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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밤 모든 바에서
나카지마 라모 지음, 한희선 옮김 / 북스피어 / 2009년 4월
평점 :
품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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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간 감각을 잃고, 멍하게 눈을 감았다. 그러자 또다시 빨강이니 노란색이 강렬한 원색의 세계로 끌려갔다. 어지러운 원색의 세계를 걸으면서 나는 격렬한 두통을 느끼고 나락의 바닥으로 전락하듯 쿵! 하고 쓰려졌다. 그 순간이다.
'후드득, 후드득, 후드득!' 두개골이 깨져 흩어졌다.
"크, 큰일이다!"
나는 크게 소리쳤다. 이것 봐! 바닥 온통 내 뇌세포가 흩어져 있는게 아닌가. 그것들은 통로나 침대 밑에서 자잘한 파편이 되어 반짝이고 있었다.
"아아,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졌어!"
나는 절망적인 비명을 지르며 열중해서 파편을 주워 모았다. 그것들은 섬세한 톱니바퀴가 달린 볼품없는 "세포"로 보였다. 나는 그것들은 하나하나 내 머리에 끼워 맞춰 보았다. 참으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작업이었다.
"부탁해, 누군가 도와주지 않겠어?"
스물 몇 명의 환자들이 숨을 삼키고 내 기행을 지켜 보고 있었다. 이윽고 남자 몇 명이 내게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야?"
걱정스러운 듯이 내 얼굴을 들여다 본 것은 중년 남자였다.
"내 뇌세포가 산산이 튀어 버렸어. 미안하지만 저쪽 구석에서 빗자루로 쓸어와 줘."
"좋아,좋아,알았어."
중년 남자는 빗자루를 들고 파편을 쓸어 모으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나는 다른 남자들의 도움을받아 침대 밑에 흩어져 있던 파편을 모았다.
"어때 ? 이것도 맞지?"
" 오호, 있었군, 어디어디, 이 녀석은 오른쪽 앞면 세포인가,으흠.....아니면 왼쪽 후두부던가."
나는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상냥한 환자들이 내민 '보이지 않는 파편'을 하나하나 자신의 머리에 넣었다.
그것은 끈기가 필요한, 그러나 희망에 가득 찬 작업이었다. 나는 직접 재생 가능성을 향해 잃어버린 머리를 하나하나 되찾으러 간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장 중요한 오른쪽 후두부의 세포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울면서 기어 다니다가 점점 절망했다. 그때다.
"화장실 앞에 떨어져 있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뛸듯이 기뻐하며 양손으로 머리를 꼭 받치고 복도로 뛰어 나갔다.
"있다!"
화장실 앞 바닥에 마지막 한 조각이 반짝이며 떨어져 있는 게 아닌가. 감동에 가슴을 떨며 나는 살짝 허리를 굽혀, 왼손으로 머리를 고정하면서 오른손으로 그것을 주워 들고 오른쪽 후두부의 결함 부분에 끼워 넣었다.
" 와! 딱 맞아!"
나는 조심조심 일어나, 양손으로 머리를 꼭 누르고 천천히 침대로 돌아가, 살짝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순간 다시 번개가 스쳐 뇌세포가 산산이 튀어 흩어져 버렸다.
"아아, 이제 나는 틀렸어!"
나는 큰소리로 울며 소리치고 실신했다. 정신이 드니 눈앞에 백의가 오른거리고 있었다. 나는 자신의 협력자가 나타났다고 생각해서 "도와주세요!"라고 애원했다. 백의를 입은 사람은 "걱정말고 주무세요."라고 말하고 팔에 주사를 놓았다.
다음날 아침 나는 제 정신으로 눈을 떴다. 알콜중독의 금단 증상에 의한 환각은 그것을 뛰어 넘으면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온다. 어젯밤의 악몽 같은 체험을 떠올리며 오싹해하는 나. '동지'들은 말했다.
" 구니야마 씨, 어젯밤에 박력있던데."
"초 A급 금단 증상이야."
" 세 시간 정도 하셨지." <알코올 중독 지옥>에서, 구니야마 데루히코 작 ---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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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강렬한 문장 근래에 보신 적 있으신가? 선망의 눈으로 다시 한번 글을 읽어 보았다. 날 것의 감정 그대로, 작가가 내뱉는 선명한 이미지가 적도의 이글거리는 태양을 맨 눈으로 쳐다 보는듯 어지러웠다. 완벽하군. 상상력 만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문장이야. 혼자 말로 중얼거렸다. 그래, 자신이 경험한 것이 아니라면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중반까지는 대충 그려낼 수 있을지 모르나 저런 마무리는 무리다. 단 세 줄이지만 동지들의 눈길이 "나"를 향해 있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으신가? 그들의 눈길을 받고 있는 나의 계면쩍은 심정과 그를 부드럽게 다그치는 동료들의 친절한 이해심도. 좋은 글이란 이런 것이다. 많은 것을 설명하지 않아도 많은 것은 짐작하게 한다. 더군다나 저토록이나 무자비한 정직성이라니... 진솔이라는 말을 어줍잖게 만든다. 읽는 독자들을 함구하게 하는건 말할 것도 없고.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실감이 났다. 난 알콜중독자가 아닌데도 말이다.
위의 문장은 이 책의 저자가 옮겨놓은 글이다. 자신이 읽을 것 중에서 최고의 금단 증상이라나? 어쩌면 유일무이할지도 모르겠다. 저런 문장은 아무나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17세부터 시작한 음주가 점점 자신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고 있다고 생각한 저자는 알콜중독에 대해 꾸준이 연구를 한다. 어떻게 중독이 되며, 증상은 어떠한지 ,중독자들의 파괴 과정과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왜 그리 어려운지에 대해...그것은 알콜중독에 대해 각성을 갖기 위함이 아니었다. 단지 아직은 더 먹어도 된다는걸 확인받고 싶어서였지. 그렇게 심하지 않으니 난 알콜중독이 아닐거야라고 자신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그는 알콜중독자다. 하지만 35살이란 나이에 간이 다 망가져서 병원에 입원한 그는 의사에게 묻는다. " 그러니까 나는 알콜중독인거지요?" 라고.
10년동안 남들이 평생 먹을 술을 먹었노라고 자인하는 그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마셔댔다는 그가, 취해 있는 것이 좋아 싸구려 독주를 목구멍에 콸콸 들이부었다는 그가, 아이큐 185에 야쿠자 르뽀 기사를 써대는 그가 , 알콜중독에 대해서라면 모든 책을 섭렵했다는 그가, 콜라색 소변이 간경변의 증상이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는 그가 말이다. 의사의 빙퉁맞은 대답에 그는 살짝 삐치기까지 한다. 아마도 그는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왜 알콜중독자의 이미지 있지 않는가. 막무가내에, 남에게 폐를 끼치며, 거지같은 차림에 아무데서나 잠을 자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후안무치에, 인생을 제대로 살 마음이 조금도 없어 보이는...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인생의 실패자라고 볼 것이 두려웠던 것일까? 아니,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그랬다면 좋았을 것이다. 그가 알콜중독임을 부인한 이유는 술을 끊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간도 망가진데다, 친절할 생각이 별로 없는 의사로부터 '당연히 알콜중독이지 그럼 뭐겠냐?' 라는 말을 들은 그 순간, 유예기간이 끝났음을 인정할 수밖엔 없다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현실과 마주한 그는 병원에서 끊임없이 묻는다. 과연 어떻게 술을 끊을 것인가? 누가 대답해줄 사람? 어디 없나요? 하면서...
알콜중독자에게 비난을 가하기란 쉽다. 또 그것이 마땅해 보인다. 의지만 있으면 단박에 끊을 수 있어 보이는데 비해, 그들이 끼치는 민폐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으니 말이다. 한 사람은 마냥 좋은데 다른 사람은 그 뒤치닥거리를 해야 한다면 균형이 맞질 않으니 말이다. 왜 그들은 그렇게 의지박약인 거야? 남들 생각은 안 하나? 우리는 그들의 흉을 본다. 비명을 지르고, 야단을 치고, 인간 말종 취급을 하고, 걱정을 하며 , 협박을 한다. 그런 갈등 지점에서 우리가 간과한 것은... 바로 알콜중독자들인 그들도 술을 끊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단지 그들은 어떻게 끊어야 하는지를 모른다. 그냥 안 먹으면 되지가 아닌 것이다. 강한 의지만 있으면 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지만 그건 주입식 교육과 다를바가 없다. 자발적이지 않기에 휘발성이 강하다. 그것만으로는 알콜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저자는 너무도 잘 안다. 단순히 결과 분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깊숙히 원인으로 캐묻는 것, 바로 그것이 이 책을 독특하게 만드는 점이었다. 이 책이 단순히 알콜중독자의 넋두리가 되지 않은 것도, 다분히 감상적이며 진부한 개과천선한 전직 알콜중독자의 성공담에 머물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그는 질문을 한다. 그것도 끊임없이. 그것이 마치 술중독이란 마법을 푸는 반대주문이라도 되는 양, 그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의사에게 묻고, 책을 읽고, 주변을 둘러 보면서 그는 끊임없이 다그친다. 어쩌다 나는 중독자가 되었을까? 여기서 벗어나려면 무엇이 필요한 것일까? 그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 본다. 머리가 쥐가 날때까지 생각을 해봤지만 마땅한 이유가 생각나지 않는다. 도대체 무엇이 나를 알콜중독에서 벗어나게 해줄 것인가 그는 갑갑해 한다. 구원이라도 바라야 하나? 자신을 이해시키지 못한다면 중독사가 되풀이될 것임을 그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의사말처럼 조만간 알콜중독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죽을 것이다. 것도 고통스럽게... 문제는 고통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나, 수치스러움도 알콜 없이 사는 공허함보다 나아 보인다는 것이다. 도대체 그에겐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기나 한 것일까? 알콜중독에서 벗어날 길을 그는 도무지 찾을 수 없어 보이는데...
알콜중독자의 내면을 너무도 솔직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어린 시절부터 천재라는 수식어를 달고 살았다고 하던데, 감히 태클을 걸 수 없는 것이--둔재인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 질투심에 태클 걸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다.-- 문장이 탁월하게 선명한데다 군더더기가 없다.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참으로 요령 있게 써내던데, 진짜로 머리가 좋은 사람이지 싶다. 더군다나 알콜중독을 다루는 그의 태도라니... 확실히 그는 지적인 사람이었다.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지적인 사람일거라 생각하는 분들도 많은데, 사실 지적이라는 것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 한계를 뛰어 넘기 위해서는 책이나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아는 능력이다.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싶어하는 그의 지성은 자신의 알콜중독에마저 영향을 미친다. 그의 그런 성향이 아니었다면 이런 책이 나오지 못했을테니 말이다. 단지 알콜중독을 다뤘기에 하는 말은 아니다. 그런 책들은 널렸다. 수기도 있고, 르뽀도 있으며, 매년 연례행사처럼 시사뉴스에도 등장한다. 진부한 질문에 식상한 대답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본질에 근접하고 싶어한 사람이었기에 이런 독특한 책이 나오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는 것이다.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의 솔직함이 문장에서 눈을 못 떼게도 한다고 해서 이 책이 무거울거라 오해하진 마시길. 병원에 입원한 동안 일어났던 일들을 배경으로 그려 놨는데, 주변 사람들 면면도 재밌었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도 다분히 인간적이고 유머러스해서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내가 일본 작가들에게 100% 공감을 하기란 좀처럼 어려운데도, 이 저자는 그렇지 않아서 무척 놀랐다. 아마도 이 저자가 전형적인 일본인에서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 않은가 싶다. 여운이 있는 책을 읽고 싶다시는 분들에게 강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