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별이 서툴다 - 죽음에 대한 어느 외과 의사의 아름다운 고백
폴린 첸 지음, 박완범 옮김 / 공존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치료라는 기술의 이름으로 죽음을 막기 위해 우리가 너무 노력하고 있는건 아닌지 묻고 있던 책이다. 의사들이 늘상 죽음을 다루면서도 환자 본인이나 가족들에게 죽음에 대해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현실에 주목한 저자는 그 현상에 대해 생각해 보기로 한다. 막연하게 다른 사람들을 돕는게 좋아서, 내진 유능한 사람이고 싶어서 선택한 의과대학을 선택한 저자는 시체를 해부하는 순간부터 앞으로 자신이 생명보다 죽음을 다룰 일이 많다는 것에 놀랐다고 한다. 생명을 구하는 사람이고 싶었던 그녀는 의사들이 만나는 사람들의 90%가 죽음을 목전에 둔 가망없는 환자들일거라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의사들이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해도 인간이 불사일 수는 없는 법.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자는 죽음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곤 병원 밖에서는 보기 힘든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다. 불치의 환자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의사야말로 어쩌면 죽음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렇다면 우린 마냥 죽음을 두려워야만 해야 하는 것일까?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런 의문에 대해 그녀 자신이 천천히 답을 풀어놓고 있는 책이 되겠다.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에 대해 알려 주고 있는 책인줄 알았다. 의사도 막막하고 서툴어서 잘 설명하지 못하는데. 이러저러하게 하면 좋을 것 같지 않냐는 메뉴얼을 적어준 줄 알았던 것이다. 내가 잘못 알았다. 저자는 죽음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지 감도 못 잡고 있었다. 실은 그녀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타인이 죽음을 많이 목격하긴 했지만 실제로 자신의 문제인 적이 없었기에 따로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나보다. 그런 이야기도 아니라면 과연 그녀는 이 책에서 무슨 말을 하고 있던 것일까? 

우선 저자는 의과 대학시절부터 인턴, 그리고 레지던트를 거치는 동안의 경험을 풀어놓고 있었다. 말하자면 자신이 쓸만한 의사가 되어 가는 동안 자신의 눈을 뜨게 해준 여러 사람들과 일들에 대해 나열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건 다른 의사들의 경험담과 다르지 않았기에 난 저으기 실망했다. 아시다시피 요즘 병원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좀 많은가? 현실이 아니기에 현실에서는 벗어나 있겠지만서도, 에피소드가 많다보니 안 들어본 일화들이 없다고 느껴진다. 한마디로 저자만의 고유한 경험이 그다지 새롭게 들려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좀 지루하구만, 하면서 그녀의 일화를 읽어내려 가다, 뜻밖의 문장을 만났다. 아마도 그 문장에 그녀가 이 책을 쓰게된 요인이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대로 옮겨 보자면 이렇다. 

   
 

 


같은 인간에게 어떻게 그렇게까지 하실 수 있나요?"

맥스가 죽은 후 몇 달 동안 나는 그애의 죽음에 대한 의사들의 책임을 생각했다. 에릭은 아이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고, 맥스에게 가장 열정적인 의료진이 되고자 하는 경쟁에서 나를 능가했다. 하지만 그 작은 아이의 마지막 한 달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릴 수는 없었다. 아이의 열린 복강, 너덜너덜해진 피부, 그리고 주렁주렁 달린 장치들...우리는 치료 노력이 지나치지 않는지 양가 감정을 느낄때조차 그것을 되돌리거나 우리의 불편한 감정과 견해 차이를 해소할 수 없었다. 우리는 맥스에게 지나치게 많은 것을 해주고 있었을지 모르는데, 우리는 그저 기술에 얽매여 있었다.--193

 

적극적인 의사들조차 희망에 이끌려 시행한 치료에 불편한 감정을 느낀다. 많은 의사들은 동료나 자신이 기술에 심취해 내린 진료 결정에서 비롯된 참담한 결과를 직접 목격하고 나서 스스로를 과잉치료때문에 절망에 빠진 환자처럼 여긴다.만약 의사가 가망없는 환자로 진단받는다면 자기 자신에게 과연 어떻게 할까? 십중팔구는 생명 유지 요법을 제한하거나 거부한다. 따라서 이런 의사들이 진료 중단을 요구하는 환자의 의견을 당연히 들어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의사들은 법적인 문제에 휘말리는 것을 두려워 하려 치료를 계속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낄 수 있다....우리는 의사로서 ,보호자로서, 환자로서, 언제 치료를 중단해야 하고 언제 완화 요법을 시작해야 할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만약 이런 질문을 환자나 내 가족에게 한다면 대답은 너무나 명확하다. 희망이 없으면 치료를 중단해야 한다.--196

 

 

 
   

저자는 말하고 있었다. 우린 너무 지나치게 노력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고. 과연 그것이 누구를 위한 노력일까 묻고 있었다. 환자를 위한다거나 그들의 가족들을 위한 것이라면 저자가 고민하지도 의문을 품지도 않을 것이다. 저자는 그것이  환자는 무조건 살리고 봐야 한다는 의사들의 무조건 반사 작용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내가 환자 자신이라면, 내진 환자가 내 가족이라면 절대 저런 처지는 하지 못하게 하겠어 라고 중얼거리면서도, 환자에게는 대량의 불필요한 처치를 해대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싶은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를 일깨운 것은 수술을 담당하던 한 간호사였다는 점이다. 그에 관한 일화는 이렇다. 

미숙아로 태어나 얼마나 문제가 많던지 엄마조차 포기한 맥스란 아이가 있었다고 한다. 신생아 집중 치료실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그는 의사들은 그야말로 경쟁하다시피 헌신적으로 치료한다. 누가 더 잘하나 피말리는 의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흐르면서 맥스는 생명의 줄을 놓기로 작정한 듯 이런 저런 증상을 나타낸다. 맥스가 새로운 증상을 나타낼 때마다 수술과 처지를 반복하던 의사들은 결국 수술로 너덜너덜해진 맥스가 죽자 망연자실한다.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을까, 궁리하던 저자는 간호사의 한마디에 충격을 받게 된 것이다. 

" 같은 인간에게 어떻게 그렇게까지 하실 수 있나요?" 

 그녀는 비로서 자신들이 헌신이 전혀 다르게 비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더불어 그들의 시선이 옳을 수도 있다는 것도. 오랜 시간동안 생각해본 그녀는 죽음이 두려워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질문한다. 죽음을 담담히 맞아 들이게 하는 것도 의사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녀의 질문에 대해 나의 생각은 비교적 뚜렷하다.난 천년만년 살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한 평생을 살아가는 이 순간에  죽기전까진 되도록이면 남에게 피해를 안 줬으면 좋겠고--정말로 희망사항이다.--인간으로써 최소한의 것은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면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하루나 일년 미루기 위해 산소기를 주렁주렁 달고 의식불명인채로 지내긴 싫다는 말이다. 난 생명이란게 그렇게까지 존중받아야 하는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아니 다르게 보면 존중받고 싶어서인지 모르겠다. 고통을 연장하며 의료장비에 의지해 살고 싶지는 않다는 뜻이니까. 난 나를 심하게 다뤄본 적이 없다. 그러니 남들도 나를 심하게 다뤄주지 않았음 하는게 내 바람이다. 내가 세상에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일까?  

 죽음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어떤 것이다. 감당할 수 없다고 한들 어쩌겠는가. 그건 내가 어쩔 수 없는 것인데...내가 어쩌지 못하는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그게 인생이니까.  냉정해 보이는 것이 실은 인간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 저자는 생각하게 해줬다. 글을 그다지 일목요연하게 쓰지는 못하는 양반이었지만, 그래도 그녀의 신념에는 동조한다. 죽음은 받아들이는 것도 인간적이라는 것을...우린 배워야 하는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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