뒤늦게나만 삶의 희망을 움켜 쥐게 되는데, 과연 그는 그것을 계속 잡을 수 있을 것인지...그것이 아마 작가 앤 타일러가 하려던 말이 아닐까 싶었다.
전작보단 덜 슬퍼서 좋았다. 전작인 <아마추어 매리지>에선 결혼과 인생을 어찌나 비관적으로 그려놓았던지 읽다보니 세상이 다 암담해 보이더라. 환상에 절은 책도 별로지만은, 현실을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작품도 보기 버겁다니까. 하여간 육순의 이혼한 은퇴자 리엄이 주인공이길래 설마 이 책도? 라면서 걱정했는데, 다행히도 톤은 그리 비관적이지 않았다. 나이 든 남자의 일상을 따라다니면서, 희망을 잃고 자신을 홀로 고립시킨 채 살고 있던 사내에게 은혜처럼 희망이 찾아오지만 결국 그가 놔버린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내용이 그닥 밝다고는 할 수 없음에도 비관적이지 않다고 하는 이유는, 억지 결론이 아니라, 자연스런 순리를 그리고 있어서 그런게 아닐까 싶다. 어찌보면 희망을 그린다는게 더 슬플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냥 인생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 편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슬프지도 기쁘지도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겠지만, 그리고 남들이 보기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 같아서 심심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자기 자신을 속이는 일은 아니니 말이다. 음, 그러고보니 앤 타일러가 말하려던 것이 그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늙게 되면 더 이상의 드라마를 만드는 것도 , 자신을 속이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 말이다. 그런 현상들이 젊음이가 짐작하는 것만큼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고, 어쩜 그렇게 인생이 흘러감을 받아들이는 것도 지혜일지 모른다는 말을 작가는 하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뭐, 이런 책 하나를 보면서 인생 전반을 깨친 듯 난리를 피울 생각은 없으니, 삼천포로 빠지는 것은 이쯤에서 하기로 하고...
5년만의 신작이라고는 하지만, 그녀의 최고 걸작은 못된다는 걸 알려 드린다. 흠. 과연 앞으로 나올 책들 중에서 그녀의 최고 걸작이 있으려는가는 모르겠지만서도, 아마 그렇기는 힘들 것이다. 아무래도 나이가 드시니 젊은 시절의 발랄함과 재치, 따스함과 너그러움, 그리고 순발력과 유연함이 예전만 못하다. 그럼에도 썩어도 준치라고 , 아무리 못 쓰신다고 해도 중간은 되신다. 하긴 평생 글을 써 오셨는데, 그 가락이 어디 가겠는가만은... 맞아, 글을 잘 쓰시는 분이었지, 라는걸 기억나게 할만큼 잔잔한 설득력은 여전했다. 하지만 그녀를 잘 알지 못하는 독자라면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을 듯... 하니 앤 타일러에게 애정을 붙이시고 싶은 독자라면 다른 책들을 집어 드시라고 권하고 싶다. <우연한 이방인>이나 그외 다른 책들, 다 아름다운 책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