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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툰 서른 살
멜리사 뱅크 지음, 심혜경 옮김 / 예문 / 2010년 10월
평점 :
제목의 서툴다라는 단어가 시선을 잡아끈다. 나이 서른을 넘겨서 자신이 서툴다고 말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은 용감해 보여서다. 우리나라 같이 전형적인 삶을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라고 인정하는 사회에서는, 제 나이에 대학가고 ,직장 잡고, 결혼을 하고, 적정수의 아이를 낳아 정신없이 양육하고... 다른 사람들에 비해 뒤처지지만 않는다면 속내야 어찌되었든지 간에 어른 대접을 해주는게 보통이다. 서툴다니 용서할 수 없는 이야기다. 하지만 내 주변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실은 전혀 어른스럽지 않다고, 시간과 상황에 밀려 어른 취급을 받는 것이 때론 어리둥절할때도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말한다. " 진짜론 나, 겉만 어른이고 속은 얘야, 그래서 아직도 때때론 세상 돌아가는 것이 이해가 안 가고 어렵기만 해. " 라고. 그들의 은밀한(?) 고백을 들으면 난 도무지 언제쯤 이 삶이란 것에 완벽하게 적응이 되려나 궁금해진다. 완벽한 어른이자, 프로 생활인으로, 어떤 일이 벌어져도 꿈쩍하지 않고, 실수란 내 사전에 절대 등재될 일이 없으며, 인간 관계나 가족관계나 사회생활에서 늘 어떻게 행동해야 옳은지 정답이 딱하고 나오는 그럼 사람말이다. 아마도 그런건 환상이나 드라마속에서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그렇게 보자면 인생이란 언제나 서툰것이 맞는게 아닐까 싶다. 스무살이건 서른살이건 마흔살이건 쉰 살이건 간에 말이다. 이 책은 자신이 그렇게 서툰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자각에도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한 여성의 이야기다. 그녀가 바라보는 그녀의 인생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주인공 제인의 십대시절부터 삼십대까지 다룬 이 책에는 다섯가지 사랑이 등장한다. 처음 등장하는 오빠와 그의 연상의 연인, 그리고 제인의 대학시절 풋 사랑 상대인 제이미, 스물 여덟살이나 연상이지만 치명적인 매력으로 그녀를 매료시켰던 중년남 아치, 그녀가 유방암을 앓고 있을때 그녀를 지켰던 남자친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가 자신의 자존심을 접고 <연애 가이드>를 참조하도록 만든 사태의 책임자인 만화가 로버트까지... 호화로운 휴양지에서 백일몽을 꾸던 소녀가 어떻게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성숙해가게 되는지, 다양한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보여주고 있는 소설이었다.
첫번째 십대 시절 목격한 오빠와 연상녀의 사랑을 보면서 제인은 사랑이란 인간성이라는 것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는 것임을 어렴풋이 알게 된다. 오빠의 완벽한 여자친구처럼 보였지만 결국 그와 쿨하게 헤어지는 모습을 본 그녀는 환상이 아닌 현실속의 사랑을 처음 접하게 된다. 자신 역시 대학에서 만난 제이미와 완벽한 관계라고 자부하지만, 제이미의 전 여자친구와 휴가를 보내면서 실은 그것이 허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대학 졸업후 출판사 부편집자로 취직이 된 제인은 아찔한 매력의 중년 남성 아치를 만나게 된다. 능력있는 편집자인 아치를 통해 그녀는 자신이 아직 얼마나 애송인지 깨닫게 되고 여러면에서 그의 도움을 받는다. 둘의 사랑은 진지하기 그지없지만 주변 사람들의 환영까지는 받지 못한다. 특히 언제나 자신을 감싸주던 아버지의 배려가 담긴 침묵이 그녀를 망설이게 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백혈병 발병은 그녀를 한걸음 더 성숙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사랑하지만, 사랑한다해도... 아치와 평생을 함께 할 수는 없다는 한계를 인정한 제인은 그와 결별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보이는 반짝이는 남자친구를 만난 제인은 자신이 유방암에 걸렸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 그녀를 헌신적으로 간병하는 남자친구, 하지만 제인은 병마를 이겨가는 과정속에서 그와의 사랑이 관성과 의무에 기인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나보다 더 너를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라는 그의 말을 가슴 아프게 새기면서도 이별을 택한 제인은 완전히 자신감을 상실해서 자신에게 묻게 된다. ' 사실 나는 사랑할 수 없는 여자인 것은 아닐까' 라고. 그렇게 자신의 사랑 능력에 대해 체념과 회의에 빠져 있을 즈음, 친구의 결혼식장에서 로버트를 만난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그를 잡아야 겠다고 다짐을 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칙릿이라면 생각하게 되는 달콤하고 허무맹랑한 사랑이 아니라, 비교적 현실적인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 맘에 든다. 주인공이 모든 것을 잘하고 뛰어난 여자가 아니라 현실을 접하면서 해결책을 하나하나 찾아 나가는 현실적인 캐릭터라는 점도. 덕분에 그녀의 인생 역정을 따라가면서 감정 이입해 책을 읽기가 어렵지 않았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스물 여덟이나 연상인 남자친구를 대하는 제인 가족들의 반응이었다. 만약 우리나라라면 히스테리에 가까운 반응이 나와주는게 보통일텐데, 그들은 지극히 이성적으로 제인과 아치를 대하고 있었다. 못마땅하지만 그건 내 결정이 아니라 네 결정이고 네 삶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딸을 우리나라 부모님들보다 덜 사랑하는 것이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라고 본다. 단지, 걱정을 어떻게 표현하는가에 달린 차이일뿐이지. 의사였던 아버지가 제인에게, 아치를 사위로 환영할 수 없었던 것이 나이가 아니라, 그가 자신의 건강을 제대로 돌보고 있지 않기에 언젠가 네가 그의 간병인이 되서 인생을 낭비할까봐 걱정이 되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그래서 더 감명깊었다. 아버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현실적인 걱정이 고작 스물 몇을 먹은 딸에게 먹히지 않을 거란 것을 말이다. 더군다나 이제 사랑에 빠져 그것만이 전부인줄 아는 시기에 말이다. 그런 그녀를 향해 멍청하다고 소리를 지르는게 아니라, 차분히 현실을 겪어 보고 결정을 내리도록 한 아버지의 인내가 참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아마 그런 아버지를 둔 딸이라면 어떤 경우에서고 자신의 길을 찾아나설 수 있지 않을까 안도감이 들었다고나 할까.
그렇다. 스물에 모든 것을 알긴 힘들다. 그렇다고 서른이 되면 나아지나? 그건 또 아니라고 본다. 삶에는 단계 단계마다 다른 장벽이 도사리고 있으니 말이다. 모두들 실수하기 마련이고 대부분 서툰 것이 정상이다. 이 책을 보면서 감동을 받은 것은 사랑하는 자식이 실수하는 것을 알면서도 묵묵히 지켜보는 어른이 있어서였다. 남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듣는 주인공이 있어서였고. 그렇다면 실수를 했다해도, 다소 서툴다해도 살아나가기 마련이니까. 정작 위험한 것은 실수할까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니 말이다. 실수 한번에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다고 생각하는 것도 포함해서. 삶은 실수하지 않기 위한 발버둥치는 장은 아니니 말이다. 삶은 배우기 위한 장이고, 자신을 알아나가는 여정이며, 무엇보다 재미와 웃음과 사랑이 있어 견뎌나가는 시간들 아니겠는가. 그런면에서 모든 서툰 사람들에게 박수를, 언젠가는 능숙한 그들이 되기를 되는 그날까지...
군더더기 없이 영리하게 전개해 나간 책이긴 하지만, 중반에 전혀 연결되지 않는 등장인물들이 나온다던지--아마 연작때문에 등장한게 아닌가 싶지만서도--마지막을 다소 뜬금없이 마무리 하고 있다는 점이 눈에 거슬린다. 아무리 괜찮은 남자를 백만년만에 만났다고 한들, 내내 자존적이고 독립적이었던 제인이 갑자기 자신이 칙릿의 주인공인 것을 불현듯 깨닫기라도 한 듯 난데없이 브릿짓 존스의 흉내를 낸다는 설정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영 어설펐다. 아마도 작가 자신이 어떤 종류의 소설을 써야 할지 --진지한 책인지 아니면 가벼운 칙릿인지--헷갈렸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럼에도 영리한 여성 작가 한명을 만난 듯해 기분 좋았던 책이었다. 그녀의 다음 책들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