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오랜만에 만나는 조지 오웰의 책이다. <카탈로니아 찬가>이후 그의 다른 책을 만나지 못해 서운해 하고 있던 차라  오웰의 새 책 소식은 가뭄에 소낙비 만난 듯 반갑기만 했다. 표제에 르포르타주( 쉽게 르뽀) 라는 말이 붙어 있어 생소하신 분이 있을려나 모르겠는데, 조지 오웰은 소설보다 오히려 이 분야가 전공이라 할만큼 잘 쓴다. 자신이 직접 경험하고 느낀 것을 그만의 독특한 화법과 통찰력으로 풀어 내는데는 따라올자가 없을만치 탁월하니 말이다.  <런던과 파리의 밑바닥 생활>에서도 그랬고, <카탈로니아 찬가>에서도 여지없었다. 그렇다고 소설분야에서의 그의 명성에 흠을 내려는 건 전혀 아니니 오해는 마시길... 그의 르뽀도 소설만큼 좋다는 뜻일 뿐이니 말이다.

 

내용은 잉글랜드 북부 노동자들의 실상을 취채해 글을 써달라는 제의를 받고 그가 직접 그곳에서 두 달간 살면서 집필한 글이다. 더러운 환경과 혹독한 작업 환경, 성냥개비 같은 작은 집에서 복닥대며 살아가는 광부의 가족들, 입만 열었다 하면 불만이 텨져 나오는 하숙집 주인과 이보다 더 비참한 인생이 있을까 싶은 하숙생들의 면면들이 그의 눈을 통해 낱낱이 그려지고 있었다. 더불어 2부에서 그는 영국에 만연해 있는 계급주의의 실태에 대해서도 성토를 하고 있었다. 속물을 길러내는 교육 시스템과 거기서 벗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에 대한 자신의 고백담까지 넣어서. 이 책을 통해 왜 그가 버마의 경관직을 그만두게 되었는가 대해 알 수 있었는데, 어디에 있건 간에 인간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던 그를 느낄수 있어 좋았다.

 

탄광의 실태를 고발하는 르뽀라 하여 부담스럽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역시나 오웰답군이란 감탄사가 나오게 하는 인간미 넘치는 시선이 그 부담을 잊게 만든다. " 세상은 석탄으로 굴러 가는 것" 이라면서, 힘들게 석탄을 캐내는 광부들을 노고를 치하하는 그가 한결같이 믿음직스럽다. 자신은 절대 그런 일은 못한다면서, 육체 노동자로서 무능한 자신을 한없이 부끄러워 하는 오웰, 계급주의와 육체 노동을 천시하는 시대 상황에 반발하면서 일하는 자에게 제 몫이 돌아 가야 함과 더럽고 무식하고 무지하다는 편견에 맞서 그들도 인간다운 생활을 누릴 권리가 있음을 상기시키고 있었다. 육체 노동자를 무시하는 풍토에 대해 실랄한 고발도 잊지 않던데, 공부한 사회주의자들의 한계를 언급하면서 그들이 왜 육체 노동자에게서 유리될 수 밖엔 없는가에 대한 분석은 지극히 타당하게 들려온다. 속물적인 계급주의가 이상주의적인 이데올로기로는 넘을 수 없다는 통찰은 과거에도 맞는 말이었지만 지금에도 틀린 말은 아니지 싶다. 하지만 그가 육체 노동자들에 대한 죄책감때문에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글쓰기 노동--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것은 안타까웠다. 누구나 자신이 잘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 반드시 힘든 일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은 아니질 않는가. 오웰이 지극히 천재적인 사람이라서 글을 쓰는데 전혀 어려움이 몰랐더라면 모를까, 그 역시 글을 쓰는 순간들이 피를 말렸을텐데, 그걸 육체 노동에 비교해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는건 지나치지 않는가 싶다.  당시 지식인들의 허영이 너무도 심했던 나머지 자신을 그토록 낮춰야 한다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그러실 필요는 없다고 말리고 싶더라.  알고보면 그 역시 다른 어떤 육체 노동자 못지 않게 열심히 산 사람이지 않았던가.

 

거반 70여년전에 쓰인 글인데도 여전히 현대적으로 읽힌다는 것이 장점, 물론 광부들의 삶을 그려낸 것이나 주택 문제를 풀어낸 것들은 이젠 별 의미가 없는 탓에 지루하긴 했다. 따라서 그 부분은 건너 뛰고 읽어도 상관없겠다. 당시 그가 고민했던  끔찍한 주택상황은 분명히 벌써 해결 됐을 것이고, 그가 열악한 환경을 지적하던 광산들은 이미 폐광이 되 버렸을테니 말이다. 책을 읽어 내려 가면서 50년 후엔 그 광부들이 그 일자리나마 없애지 말아달라고 시위를 벌였다는걸 안다면 오웰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궁금해졌다. 시대에 따라 고민하는 것이 그렇게 달라질 것이라는걸 그는 짐작이나 했을까? 그가 현대에 살고 있다면 다른건 몰라도 아마, 이 시대의 가장 낮은 사람들의 고충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위해 르뽀 기사를 쓰고, 해결 방안을 고민했을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심장을 지닌 사람이니까. 그렇게 상황이 변한 것을 제외하면, 그의 인간에 대한 통찰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적확하기만 하다. 아마도 그건, 그가 시대를 앞서나간 감각을 지녔거나, 내진 그의 인간미가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한다. 당시론 혼탁하고 혼란스러웠을 정치 이데올로기 상황을 말끔하게 정리한 두번째의 <민주적 사회주의와 그 적들>편을 봐도 그렇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혜안을 가진 자만이 낼 수 있는 그만의 목소리에 정중하게 경청할 수 밖엔 없었다. 마치  찌꺼기를 가라 앉히고 난 뒤 조용하고 맑디 맑은 시냇물을 바라보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요즘 인터넷에 떠도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욕지기와 구역질이 난다. 다양한 시선이나 의견들이 내 놓는 것이 민주주의라고는 하나, 난무하는 저질 지방 방송들은 사태를 오히려 파악하기 힘들게 할 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 오웰같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상념에 젖었다. 그라면 이 상황을 정확하게 꿰뚫고 한마디 해 주었을텐데 말이다. 비난하는 투도 아니고 조롱하는 투도 아니며 ,단지 사실이 이러하다는 식으로 ...경멸이나 비방이나 유언비어나 낯뜨거운 자화자찬이나 분노와 부화뇌동, 그런 것들은 사태를 해결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명확한 진단에 명쾌한 해결 방식, 인간을 이해하는 따스한 시선 , 바로 그런 것들이 필요하고, 오늘날 그가 그리워 지는 이유다. 물론 그가 살아 온다 해도 사람들이 그의 말에 경청할지는 미지수지만서도. 다들 잘난 사람들만 살고 있는 듯한 현대에서 공정하고 겸허한 그의 목소리가 들려 오기나 하려는지... 

 



 


 


 


 그는 지긋지긋한 일 하나를 하다 다른 일을 하러 갈때면 언제나 말할 수 없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아침이면 그는 난롯가에 앉아 더러운 물이 담긴 통에 있는 감자를 슬로모션으로 깎았다. 나는 그렇게 분한 마음을 품고서 감자 껍질을 벗길 수 있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가 말하는 '빌어먹을 여자들의 일"에 대한 적개심이 무슨 쓰디 쓴 체액처럼 속에서 부글부글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불평불만을 되새김질하듯 계속 되씹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침 식사때 식탁 밑에 가득 찬 요강단지가 있는 것을 본 날, 나는 떠나기로 마음을 먹었다. 있다보면 더 우울해질 것 같았다. 더럽고 냄새나고 음식이 형편없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무의미하게 정체되어 썩어간다는 느낌. 사람들이 지하에 갇혀 바퀴벌레처럼 같은 자리를 빙글빙글 기어다니며 끊임없이 비열한 불평불만을 늘어놓고 있다는 느낌이 더 견디기 힘들었다. 브루커 부부 같은 사람들의 가장 끔찍한 점은 같은 얘기를 하고 또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노라면 인간이 아니라 매일 똑같은 시시하고 장황하고 무익한 이야기를 끝없이 연습하는 무슨 유령 같다는 느낌이 든다. 결국 부르커 부인의 자기 연민뿐인 이야기는 신문지 조각으로 입을 닦는 버릇보다 내 비위를 더 거슬렀다. 

 

공산주의와 카톨릭주의가 비슷한 점 하나는 '배운'사람들만이 완전한 정통파라는 것이다. 영국 카톨릭교도이 경우 자의식이 대단히 강하다는게 특징이다. 그들은 자신이 카톨릭 신자라는 사실말고는 아무 생각도 안 하는 듯 하며, 그것 말고는 아무 글도 안 쓴다. 이런 사실 하나와 거기서 비롯된 자화자찬은 카톨릭 문인만이 가진 유일한 밑천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정말 흥미로운 점은, 정통이다 싶은 것은 실생활과는 전혀 무관해질 정도로 밀고 나간다는 것이다....음식마저 종교적 편협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만들 수 있는 정신 상태가 내 흥미를 끈다. 노동계급인 카톨릭교도는 절대 그만큼 어리석을정도로 엄격해지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카톨릭 신자라는 사실에 골몰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며, 자신이 카톨릭 교를 안 믿는 이웃과 다르다는 것을 특별히 의식하지 않는다...고집불통이 되는 법은' 배운' 사람만이. 특히 문인만이 안다. 이는공산주의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순결한 형태의 신조는 진짜 프롤레타리아에게선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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