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 홀 1 - 2009년 맨부커상 수상작
힐러리 맨틀 지음, 하윤숙 옮김 / 올(사피엔스21) / 2010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1. 부커상 수상작이라는 문구에 아무 정보없이 보게 된 책이다. 어떤 내용일까 궁금해하며 첫 페이지를 넘기고는 약간 실망했다.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헨리 8세를 다룬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니 뭐야, 그렇게 써대고도 아직도 쓸 것이 남았다는 거야? 거기다 부커상을 탔다고? 시간상으로나 거리상으로 한참 떨어진 한국에서 조차 유명한 인물이라면 당연히 본국인 영국에서야 모르는 사람이 없을만한 이야기인데, 그걸 다룬 이야기가 상을 받았단 말이지. 흠...이해되지 않았다. 설마 헨리 8세에 대한 영국인들의 사랑이 차고 넘치는 바람에 그 시대를 다룬 책을 쓰면 일단 상먼저 주고 보자는 심사가 아닌 다음에야, 널리 알려지다 못해 식상해져 버린 소재를 다룬 책에 도대체 상은 왜 준 것일까?  어쨌든 역사소설이라고라, 흐미...지루한건 싫은데, 라면서 뜨악한 표정으로 페이지를 넘겨 보았다. 그리곤...단박에 알아차렸다. 왜 이 책이 상을 받았는가 하는 것을. 비록 소재는 식상할지 모르나, 이야기를 다루는 폼새나 인물들을 파악하는 통찰력, 한 시대를 풍미한 역사적인 인물들에 대한 현대적인 시각이 전혀 색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찌나 그 시대를 생생하게 그려냈던지, 책에서 인물들이 줄줄이 몰려나와 나에게 말을 건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작가의 역사 전반을 아우르는 통찰력에, 공정하고 공평한 시선, 인물을 새롭게 조명할 줄 아는 편견없는 자세, 무엇보다 힘있게 주제를 밀어붙이는 집중력엔 감탄할 수 밖엔 없었다. 요즘 이렇게 신선한 책을 만난 적이 있던가? 없지 싶다. 한자 한자 읽어 내려갈때마다 줄어드는 페이지가 어찌나 아깝던지 일부러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책장을 덮으려니 한없이 아쉽긴 했지만서도, 뭐, 읽는 동안 희희낙락했으니 그것만이라도 감지덕지다. 실은 요즘 읽은 책들이 다 거기서 거기라 다소 포기하는 심정이었는데, 그런 와중에 만난 책이라 그런지 더 신선했다. 그래, 부커상을 아무에게나 줄리는 없지. 역시나 부커상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어. 라면서 부커상 찬가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나를 열광하게 한 책의 진가는 무엇일까? 소개해 보기로 한다.

 

2. 우선 이 책의 특징을 뽑으라면 주인공이 헨리 8세나 그의 아내 앤 볼린, 그리고 그들과 대척점에 서 있었던 토마스 모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이라면 영화 <천일의 앤>이나 <사계절의 사나이>, 그리고 요즘 새롭게 조명되어진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익히 알려졌을텐데, 흥미롭게도 이 책의 주인공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속에서 악역이나 조연으로 등장하는 토마스 크롬웰이다. 어떤 역사 교과서나, 영화속에서도 악마로 등장하는 바로 그 말이다. 그렇다면 토마스 크롬웰은 누군가? 그는 애정이 식어버린 조강지처를 버리고 애첩과 결혼하기 위해 이혼이 간절하게 필요해진 헨리 8세를 도와 나라의 종교마저 바꾸어 놓은 인물이다. 이해가 되시는가? 나라의 종교를 바꾸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냈다는 것을. 그것도 올바른 대의 명분에 의한 것도 아니고, 단지 왕의 재혼을 위해서 말이다. 이 얼마나 웃기는 사건인가?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을 해내기 위해 과연 얼마나 많은 중상모략에 설득에 협박에 계획과 추진력, 의지가 필요했을까? 상상이 되지 않는다. 그런 결과가 필요했던 인물이 헨리 8세였다면 그걸 가능하게 한 사람이 바로 토마스 크롬웰이다. 과연 어떤 인물이었기에 그 말도 안되는 과정들을 해낸 것일까? 역사가들이 서술하듯 그는 단지 출세에 눈이 먼 아첨꾼에 불과한 사람일까? 그래서 마냥 고귀하고 품위 넘치는 우리들은 그를 마음껏 비웃고 비난해도 좋은 것일까? 혹시 역사에서 악역을 맡고 있는 그에게서 배울만한 점은 없는 것을까? 한번도 이런 점들에 의문을 품지 않았던 분들이라면 아마 이 책을 읽으시는 동안 생각이 달라지실 것이다. 이 책의 작가인 힐러리 맨틀이 너무도 설득력있게 당시를 입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통에, 그녀의 시선을 통해 줄거리를 따라가다보면 그간 내가 알았던 것들이 단지 한 면만 줄기차게 바라본 편협적이고 단편적인 것이었음을 알게될테니 말이다.  모두에게 알려진 역사를 가지고도 이렇게 다른 해석을 할 수 있다니, 작가가 존경스러웠다. 어릴적 실종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뒤 사건 이면을 통찰하는 눈이 생겼다던데--쉽게 말하면 다르게 보는 삐딱한 시선?--그녀의 인간에 대한 통찰력은 그야말로 경이로울 정도였다. 하여간 그녀의 눈을 통해 들여다 본 16세기 영국 튜더왕정의 실체는 매혹적이고 흥미로움 그 자체였다고 보심 된다.

 

3. 대강의 줄거리는 이렇다. 토마스 모어가 명망높은 변호사 가문에 태어나 천재 소리를 들으면서 자랄 동안, 토마스 크롬웰은 비천하고 비루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무지막지하게 패는 아버지를 피해 간신히 집을 빠져나온 그는 유럽 이곳 저곳을 떠돌면서 성장하게 된다. 용병에 고리대금업자, 그리고 무역상을 하며 떠돌던 그는 변호사가 되어 영국에 정착하게 된다. 당시 영국의 실세인 울지 추기경의 휘하에 들어간 그는 처음으로 아버지다운 인물을 만나 인생을 새롭게 시작해 나간다. 부자 미망인과 결혼한 그는 아들과 딸을 얻고는 바쁘지만 안락한 삶을 살아가지만, 열병으로 아내와 두 딸을 하루아침에 잃고는 충격을 받는다. 그러던 와중 그를 비호해주던 울지 추기경이 헨리 8세의 눈 밖에 나면서 서서히 권력 밖으로 밀려 난다. 권력의 정점에서 추락해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울지를 보면서 크롬웰은 정치의 비정함을 체험한다. 비천한 출신에 의심스러운 과거, 모든 귀족 나부랭이들이 그를 천시하는 가운데 그의 능력에 주목하게 된 헨리 8세는 골치아픈 일들을 그에게 떠맡긴다. 생기발랄한 앤 볼린과 사랑에 빠진 헨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조강지처를 버리고 이혼을 하려 하지만 쉽지가 않았다. 주변 국가들과의 역학 관계, 카톨릭 수장인 교황이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데다, 왕비에게 동정적인 여론이 팽배해지자, 헨리는 인내심을 잃고는 나라야 어떻게 되던지 간에 자신의 문제를 먼저 해결하라고 크롬웰을 닥달한다. 거친 환경에서 자라면서 현실 감각 하나만은 탁월했던 크롬웰은 그만의 끈기와 통찰력, 간계로 서서히 불가능해 보였던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나간다. 드디어 앤과의 결혼에 성공한 헨리는 크롬웰을 국왕 비서에 임명하고 그는 비로서 자신의 성공을 실감하게 된다. 더 없이 좋은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는 모어의 고집앞에서 갈등하게 되는데...

 

4. 이 시대 이야기의 줄거리는 대강 아시리라 본다. 다만 그렇다고 재미 없진 않을까 걱정하진 마시라. 이 책에서 주안점은 줄거리가 아니니 말이다. 그 이야기를 둘러싼 인물들의 갈등이고, 그 캐릭터들을 인상적으로 그려낸 개성들이며, 장면들을 배치해내는 작가의 안목이니 말이다. 16세기의 일들을 어찌나 현재처럼 그려내 보이던지, 전혀 고루하지 않았다. 역사 소설을 읽게 되면 흔히들 작가들이 하게 되는 오류가 그들은 과거 사람이라 현재와는 다를것이라는 생각인데, 이 책의 작가는 그런 틀에서 일찌감치 벗어나 있었다. 어찌 다르겠느냐는 것이다. 그 인간이 다 그 인간이지...하여 그들이 욕망과 이상, 현실이 충돌하면서 보여주는 갈등들이 생생하다못해 동시대를 보는 듯 실감이 났다. 그들은 결국 중뿔난 인물들이라서 그런 일들이 벌어진게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은 인물들이었기에 그런 일들이 벌어진 것이라는 견해엔 꼼짝없이 설득당하고 말았다. 거기에 사건을 이끌어 나가는 재치있는 대화들에 선명한 인물 묘사, 탄탄한 구성에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충실한 해석, 이미 죽어서 매장되어 버린 역사적인 인물들을 어찌나 매력적으로 살려 냈던지, 도무지 단점을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그런 책이었다. 가디언지 서평에 " 방대한 양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도 더 읽고 싶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고 했던데 전혀 빈말이 아니었다. 이 책에 열광한 독자인 나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 작가가 후속작을 쓰고 있다고 한다. 부디 그것이 사실이길 바라면서, 빨리 후속작이 나와주었음 하는 바람이다. 비천한 출신에 학대하는 아버지를 둔 크롬웰이 한 나라의 최고 실력자로 성공해 가는 과정을 이 책에서 봤으니, 그렇게 매력적이고 인간적인 그가 어떻게 헨리 8세의 신임을 잃고 사형집행인의 도끼질에 목이 잘리게 되었는지 그 몰락 과정 역시 읽어보고 싶다. 물론 역사속의 사실들은 바뀔리 없으니, 다른 책을 통해 찾아 본다면야 알 수 있겠지만서도, 중요한 것은 사실이 아니라 이 작가의 시야에 잡혀 걸러진 역사 아니겟는가.  하여간 대단한 작가임에는 틀림없었다. 간만에 만난 탁월한 책, 실은 이렇게 잘 쓴 책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다. 하니, 인간과 역사에 대해 무게 있는 책을 읽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혹시 역사 소설인데다 두껍다면서 망설이고 있으시다면, 작가가 유머감각과 재치가 돋보이던 사람이라 전혀 지루하지 않았음을 알려 드린다. 오랜만에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걸출한 책을 만나게 되서 무척 반가웠으니, 다른 분들도 나 못지 않은 감동과 재미를 느끼셨음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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