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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엔 까미노 - 산티아고로 가는 아홉 갈래 길
장 이브 그레그와르 지음, 이재형 옮김 / 소동 / 2009년 6월
평점 :
품절
탁월한 사진작가가 문장도 탁월한 경우를 본 적이 있으신가? 아직까진 난 못 본 것 같다. 물론 사진집을 그리 많이 본 적이 없어 단언하기는 그렇지만 아마도 사진을 다루는 뇌와 문장을 다루는 뇌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게 아닐까 한다. 재능을 관장하는 뇌 영역이 다르니, 한 분야에서 탁월하다 해서 다른 분야까지 탁월하기를 보장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오히려 한 분야에서 탁월한만큼 다른 분야에선 어정쩡이지 않을까 한다. 빌 브라이슨이 사진을 찍어 사진집을 만들면 그의 문장만큼 재기발랄하지는 못할 거란 말이다.
물론 사진이나 문장 모두가 출중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라는 잡지가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사진사와 기자가 동일 인물이던가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서도, 사진도 탁월하고, 문장도 시시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렇게 둘 다 좋기란 드물다는 것이다. 사진이 좋으면 문장이 시시하고, 문장이 탁월하면 사진이 별로이기 일쑤니 말이다. 나는 원래 시각적인 사람이 아니라서, 문장이 좋으면 사진이 흐릿한 것쯤은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사진은 환상인데, 문장이 별로라면? 흠, 좀 생각을 해 봐야 한다. 과연 이걸 좋다고 해야 하는지 말이다.
이 책은 순례길로 유명한 산티아고 길을 현지인의 입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책이다. 저자인 장 이브 그레와그레는 기자 출신의 작가이자 사진사로, 산티아고 길이 유명해지기 오래전부터 그 길을 오고 갔다고 한다. 90년대 들어 그 길이 순례자들의 행렬로 만원이 되는걸 보면서 저자는 순례길의 아름다움을 소개해 보기로 한다. 다만, 순례길을 걸어가면서 느낀 시시껄렁한 잡담이나 감상이 아니라, 그 길 자체를 소개하고자 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흔히 다니는 길이 아닌 9가지 갈래의 길들을 보여주면서, 어떤 길이 아름답고, 어떤 길은 여름에 가면 죽음이며, 어떤 길이 한적하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었는데, 혹시나 순례길을 여행하시려 계획하신 분들이라면 눈여겨 볼만한 정보였다.
이 책을 보고서야, 난 산티아고가 야고보 성인과 관련이 있다는걸 알았다. 야고보가 스페인 이름으로는 티아고고, 거기에 聖을 의미하는 산을 붙여 산티아고가 되었다는 것이다. 스페인의 작은 마을에 그런 이름이 붙게 된데는 야고보 성인의 무덤이 그곳에 있다는 전설때문이란다. 믿거나 말거나지만서도...그런 이유로 산티아고로 통하는 길이 순례자들의 길이 되었다는데, 솔직하게 털어놓자면 여지껏 난 그 길이 순례길로 이름이 붙은 것은 파올로 코엘료 때문인지 알았다.
그렇게 순례길이 된 유례를 알게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내게 그 길은 순례길이라는 의미로는 다가오지 않았다. 난 Traveller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 여행자...산티아고를 걷는 사람들은 자신들을 순례자라고 말하는지는 알겠으나, 그렇다해도 내겐 그저 여행자와 다름없어 보였다. 왜 그냥 여행자가 아니면 안 되는 것일까. 꼭 그 길을 성령을 느끼기 위해 걸어야 할 필요는 없는거 아닐까? 저자가 누누히 강조하는 성령이 가득한 길이라는 의미에도 별로 동조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그 길을 걷기만 하면 저절로 깨달음이 오더라는 환상에 동조하기 싫어서일 것이다. 여행은 하고 나니 전혀 다른 인간이 되더라고 주장하는 역시 난 믿지 않는다. 인간이 그렇게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동물은 못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걷는다는건, 현재를 온전히 느끼는 일이다. 비록 성령을 느끼기 위한 길이 아니라도, 아름다운 길을 걷는다는 것 자체가 사람의 심성을 순화시키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더군다나 산티아고 길처럼 아름답다면야, 바랄 것이 뭐가 있겠는가. 성령이 아니라도, 깨달음이 없다해도, 본질을 변화시키지 못했다해도 걷는 것 자체로 의미있는 일이라 본다. 하니, 순례길 말고 그냥 여행자의 길이란 의미로 난 산티아고 길을 이해하고 싶다.
이 책의 장점을 들라면, 우선 산티아고의 여러 길을 소개해준다는 점에서 점수를 딸만한다. 거기에 사진들이 예술이다. 너무 과장되지도 않으면서도 피사체를 최대한 아름답게 표현하려 노력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요즘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사진을 찍긴 하지만 이렇게 정갈하고 단아하게 찍은 산티아고 사진은 못 본 것 같다. 공들였음에도 전혀 티가 나지 않는 기법은 어떻게 개발한 것인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사진을 전공하는 사람이나, 사진 동호회 사람들 같은 경우는 눈여겨 봐도 좋을 듯 싶다. 산티아고로 이르는 길과 성당과 다리와 풍광과 시골 길과 소박한 사람들과 유럽 문화들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왜 사람들이 이 길을 찾는지 단박에 이해가 가실 것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길을 차로 달리면서 지나간다는 것은 솔직히 무례한 것이다. 천천히 걸으면서 음미해 볼 만한 멋진 자연과 건축물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으니 말이다.
그런 장점 외에 단점을 들라면 첫째는 문장이 별로였다. 혹시나 해서 저자를 띄워줄만한 문장들을 눈을 부릅뜨고 찾았지만, 어쩜 그리도 식상하고 진부한 멘트만 날려 대시던지. 감상을 적어 내려간 글이나 정보를 던져준 글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이더라. 다시 말해 이 저자가 필력있는 문장가는 못 된다는 말이다. 이 책이 유독 사진이 주인공이고 문장은 그저 사족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때문이다. 문장에 눈길을 줘봐도 건질게 없으니 말이다. 이건 뭐, 들어줄만한 이야기가 있어야 들어주지. 어디서 황당무계한 전설이나 주어 듣고 와서는 기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시는데 저으기 계면쩍었다. 산타가 진짜로 존재한다고 거품을 물고 주장하는 사람을 만나면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시려는가? 어색하지 않겠는가? 이건 예의삼아 그런척 해줘야 하나 고민되고 말이다. 거기에~~~합니다.입니다, 등등의 경칭 어미를 쓰는 번역은 정말로 고역이다. 요즘 보는 여행서에 그런 문장들을 쓰는 역자분들이 있던데, 의아할 뿐이다. 그게 읽기 얼마나 걸치적 거리는지 모르시나? 가뜩이나 문장력 부실한 마당에~~~ 합니다라는 아이 달래는 듯한 어투로 마무리를 하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아부하는 듯 느껴지고, 직접적이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전문성이 의심스럽게 된다. 어떤 이유로 그런 문체를 쓰게 되셨는가는 모르겠는데, 원작에 충실히 번역하다 보니 그럴 수 밖엔 없었다고 해도, 읽는 독자들은 한국 사람이라는 것을 감안해 편하게 읽도록 했음 좋지 않았을까 싶었다.
하여, 결론은? 사진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나 산티아고 길로 여행을 가시려는 분들은 정보 삼아 보시면 좋을 듯. 그나저나 제목인 " 부엔 까미노"는 순례자들이 길에서 마주치면 하는 인사란다. 좋은 길이라는 의미인데, 행운을 빈다는 뜻 정도란다.우리나라 말로 치면 "수고하셔요" 가 되지싶다. 생각해보니 서로에게 그런 격려의 말은 건네는 것도 필요하긴 하겠다. 유대감도 유대감이지만, 3주에 걸쳐 길을 걸어간다는 것은 그 누구에게나 쉬운 것은 아니니 말이다. 그 길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