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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균형 ㅣ 아시아 문학선 3
로힌턴 미스트리 지음, 손석주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09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얼마전 읽은 줌파 라히리의 < 그저 좋은 사람> 를 보면서 인도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 못지 않게 명문대에 의사, 박사, 변호사에 집착하는 것에 실소한 적이 있다. 능력이 있어 명문대 가는걸 누가 뭐라 하겠는가? 하지만 부모의 기대나 명예 때문에 목숨 걸고 가야 한다는건 아무래도 시대 착오 같아 보인다. 다중 지능 시대, 아이가 원하는 것을 시키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전문가가 떠드는 요즘에도 여전히 간판이 대세라고 외치는 그들, 왜 그들은 그렇게도 명문대에 목숨 거는걸까 생각해 보니 한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영국인, 인도인, 일본인, 한국인, 모두 계급사회의 잔향이 남아있는 나라들이다. 밟지 않으면 밟힌다는 생각이 여전히 위세를 자랑하는... 그에 비한다면 프랑스는 다를거라 생각되는게, 한때 귀족들의 나라였으나, 못살겠다면서 민중들이 아예 귀족들을 참수해버린 혁명의 나라니 말이다. 아마도 프랑스에선 포도주를 만드는 장인이나 맛난 음식을 만드는 주방장, 예술가나 배우, 미장이나 의사가 다들 그 재능만큼의 대우를 받지 않을까 싶다.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 위에 서 있지 않다는 것, 그걸 부인하는 사람은 자칫하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으니 생각 잘 해서 행동하라는걸 몸으로 보여준 선조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우리가 어느 정도는 불평등 주의자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보르헤스가 자신의 시대 사람들 대부분이 인종차별주의자였다고 고백했듯이, 우리 역시 평등주의자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린 이런 책을 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심하게 불평등한 나라의 실상을 보면서 우리 자신안에 숨겨져 있는 악습의 잔재를 뒤돌아 볼 수도 있을테니까. 단지 비참함을 목도하면서 그런 나라에 살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것이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균형이란 것에 한번쯤 숙고해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아시다시피 인도는 아직도 카스트가 존재하는 나라다. 남편이 죽으면 아내를 순장하고, 지참금이 적다고 신부를 태워 죽이는 나라. 그가 어떤 영혼을 지닌 사람이건 간에 수드라 출신이면 버러지만도 못한 취급을 받아야 하는 나라. 부당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불가한 부조리한 나라에서 그래도 희망을 찾는다면 어디서 찾아야 하는 걸까? 작가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하자.
오빠의 반대를 무릅쓰고 가난한 남편과 결혼한 디나는 그가 3년만에 죽자 망연자실한다. 재혼하라는 오빠의 성화에도 재봉사로 독립된 삶을 꾸려가던 그녀는 나이가 들어 시력이 나빠지자 생활이 곤란해진다. 죽어도 오빠에게 기대긴 싫은 디나는 혼자 살던 자신의 아파트에 동창생의 대학생 아들 미넥을 하숙생으로 들인다. 재봉사 둘도 구해 영세 자영업자의 길을 걷게 되는 디나,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럽기만 하다. 그렇게 우연히 한 아파트에 모인 네 사람, 미넥과 디나, 그리고 불가촉 천민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시로 온 이시바와 그의 조카 옴프라카시는 좁은 공간에서 복작대게 된다. 아파트는 곧 서로를 불신하고 경계하는 불만의 장이 되 버린다. 머물 곳이 없었던 이시바와 옴프라카시는 무허가 판자촌에 방을 마련하나, 일에서 돌아와보니 철거되고 없자 황망해 한다. 그들의 딱한 처지를 불쌍히 여긴 미넥은 디나에게 며칠만이라도 있게 해달라고 부탁하나 거절당한다. 약국 옆 길거리에서 잠을 청하던 두 사람은 <거지 박멸 프로그램>에 걸려 공사장으로 끌려 간다. 거지 왕에게 뇌물을 주고 나서야 간신히 풀려난 두 사람, 사정을 들은 디나는 마침내 그들을 아파트에 살게 한다. 천민에 빈털털이인 자신들을 거두어준 디나가 무한정 고마운 이시바와 옴프라카시는 최대한 그녀에게 잘 하려 노력한다. 그렇다보니 몇 달 전만해도 전혀 남남이었던 네 사람은 전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친구가 되어 있었다. 동갑인 미넥과 옴프라카시가 친하게 지내는걸 흐믓하게 바라보던 이시바는 이제 안정된 직장도 있겠다 남은 거라곤 조카인 옴프라카시를 결혼시키는 것이라면서 설쳐대기 시작한다. 어렵게 맛 보는 인간다운 생활에 만족한 조카의 항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적당한 신부를 골라 놨다는 편지에 고향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싣는 이시바와 옴프라카시, 행복한 신혼 부부의 귀환을 기다리던 디나는 그들에게서 몇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자 배신감에 치를 떠는데... 과연 그들에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어쩌면 이렇게 이야기를 잘 할까 싶을 정도로 탁월한 이야기꾼의 책이었다. 숨가쁘게 이어지는 사건과 사고들. 인상적인 것은 보통 이 정도의 장편에 끼여들기 마련인 지루하고 어색하며 잘못 끼워진 듯한 문장들을 이 책에선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875페이지의 장편이라는걸 감안하면, 대단히 공을 들인 책이지 싶다. 물론 필력이 좋아서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단 다듬고 다듬고 또 다듬은 흔적이란 느낌이다. 눈을 뗄 수 없는 흡입력 있는 문장, 흔하게 들을 수 없는 역동적이고 현란한 이야기들, 너무 끔찍해서 믿기 힘든 현실을 설득력있게 그려내는데 마지막 페이지를 읽기전까진 도무지 궁금해서 책을 내려 놓을 수 없었다. 그건 무엇보다 등장인물들때문에도 그랬을 것이다. 홀로 인생을 꾸리느라 사람을 경계하고 불신하게 된 새침떼기 디나, 착한 심성으로 카스트라는 관습에서 자유로웠던 미넥, 단지 바라는 것은 조카의 행복뿐이었던 순박한 이시바, 혁명가인 아빠의 피를 이어받아 늘 피가 끓는 옴프라카시. 그들이 어쩌다 한 공간에 모여 서로를 이해하고 도와주는 모습이 어찌나 보기 좋던지... 부당하게 대우받던 외롭고 서러운 사람들이 드디어 자신들의 진가를 인정받으며 마음편하게 사는 것을 보니 그들이 불행하게 될까 마음을 졸이느라 책을 내려 놓을 수 없었다. 내려 놓는다고 결론이 달라질리도 없는데 말이다. 아마도 그랬기에 그들의 소박한 삶을 짓밟는 브라만들의 횡포에 더 화가 났을 것이다. 왜 언제나 더 많이 가진 자들은 적게 가진 자들의 마지막 사탕까지 빼앗아 먹는 것일까. 그러지 않아도 사는덴 지장 없을텐데 말이다. 인간을 개 취급만도 안 하는 인도의 카스트를 보면서 인도에서 업이란 개념이 생겨난 것도 이상할게 하나도 없단 생각이 들었다. 후생이나 업이 아니라면 불가천촉민들의 억울함을 그 누가 풀어주겠는가. 인간에게 보이지 않는 계급이 존재한다 생각하는 한, 그것이 절대 불변의 것이라 믿는 한, 인도라는 나라의 정신병적 증상은 여전하지 않겠나 싶다. 그것이 고쳐지지도 완화될 수도 없는 인도의 고질병이라면, 과연 과연 그 끔찍한 실상을 아는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회의가 들었다.
그 순간, 작가는 반전처럼 희망을 들이민다.
작가가 들이민 희망은 어찌나 희미하고 소박하며 보잘 것 없던지 자칫 못 알아볼 뻔 했다. 주변에 있는 것이라 애써 찾지도 않는 그런 것들. 하지만 울림에 있어서만은 보잘 것 없지도 작지도 않는 것, 그것은 바로 인간의 온기였다. 그것이야말로 부정의와 불평등, 비참함과 끊이질 않는 불행 속에서도 인도인들이 웃을 수 있는 이유기도 했다. 카스트라는 저질 관습도 망가뜨리지 못하는 인간의 마지막 보류, 인간애가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안인가. (모두에게 평등하고) 적절한 균형? 어쩜 그건 우리들의 이상에 불과한 것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온기는 이상이 아니다. 현실이다. 짐작컨대, 아마 우리의 이상을 실현하기에 가장 적절한 자질 역시 우리의 온기가 아닐까 한다. 두꺼운 페이지로 독자를 압박하면서 지독하게 이리저리 끌고 다니는 불친절한 책이지만 그럼에도 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는건 바로 그걸 짚어내는 작가의 혜안 때문이 아닐런지...