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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 무라카미 하루키 소설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9년 11월
평점 :
볼까 말까 망서리다 그래도 얇잖아? 하면서 집어든 책인데, 첫 페이지부터 나를 사로잡았다. 기분 좋게 만드는 천연덕스러운 문장들이 나로 하여금 하루키가 현재 일본에서 가장 잘 나가는 작가가 된 게 절대 우연이나 행운이 아니라는걸 확인하게 해 줬으니 말이다. 수필을 어쩜 이리도 유려하게 잘 쓰시는지, 근래 들어 일본 작가들의 수필을 꽤 읽은 편인데, 그들을 다 합친다고 해도 이 책에는 대적하지 못하지 싶다. 탁월하고 독창적인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너무 너무 쉽게 쓴다. 인상 한번 변하지 않으면서 툭~~툭 재기발랄한 말 한마디씩 던지고는 휘~~휘 유유자적 걸어가는 선배를 보는 듯 하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딱 군더더기 없이 힘 쫙 뺀 문장들. 이런 문장들을 보면서 하루키를 사랑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이 책에 묶인 글들은 하루키가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느긋하게 연재한 것이라는데, 오히려 아무도 읽지 않을 거야 라고 하면서 쓴 것이 주효했지 싶다. 잘 써야 겠다는 강박관념 내지는 기필코 잘 써야만 해 !!! 라는 의지가 보이지 않으니 읽는 나도 편안하고, 요렇게 새침하니 딱 떨어지는 문장들이 나온게 아닐까. 그러고보면 자의식이야말로 작가들에게 최대 강적일른지도 모르겠다.
제목인 <4월의 어느 맑은 아핌에 100%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는 하루키의 광팬이던 이웃(캬누님)을 통해 한번 소개받은 적이 있는 글이다. 그런데 당시 난 그 글이 남성들이 아름다운 여성미를 향한 찬사인줄로만 알고 심드렁해했었다. 아마도 도입부만 보곤 전체를 다 읽지 않은 모양이다. 스쳐가는 이름 모를 여성에 대한 안타까운 찬탄이야 이미 차고 넘치게 들었구만, 하루키씨는 꼭 거기에 한마디 더 보태셔야 했나요 하면서 실망했더란다. 그러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전문을 읽어보니 이거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미 넘치게 들었다는 식상한 이야기와 차원이 다른 하루키씨만의 특유한 시선으로 읽어 낸 인연 이야기, 어느 정도는 내 이야기기도 해서 공감이 100%됐다.
그렇다. 하루키씨의 말처럼 우연히 만난 사람에게 100% 내 인연을 보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게 왜 인지는 절대 알 수 없지만 ,그냥 내 자신만은 아는 그런 것들. 나는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하루키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쩜 모두에게 보편적인 경험일 수도 있겠구나 싶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거나 하루키가 간파했듯이 그런 느낌들을 명쾌하게 설명해줄 만한 이론을 아직까진 들어보지 못했다. 그게 그럴만도 한 것이 나와 아주 잘 맞을 것 같은 사람을 한 눈에 알아봤다는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현재로썬 하루키씨 말대로 전생의 인연이라는 설명이 가장 그럴 듯한 답이다. 다른 적확한 이론을 발견하지 못한 현재로썬 다만 그런 느낌들이 실재한다는 것만은 분명히 하고 싶다. 비록 스쳐 지나갈 뿐인 찰나일지라도 평생 잊기 힘든 경험이라는 점도. 실은 하루키의 짧디 짧은 그 수필을 읽으면서 그에게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망상이라고 치부하고 잊어 버리고 있었던 순간을 떠올리게 해주어서 말이다. 하루키가 아니라면 누가 이런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아마도 그래서 그가 인기가 있는게 아닐까. 우리의 잠재의식속에 숨어 있는 스쳐가는 소소한 감정들을 그만큼 잘 잡아 내서 수면위로 내어 놓는 작가도 없으니 말이다. 그것도 충분히 공감가는 필치로...
그 작품 외에도 깜찍한 단편들이 많았다. 아기 캥거루를 보기 위해 동물원에 간 이야기도 <캥거루 날씨> 좋았지만, 결혼식장에 가면 하염없이 잔다는 그의 일화 <졸립다.>엔 많은 남자분들이 공감하실 듯 싶다. <택시를 탄 흡혈귀>는 약간은 으스스하지만 너무도 설득력 넘치는 이야기로 난 별로 좋아하진 않았지만 다들 너무도 좋아하시는 1Q84의 도입부를 어떻게 쓰게 됐는지 짐작하게 하던 글이었다. 그외 인상적인 글들을 뽑으라면< 버트 바카락을 좋아하셔요?>가 있는데, 그의 질문에 내가 답해 보자면...하루키씨, 안 자길 잘 한 겁니다. 그녀에게 아마도 좋은 추억이 됐을 거여요. 라고 말해 주고 싶다. 지금쯤의 연륜이라면 굳이 타인의 대답이 필요없을테지만서도. < 몰락한 왕국> 역시 의미심장하게 읽혔고, 자신의 신혼 시절을 이야기한 <치즈 케이크 같은 모양을 한 나의 가난>은 그의 인간미를 읽기에 충분한 감동적인 글이었다. 하여간 수필을 이렇게 쉽게 써내려 간다는 것에 그에게 새삼 존경심이 들었다. 이 책을 읽고 그에게 든 인상이라면 깜찍할 정도로 사랑스럽다는 것이었다. 왠지 마음껏 믿어도 상처를 받지 않을 듯한 든든한 오빠 같은 느낌이랄까.
요즘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걸까? 자꾸 묻게 된다. 재능만 있으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좋은 글은 어디에서 나올까? 어느정도는 작가의 기본적인 인간미가 뒷받침 되어줘야 되는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예전엔 재능만 있다면 거짓으로도 얼마든지 자신을 포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 생각이 바뀌었다. 한편의 글속에서라면 그런 포장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지만, 수 많은 글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면에서 좋은 작가를 배출하려면 우선은 아이를 인간미 있게 키우는 것이 가장 기본중의 기본이 아닐까 한다. 엥? 어쩌다보니 이야기가 이상한데로 흘러 버렸다. 하여간 정리를 하자면 좋은 작품들이 많은 책이었다. 다만 완벽하게 다 좋은게 아닌데다 내가 100% 공감했다고 해서 당신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추천작으로 넣는다. 그러니까 너무 남을 의식하지 않으면 또 그게 문제기도 하다. 완벽을 기하지 않기에 약간은 허술하다고 느껴진다는 것 말이다. 별로 완벽하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는다고 하신다면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