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루이스 레이의 다리 - 손턴 와일더의
손턴 와일더 지음, 김영선 옮김 / 샘터사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심지어 지금도, 나를 빼고 나면 에스테반과 페피타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카밀로 홀로 그녀의 피오 아저씨와 그녀의 아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이 여인 홀로 자신의 어머니를 기억한다. 그러나 곧 우리는 죽게 될 것이고, 그 다섯 사람에 대한 모든 기억은 지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우리 자신도 한동안 사랑을 받다가 잊힐 것이다. 그러나 그 정도 사랑이면 충분하다. 사랑을 하고 싶은 모든 충동은 그런 충동을 만들어낸 사랑에게 돌아간다. 살아 있는 사람들은 위한 땅이 있고 죽은 사람들을 위한 땅이 있으며, 그 둘을 연결하는 다리가 바로 사랑이다. 유일한 생존자이자 유일한 의미인 사랑! "


아마도 이 책을 고전으로 만들게 한 명문장이 아닐까 싶어 옮겨 보았다. 언뜻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실텐데,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을 하자면 위 문장에 등장하는 에스테반과 페피타, 피오 아저씨와 카릴로의 아들, 그리고 백작부인의 어머니인 마리아, 위 다섯 사람은 1714년 7월 페루의 산 루이스 레이 다리를 건너다 사망한 사람들이다. 한 세기 전에 만들어져 날마다 수 백명의 사람들이 지나 다닌 다리가 한순간에 무너졌다. 다리가 붕괴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사람들에게 그 사건은 큰 충격으로 다가온다. 특히나 죽은 사람이 ' 나' 일수도 있었다는 자각은 리마 사람들에게 공포와 동요를 몰고 온다. 성대한 미사가 올려지고 회개의 공물이 물밀들이 밀려온다. 그런 소동 가운데서 유난히 침착한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주니퍼 수사다. 때마침 다리가 무너지는 광경을 목격한 그는 "왜 다른 사람이 아니고 그들이었을까?" 라는데 의문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하느님의 예정된 조화 내진 계획이었을 것이라고 확신한 그는 다리를 건너다 사망한 다섯 사람들의 인생을 조명해 보기로 한다. 그들의 사망이 우연이 아닌 "신의 섭리 "라는 확신이 그로 하여금 개인들의 비밀스런 삶을 추적하게 만들기에 이른 것이다. 말하자면 그 사건이야말로 '신의 의도'를 밝혀낼 수 있는 실험실로 그에게 안성맞춤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그가 밝혀낸 ' 신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고 그는 증명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그가 6년동안 각고의 노력을 거쳐 만든 책은 광장에서 불태워지고 마는데...

 

그렇다면 여기서 주니퍼 수사가 밝혀낸 사망자들의 삶을 들여다 보기로 하자. 후작 부인인 마리아는 자신이 갖지 못한 미모를 타고 태어난 딸을 맹목적으로 사랑한다. 자신의 사랑이 딸에겐 집착으로 느껴질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마리아의 행동은 결국 딸을 숨이 막히게 한다. 자신을 되도록 멀리 데려다 줄 남자를 구해 결혼한 딸은 그제서야 안도한다. 그러나 스페인으로 시집을 갔다해도 편지를 통해 여전히 자신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엄마가 딸은 성가시기만 하다. 냉정하게 거리를 두는 딸이 한없이 얄밉고 서운하던 마리아는 딸이 아기를 가졌다는 소식에 반색을 한다. 하지만 딸에게 달려갈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처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울적한 마리아는 자신이 보낸 길고 세련된 편지가 실은 딸에 대한 강박적인 사랑의 수단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고아로 자라난 페피타는 수녀원장이 자신의 가능성을 알아봐주자 감격한다. 하지만 자라는 동안 사람들에게 주로 질타와 무시를 당해왔던 페피타는 수녀원장의 호의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다. 용기를 내서 수녀원장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려 결심한 그녀는 마리아 부인과 함께 다리를 건너게 된다. 쌍둥이 고아였던 마누엘과 에스테반은 서로에게 텔레파시가 흐른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다. 상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을 하지 않아도 알아 채던 둘은 마누엘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기면서 사이가 벌어진다. 에스테반의 반발로 여자를 포기한 마누엘은 얼마있지 않아 죽고 만다. 쌍둥이 한쪽을 잃어버린 에스테반은 마치 죽은 것이 자신인양 절망한다. 자살하고 싶어하는 그에게 선장은 죽지 않은 자는 그저 앞으로 나가는 수밖엔 없다고 조언한다. 열살 이후로 자신이 재능만으로 세상을 살아온 피오 아저씨는 카밀라를 만나면서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다. 이성적인 사랑이 아니라 순수하게 성장의 가능성을 사랑했던 피오 아저씨는 곧 카밀라는 리마의 최고 여배우로 만든다. 카밀라가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기를 바랐던 피오는 그녀가 방탕한 삶을 살아가자 실망한다. 페루 총독의 정부가 된 카밀라는 흥청망청 살아가다 천연두에 걸려 미모를 잃게 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이 미모덕이라고 생각해온 카밀라는 이제 그 누구의 사랑도 믿거나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하지만 카밀라에 대한 사랑은 변함없던 피오 아저씨는 그녀를 만나 설득하기 시작하는데...

 

<변신 인형>(왕멍 저)이란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난다. 칠순이 넘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 내 인생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이제 올 것이다" 라고 말하는 장면이다. 음, 그 나이 정도 되면 포기할 때도 됐는데 말이다. 실제로 대부분은 포기를 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의 칠순의 아버지처럼  나는 다른 사람들과 달라라고 주장하면서 포기를 모르는 의지의 인간을 만나면? 철 좀 들라고 말해주고 싶다. 인생은 매일 다른 버전으로 들려주는 드라마나 영화가 아니니 말이다. 물론 자신의 인생이 드라마 주인공처럼 풍성하고 다채로우며 성공적이고 사랑으로 가득한 삶이되길 바라는 맘은 이해한다. 하지만 현실은 환상과는 억만년만큼 차이가 있다. 우리에게 죽음이란 한계가 있고, 우린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단 한 가지 인생만을 살 뿐이다. 비록 그것이 안타깝게 끝이 나건 애절하게 끝이 나건 중간에서 끝이 나건 사랑에서 실패한 채 끝이 나건 간에, 삶이 무한할 거란 추측은 착각일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죽음이라는 화두 앞에서 한계가 지어지고 만다.

 

내 가까운 지인의 죽음은 엄청난 비극이지만, 백 단위로 표시된 죽음은 그저 숫자일 뿐이라 하질 않나. 마찬가지로 나의 실패한 삶은 내 자신에게는 비극일지 모르나, 전세계 인류와 그 전에 죽은 선조까지 합한다면 역사가 흘러가는 자연스런 과정일뿐이다.. 그런면에서 붕괴된 다리를 우연히 건너는 바람에 죽게 되었다는 다섯 사람 역시 역사적인 면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티클만큼의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을 알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왜 그들이 죽을 수 밖에는 없었는지 생각을 하게 된다. 전혀 그들과 관계없는 주니퍼 수사 같은 경우는 자신의 논리에 그들을 끼워 맞추길 바라고. 신의 의지이자, 어떤 예정된 계획으로서의 인간의 삶을 증명하기 위해서 말이다. 무언가 뜻이 있을거야. 그렇게 우주가 신이 무위적일리는 없지 않아? 라고 그들을 말한다. 만일 그렇다면 인생은 너무 허무한 것이니 말이다. 허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인생은 우연이 아니여야 할 듯 싶다. 그렇다면 현실은?

 

이 책의 저자가 말했듯이,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다. 주니퍼 수사의 열정이 비록 가상하기는 하나 ,그의 결론을 우리가 받아들이긴 힘든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다리는 그저 우연히 붕괴된 것이고, 죽은 다섯명이 그 자리에 있었던 것 역시 그저 우연이었을 뿐이다. 가뭄과 수해가 평등하게 배분되지 않듯이 그저 인생이란 공정하지고 평등하지도 않은 것이다. 모든 것이 신의 예정일 뿐이라고 믿는다고 해서 딱히 손해될 것은 없겠지만서도, 마음 속으로는 그런 것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면 우연의, 무작위적인, 신이 아무것도 예정하지 않은 이런 인생을 사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나보다 먼저 죽은 사람은 내 기억속에서나 존재한다. 내가 죽으면 그 기억마저 사라질 것이다. 그러는 나는 과연 이 역사속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 역시도 죽은 다음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이렇게 펄펄 살아서 내 개성과 열정을 토로하고 있지만서도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삶은 아무것도 아닌 것일까?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기에?

 

그에 대한 작가의 답이 바로 맨처음 옮겨놓은 문장이다. 그래, 우리에겐 사랑이 남는다. 우리가 살아있었다는 증거로 말이다. 그것이 비록 어떤 역사서 속에서나 편지나 일기에 적혀 있지 않다고 해도, 사랑만은 우리의 영혼 속에는 남는다. 우리가 사랑했던 기억과 우리가 사랑한 사람들에 대한 추억이 말이다. 비록 그것이 성공한 것이었건 올바르지 못한 것이었건 간에 상관없다. 찬찬히 들여다보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것만이 남데, 라고 말하는 저자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떡일 수 밖엔 없었다. 통찰력있는 견해이자, < 우리 읍내 > 라는 탁월한 희곡을 쓴 작가가 내뱉을만한 지혜다. 어떠신가, 당신이 보기엔? 내 보기엔 꽤 설득력있는 주장 같아 보이는데 말이다. 만일 당신에게 인생에 이보다 더한 것이 있다고 생각되신다면 소설을 써보기실 권해본다. 신선한 주장으로 각광을 받을수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비교적 얇은 책이지만 얄밉게도 자신이 하고픈 말만 조리있게 군더더기 없이 서술한 책이라서, 다른 두꺼운 책들보다 훨씬 더 양질의 영양가를 보장하고 있었다. 다만 그가 아무렇지 않게 내뱉은 말들이 쉽게 얻어지는 지혜가 아니라서, 독자에 따라 어떻게 읽힐런지는 장담 못하겠다. 독자 각자 , 자신의 경험에 비춰 살뜰하게 읽으시면 되겠다 싶어 추천작으로 넣는다. 깔깔대고 웃기는 책은 아니라 재미는 원하시는 독자라면 실망하실지도 모르지만서도, 그것이 아니라면 인생에 한번쯤은 해봄직한 의문에 함께 질문하고 답해 나가는 과정을 경험하실 수 있을 거라 본다. 75년전에 쓰여진 책이라고 하는데, 참...요즘 작가 중에서 이런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의문이다. 놀라웠다. 그건 그간 눈부시게 발전했다는 과학이며 광범위한 교육이 결국 인간의 지성엔 별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런면에서 보자면 우리는 인간이란 향기에서 과거보다 뒤쳐지고 있는게 맞지 싶다. 부끄럽고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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