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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 A
조나단 트리겔 지음, 이주혜.장인선 옮김 / 이레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십대 소녀 안젤라를 성폭행하고 잔인하게 살해한 죄로 두 명의 소년이 잡혀온다. 사람들은 살해 방식의 잔혹함 못지 않게 두 명의 범법자가 어리다는 사실에 충격을 먹는다. 영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그 사건 뒤로 14년이 흐른다. 청소년 보호법에 의거, 새로운 이름과 고향과 직업을 얻은 잭은 바로 과거의 보이A다. 그는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 하나, 모든 것에서 절연된 새 삶이 가볍게 느껴질리는 없다. 새 애인도 얻고, 새로운 삶에 불안하게 적응하고 있을 즈음, 그의 정체가 언론에 알려지는 바람에 그의 운명은 다시금 회호리 바람 앞에 서게 되는데...
십대라, 어리니 성폭행이나 살인이 무엇인지 몰랐을거라고 봐주자는 취지인걸까? 무기를 들고 대량 학살에 나서는, 전쟁을 하는 어른들에 비해 그의 살인죄는 가볍다는 뉘앙스엔 어이가 없었다. 대체 가벼운 살인이란게 어디 있는가? 성폭행 할 것을 알고 망을 봐 주었고, 같이 살인을 감행한 보이A가 단지 희생양이라는 뉘앙스는 또 어떤가. 단지 보이B라는 못된 개차반 녀석하고 다닌 끝에 그모양 그꼴이 되었다고? 살해된 안젤라는 실은 걸레이나 언론에 의해 천사처럼 보이게 조작되었다고? 만약 보이 A를 진심으로 이해시키고,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그를 용서하게 할 생각이었다면 이런 식으로 글을 써서는 곤란했다. 작가의 편협된 시각이 오히려 보이 A에 대한 편견을 강조하기 만든 듯 해서 화가 났다. 도무지 저자는 어떤 생각으로 이 책을 썼는지 궁금하다. 소년을 이해시키고 싶어서, 아니면 그를 더 단절시키고 싶어서? 통찰력 없는 작가가 글을 썼을 시 나타나는 폐해를 보는 듯해 씁쓸했던 책, 때리는 시어미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은 이럴때 적절한게 아닐까 한다.차라리 그를 외면해 다오. 그러면 적어도 분노가 되살아나지는 않을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