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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는 패러다임 - 조지 소로스 특강, 오류와 불확실성의 시대를 넘어
조지 소로스 지음, 이건 옮김 / 북돋움 / 201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기는 패러다임>이란 팍팍한 제목에 저자가 조지 소로스다. 딱 투자 지침서일거란 생각이 드시지 않는가? 하지만 아니다. 이 책은 헤지펀드의 대부로 악명이 높은 조지 소로스의 철학 강연서다. 작년 중부 유럽 대학에서 했던 강의를 모은 것이라고 하는데, 모르긴 몰라도 강의를 들으러 온 대학생들로 만원이 되지 않았을까 한다.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행운이었을텐데, 거기에 고견을 경청하는 기회였다니, 그걸 놓치는 사람이 바보 아니겠는가. 게다가 이제 그의 나이 79세, 투자에 대한 감은 약간 잃었을지 모르나 세계에 대한 식견 만큼은 오히려 단단해질 시기다. 80년이나 되는 세월을 흘려 보내면서 세계의 모든 것에 귀를 열어놓고 산 사람이라면 더욱이나 더, 후손들에게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는 입을 열었다.
과연 그는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
내가 법학을 전공할때 맨 처음 배운 것중 하나가 "견제와 균형" 이란 개념이었다. 당시 인간은 마냥 선할 수도 있다고 믿던 나는 왜, 반드시, 꼭 , 필연적으로 견제가 인간 사회에 필요하다는 것인지 이해 할 수 없었다. 자신에게 부여된 막강 권력을 올바로 쓸 수 있는 인간이 그렇게 없다고? 설마... 권력이 집중하면 부패하기 마련이라는 명제에 그걸 어떻게 100% 확신하냐고 되묻고 싶었다. 지금 되돌아보면 참으로 순진한 생각이지만 진짜로 그랬다. 이제는 안다. 권력이건 돈이건 힘이건 간에 누군가를 통제할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이 그걸 함부로 쓰지 않는다는건 어려운 것이라는 것을. 부패를 욕하기보다--왜냐면 그건 당연한 것이니까--청렴을 칭찬하고 싶은 것도 그때문이다. 얼마전 읽은 < 삼성을 생각하다.>라는 책을 보면서 물론 비록 삼성의 비리가 극악스럽다기는 하나 삼성가의 사람들의 행태를 이상하게 여기는 저자를 보면서 순진하단 생각을 했다. 과연 전 세계 거부들 중에 괴팍한 괴짜가 아닌 사람들이 얼마나 될 거라 보나? 똑똑하고 정직하며 이성적이고 지적인데다 상식적이고 무게 잡는 것과 아첨을 혐오하는 평범한 보통 사람처럼 행동하는 CEO ? 글쎄... 그나마 인텔의 앤디 정도가 합격하려나? 버핏은 좀 인간적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탈락, 빌 게이츠는 정말로 인간이 아닐지 모른다. 어쨌거나 힘이 가졌을때 올바로 쓸지 아니면 나쁘게 쓸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바로 그 개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조지 소로스는 어느 쪽일지 궁금했다. 그 역시 그것에 신경이 쓰이는 눈치였고 말이다. 과연 그는 볼드몰트일까? 아니면 덤불도어일까? 그도 아니면 볼드몰트의 과거를 가진 개과천선한 덤불도어?
나를 그를 잘 모른다. 그래서 어느 것이 그의 모습이라고 단정짓진 못하겠다. 처음 인상으로 봐선 세번째가 맞지 않을까 싶었지만, 책을 읽고 나니 그보단 덤불도어처럼 보여지고 싶은 토니어 크뢰거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다. 세상에나, 최고의 펀드매니저라고 불리는 사람에게 토니어 크뢰거의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깜짝 놀랐다. 하지만 소로스는 정말로 크뢰거를 닮아 있었다.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 주길 바라면서 청자들을 쫓아 다니는 모습까지도.
그는 이 책에서 말한다. 이 세상이 보다 나은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젊은 시절 포퍼의 <열린 사회>에 공감했던 저자는 이 지구가 나아갈 방향이 열린 사회이길 열망하고 있었다. 그를 위해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내재한 불확실성과 오류를 직시하고 제거 해야 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자신이 젊은 시절 돈을 벌 수 있었던 것도 인간의 그런 헛점들을 탐구하고 이용한 결과였다면서. 철학적인 개념으로 오류성과 재귀성을 들고 있지만 뭐 어려운 개념 아니다. 우리는 틀리게 판단하기 쉽고, 그 틀림에 기인해 집단으로 염원하다보면 그것이 현실화 된다는 말이니까. 읽어보면 쉽게 이해되니 걱정하지 마시길... 그는 인간을 꿰뚫어 보는 것이 투자건 사업이건 삶에서건 성공하는 비결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가 들려 주고 싶어 한 말은 그것이 아니다. 그는 우리 모두가 이길 수 있는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싶어했다. 단 한 사람이 성공하고 나머지는 패배하는 패러다임이 아닌, 우리모두 행복하고 성공할 수 있는 패러다임 말이다. 왜 사회는 일직선으로 진보하지 않는가? 적어도 퇴보는 안 해야 되는거 아냐? 친절한 소로씨는 현재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볼멘 소리를 한다.
그렇다. 투자계의 전설인 그가 바라는 것은 지금보단 진일보한 사회란다. 우리 모두 행복한 사회, 정치엔 도덕성이, 돈엔 윤리가, 견해엔 자유가, 권력엔 진실이 통하는 사회 말이다. 그의 말을 듣다보면 너무 쉬워 보여--아니, 그보단 그것이 너무 당연해 보여--아직까지 우리가 이런 사회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해 보인다. 우리 모두가 이성적이고 지적이라면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개인으로써는 그럴 수 있겠지만 군중으로써는 아니다. 소로스 역시 그렇다는걸 잘 안다. 그는 이상주의자이기 앞서 골수까지 현실주의자이니까. 그가 대단한 점은 현실을 인정한 채 패배한 채로 앉아 있을 생각이 그에게 없다는 것이었다. 불평이나 한탄보단 연구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탁상공론보다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도. 하여 그는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최대한 자신의 돈을 지원할 생각이라고 한다. 그것이 자신이 가진 힘을 최대한 멋지게 쓰는 방법이라 여기는 듯 했다. 내게도 그렇게 보인다. 물고기를 잡아주느니 물고기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게 낫다는 속담처럼 말이다. 우린 근본적으로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던지 간에. 우리 세대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걸 보게 될거라 생각되지 않지만, 적어도 씨앗이라고 뿌려 놓으면 뭔가 달라지지 않겠는가. 나도 바란다. 그가 염원한 사회가 실현되기를. 그래서 미래 언젠가 우리 지구가 그런 사회를 갖게 되기를. 우리 후손들이 자신의 힘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 있기를 . 그리고 견제가 왜 필요하다는 것인지 이해 못하는 사회가 되어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